시집 속 詩

이 한권의 책 / 이진심

자크라캉 2006. 4. 6. 23:16

 

 

이 한 권의 책 / 이진심

 

 

엉금엉금 기어서

일생동안 겨우 당도한 책상 위에

이 쓸모없는 손을 올려 놓는다

 

두 손의 겉장은

몇 개의 칼자국과 굳은살로 너덜너덜하게

닳아있다

 

살아생전의 일을 고하라고 한다면

이 손을 읽어딜라고 간구하겠다

이 손위에 난 흔적들을 들여다보아

달라고

이것이 내 일생의 주행기록이라고

 

이미 괴로움이란 괴로움은 다 지워져버린

가여운 책을,

길들이란 길들은 다 흐려져 있는

삼중당문고 같은 손바닥을

책상 위에 고요히 올려놓겠다

 

찢어버린 페이지가  많았던

그 책에 엎드려 나는 잠들었다

 

어두운 강물에 누워 멀리멀리 떠내려가는

꿈을 꾸었다

밑줄 그었던 구절마다 커다란 웅덩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악기 다루는 아름다운 책을 원했으나

도구와 무기를 다루는 목록뿐이었다

도구를 다룰 때마다

무기를 휘둘러 조금씩 전진해 나갈 때마다

이 가벼운 삶을 악기처럼

이 무거운 일상을 악기처럼

이 느린 괴로움을 내가 가진 악기처럼 연주하였다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책을

두 손을 나는 갖게 되었다

아무 것도 쓰여져 있지 않은 책

너무 가여웠으나

너무 무거워 아무도 훔쳐 갈 수 없었던 .

닳고 닳아 누구라도 건드리면 푹 먼지를

날리며

저 혼자 무너져버릴 가엾은 책

 

나는 책에게 조금씩 먹혀 들어갔다

여백마다 적혀진 굵은 글씨를 보면 알수 있다

어떻게 책의 입 속으로 내가 빨려 들어갔는지를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시집-불타버린 집 (포엠토피아)

 

 이진심  시인

 1966년 인천 출생

 1992년 제 11회 동서문학 신인상

 1993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