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이전의 탈관념시-문덕수 지음「오늘의 시작법」
경운동 88번지로 간다
-오남구 작
‘탈관념’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언어 이전의 사물세계를 강조하는 오진현 시인이 있다. 21세기의 오늘을 아날로그 시대가 아니라 디지털시대로 보는 오진현은 ‘염사’(念寫), ‘접사’(接寫), 즉 쓰는 것이 아니라 ‘찍는다’ 등의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내면서(물론 다른 분야에서 쓰는 용어지만) 또 다른 모험을 하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고, 그 다음에 그의 작품을 보기로 한다.
지금까지 아날로그의 시대의 시가 ‘기술’ 또는 ‘자동기술’하는 것이라면, 미래의 디지털시대의 시는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염사(念寫)’ 또는 ‘접사(接寫)’의 ‘찍는다’는 행위로 구분 짓는다.… 언어로 ‘기술’ 또는 ‘자동기술’하다 보면 생각이 들어가고 의식이 들어간다. 그러므로 시인의 생각과 의식을 배제시키는 방법으로 언어 이전의언어(사물언어)로 사물을 사진찍듯이 찍는다.
― 오진현,「디지털리즘 선언」에서
오진현의 말은 별것이 아닌 것같이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과격한 발언임을 알게 된다. 그가 이러한 발언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그 여부는 차치하고, 그렇게 생각 된다. ‘언어 이전의 언어’(사물언어)라는 대목은 필자의 논문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시문학』,2002.3 )에서 말한 ‘언어 이전의 사물’과 같은 의미로 생각된다. 오진현은 ‘쓴다’든지 ‘그린다’든지 하는 것에는 생각과 의식이 들어가므로 그런 말을 피하고, 사진 찍듯이 ‘염사’하거나(심리세계의 사물을 찍는 것) ‘접사’해야(바깥세계의 사물을 찍는 것)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관념적인 언어를 관념 이전의 언어로 바꿀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이 탈관념 시론의 요지이다.
461120 - 10675×× 오진현
2002년 12월 29일 57세로 살아 있음.
빨간 신호등이 켜졌다가 파란 신호등이 켜졌다. 뇌세포의 신경체계가 잘 유지돤다. 오늘 경운동 88번지에 도착할 시간 10분 남았고. 잠깐 내 모습의 환영, 팔순 노구가 앞을 멈칫멈칫 가다가 쉰다.
말없이 손을 내밀어 잡는다. 이때 번쩍 뇌세포에 녹화된 화면이 켜진다. 2002년 12월 24일 밤, 행렬이 거리를 넘친다. 징그러 징그러 노랫소리 질퍽하고, 한 목사가 하늘에서 돈뭉치를 뿌린다. 파란 만원짜리 지폐들 낙엽처럼 날리고 한 무리 병들고 나약한 노구들이 돈을 향해 허우적 허우적 아우성친다.
띵―, 붉은 등이 켜진다. 다시「복제인간 아기탄생!」화면이 겹친다. 몸이 떨린다 쾅! 쾅! 쾅! 맥박이 가슴 친다 숨이 가빠지고 정신이 없다 인내천 인내천 소리치고 숨을 고르면서 경운동 88번지로 가는 탈출구를 찾는다. 쏴아―, 싸늘한 바람,
번쩍, 5번 출구의 표시등이 켜졌다. 침략으로 점멸하기 시작하는 신호→ ⑤번출구『⑤수운회관이 깜박 ⑤수협중앙회로 바뀌었다가 깜박 ⑤수운회관으로 바뀌었다가 깜박 ⑤아랍문화원으로』바뀐다.
시련의 점멸하는 이름 동학 수운, 화살표를 바라보며 내 신호 체계가 경운동 88번지로 간다.
-오진현,「경운동 88번지로 간다」
맨 앞의 고딕체 두 줄은 작자인 오진현의 주민등록번호와, 이 작품을 쓸 때의 연월일 및 자기 나이다. 이것은 자기 생존의 확인이다.
“빨간 신호등이 켜졌다가 파란 신호등이 켜졌다”는 경운동 88번지 수운회관으로 가는 거리의 신호등의 움직임이다. 이 신호등은 객관세계, 외부세계의 현상이다. 그 다음, 돌연히 자기의 내면세계 또는 의식 세계로 바뀐다. “뇌세포에 깜박이는 신호체계가 잘 유지 된다”는 것은 의식(意識)의 현상이, 바깥의 거리에 있는 신호등 체계와 일치한다. 그 다음의 시행, “오늘 경운동 88번지에 도착할 시간 10분 남았고”는 현실인 객관세계의 시간 확인의 표시이며, 그 다음의 “잠깐 내 모습 팔순 노구의 환영”은 80세가 된 미래의 자기 모습의 환영(幻影)을 의식 속에 떠올려 본 것이며, 그 다음의 “앞을 멈칫 멈칫 가다가 쉰다”는 실제로 수운회관을 향하여 걸어가는 현재의 자기의 보행과 80세가 되어 노쇠해 버린 자기 보행이 겹쳐진 이중 이미지다.
