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시 100편/오남구작
벽, 멈추어 서버린 그곳
-하관
차마 헤어질 수가 없다
눈길 꽃상여를 따라가다 따라가다
멈추어 서버린
그곳.-싸르륵
첫흙을 던지는 캄캄한 일순
벽이 보인다.
이승과 저승 사이의 냉정한
벽. -싸르륵! 싸르륵! 싸륵!
덮는 핏빛 흙
덮는 눈발
삭풍소리 억새칼잎소리 소리란 소리
세상의 차가운 것들
덮어서 쌓여서 솟은
이쁘게 만들어서 더 슬픈 봉분
새삼 보는 벽이다. 벽
더는 따라갈 수가 없고 멈추어
서버린 그곳. -싸륵! 싸륵!
간 발자국을 되밟아서 오는 우리
흰옷 머리 숙여 눈 쌓이고
말들 잃은 채
눈 위에 그린 한 폭 수묵화다.
* 양병호의 시 읽기/ 별리의 겨울
인용시는 남겨진 자에 의해 토로된 단절의 절망감이 짙게 형상화되
어 있습니다. 떠난 자는 완벽한 잠적을 통해 자유를 얻지만 남은 자
는 슬픔과 그리움이라는 유품을 품에 안고 괴로워해야 합니다. 떠난
자는 물리적 소멸을 통해 이미 관계의 단절을 증명했습니다만, 남은
자는‘차마 헤어질 수가 없다’며 현실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눈이
하얗게 내려 모든 사물의 경계가 지워져 버린, 아니 이승과 저승의
경계조하 희미해져 버린 매서운 겨울날, 음울한 만가 소리 펄럭이며
꽃상여가 여행을 가듯 저승길을 갑니다. 상두꾼들은 엎어지며 미끄
러지며 상여를 메고 당도한 산기슭, 따끈한 흙더미 파헤쳐진 굴헝이
나타납니다. 상여 뒤를 다르던 상주들이 갑자기 따그르르 울음을 꽃
피워 올립니다. 그때 하늘을 날던 철새들 흘낏 한 번 쳐다보고 대수
롭지 않다는 듯 그저 갈 길을 나래 쳐 갑니다.
딱따구리처럼 울어대는 상주들 사이로 관이 훈김 나는 굴헝에 고즈
너기 자리를 잡습니다. 이승의 심난하고 파란만장 했던 삶의 과업을
다하고 난 뒤의 홀가분한 자세가 역력합니다. 그 관 위로 맏상주부
터 시작하여, 모두들 흙에서 출발하여 흙으로 돌아가는 자의 도정을
위로하는 흙의 세례를 퍼붓습니다. 그 흙의 세례가‘싸르륵! 싸륵!
싸륵! 이렇게 아름답게 들리다니요, 그 흙의 세례를 통해 떠난 자
와 남은 자 사이에 이승과 저승 사이에 냉정한 벽이 형성됩니다. 남
은자들은 그 벽을 수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떠난 자의 죽음을 확인
하고, 또 남은 생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다짐으로 마침내 조심조
심 흙을 밟아다지며 이별을 완성합니다.
‘핏빛 흙, 눈발, 삭풍소리, 차가운 것들 모조리 덮고 쌓아 만든 봉
분 하나 참으로 이쁘기만 합니다.‘이쁘게 만들어서 더 슬픈 봉분’
이 하나 떠난 자의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그 봉분을 뒤에 남겨둔 채
상객들은 다시 미완의, 부조리의, 심난한 삶 속으로 말없이 돌아옵
니다. 그 길 위로 괜찮타 괜찮타 허름한 어깨를 토닥이며 눈발이 퍼
붓습니다. 퍼붓는 눈발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한 폭의 수묵화가 그려
집니다. 그래요. 죽음/삶이 한폭의 수묵화 같기만 하기를 바라며 살
수밖에요. 담담한 슬픔이 배어날 듯 배어날 듯, 어디서 아련하게 만
가 소리 들릴 듯 말 듯한 이 겨울. 견디는 일만이 버티는 일만이 우
리들 인생이 아닐지 몰라요. 아니 인생이 곧 겨우살이 아닐지 몰라
요.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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