제2연의 “말없이 손을 내밀어 잡는다”는 실제의 신체적 동작인 것 같지만, 손을 어디로 내밀어 무엇을 잡는지 확실하지 않다. 이렇게 불확실 상태로 손을 내민 때, 이 시인의 뇌세포에 이미 과거에 녹화된 화면의 번쩍 켜진다. “2002년 12월 24일~ 돈을 향해 허우적 허우적 아우성친다”까지의 광경이다. 이 장면은 세속화한 기독교적 신앙을 풍자한 것으로 보이나 작자는 그러한 해석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맡기고 있다. 독자도 시 창작에 참여하는 시를 써야 한다는 이 시인의 시론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3연의 “띵―, 붉은 등이 켜진다”는 거리의 신호등 광경 즉 객관적 현실이고, “다시「복제인간 아기 탄생!」화면이 겹친다”는 지난날에 녹화해 둔 의식세계(심리세계)의 이미지다. 그 다음에 또 “몸이 떨린다 쾅! 쾅! 쾅!…”이라는 현실의 자기 신체적 흥분이 연속된다. 현실, 심리의 연속적 교차임을 알게 된다.
이하 모두 이러한 방법으로 분석하면 이 시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행히 수운회관이 있는 방향으로 그의 발걸음은 순조롭게 이동한다. 이 시는 공간적으로 외부세계와 내면세계, 시간상으로는 과거/현재/미래가 동시 공존하는 상태를 보여준다. 공간이나 시간의 현실적 이미지의 단편들과 의식의 내면에 떠오르는 영상들을 그대로 촬영하는 수법으로 염사 또는 접사한 것이다.
오진현의 이러한 탈관념의 방법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난다. 김춘수가 말한 대상과 배경의 취사선택이나 필요할 때의 부분적 과장과 같은 재구성의 과정이, 오진현의 염사나 접사의 경우에는 전혀 없는가 하는 점도 문제가 된다. 즉 염사하고 접사할 때, 또는 그것이 끝난 뒤에 말을 고치고 보태고 하는 것, 또는 취사선택 활동이 정말 없을까 하는 점이다. 어쨌든 오진현은 염사, 접사의 방법에서 시의 의식적 구성 논리와는 반대 입장을 취한다.
또 김춘수가 재구성 과정에서 논리와 자유연상이 끼어들어 그것이 심하면 대상이 부숴져 버린다고도 한다. 그런데, 오진현의 경우, 대상을 컴퓨터나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과 같으므로 여기에는 ‘논리’의 개입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도 오진현은 무의미시의 창작법과는 맞서는 입장에 있다고 하겠다.(문덕수 지음,「오늘의 詩作法」, p156~159)
오진현(吳鎭賢)도 처음에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시인이고, 또 그러한 모험적인 실험시를 많이 발표했다. 최근에 디지털시대의 시로서 ‘탈관념’을 표방하면서『디지털리즘』이라는 동인지를 주재하고 있다. 시인이란 상상을 넘어서는 용량을 지닌 컴퓨터 같은 존재로 보고, ‘ 염사(念寫)’ 또는 ‘접사(接寫)’와 같은 자신의 시 방법을 내세우고 있다. 그(필명:오남구)의 말을 들어 보자.
나는 무아지경으로 명상하고 있다가 떠오르는 무의식의 세계를 체험했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집중하면 깊이 잠재했던 세계가 스크린에 나타나듯 선명하게 떠오른다. 심지어는 거울에 보이듯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도 한다. 이 때 나타나는 영상은 임의대로 수정되거나 생각이 끼어들지 않는다. 이런 내면세계 ‘염사’를 혹자는 초현실주의니 자동기술이니 하는데, 자동기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자동기술은 말 그대로 임의로 시를 쓸 수 없고, 질서도 없고 통제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자연 발생적이다. 반면에 ‘염사’는 자연발생이 아니다. 자기 최면 또는 선(禪)에 들면, 임의로 on/off가 가능하고, 컴퓨터를 켠 듯 무아지경의 맑은 의식상태에서 본다. 그러나 컴퓨터와도 또 다르다. 나만의 폐쇄회로이며, 영상이 일회성으로 거품처럼 곧 사라진다..
-오진현,「탈관념의 디지털리즘 시쓰기」에서
꽤 긴 글을 인용했지만, 여기서 오진현이 모험하고 있는 탈관념의 디지털리즘 시쓰기의 일단을 이해할 수 있다. 그가 내세우고 있는 ‘염사’나 ‘접사’는 자동기술법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이싿. 이 점에 대한 문제는 계속 오진현의 앞을 가로막을 요인을 내포하고 있다. ‘염사’는 심층심리나 무의식 세계의 이미저리를, ‘접사’는 외부세계의 객관적 이미저리를 각각 카메라처럼 촬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한 편의 작품은 심리와 현실, 내면과 외면이 염사와 접사로서 동시 공존으로 구성되고 있다. 그의 실험과 모험을 계속 주시해 본다.(문덕수 지음,「오늘의 詩作法」, p291~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