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관념의 'Showing'
―시점의 문제
주제 발표 / 오남구(시인,문학 평론)
이 논문은 2005.6.24.(금) 배재회관에서 오진현(오남구)시인이“디지털 시대의 나의 시쓰기”란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이다. 여기에서 아날로그의 시를‘말하기'(telling)라 하고 디지털의 시를 '보여주기'(Showing)라 하여 구분짓고 있으며, 이를 비교하였다. 특히 디지털의 시를‘생명의 절편’이란 비유를 들어, 종래의 아날로그의 언어 수사학적 기술 방법에만 의지하던 것을 현미경을 통해 생명의 절편을 보여주듯, 사물성의 확장된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아날로그와 상대적 특성을 나타내는데, 디지털이 사물을 점으로 표현하듯 문장이 끊어지며 이미지 사이에 공간이 확보되고 표현이 압축된다. 그러므로 독자가 시쓰기에 참여하여 많은 상상의 세계를 펼 수 있다. 한편 여기에서 난해성이 지적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사물성의 물리적 가능성과 심리적 가능성을 확보하게 되면, 절편(unit)처럼 놓여진 이미지가 마음속에서 마치 영사기에서 돌아가는 필름처럼 잔상이 이어진다고 한다.(송시월정리)
< 들어가며 >
필자는 담대담소膽大膽小의 가르침에 어긋남을 무릅쓰고 탈관념시론에 바탕하여 “디지털 문학 선언”을 한 바 있다.(「이상의 디지털리즘」 범우사 간, 2005. 4. 15) 탈관념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살가죽이 벗겨진 시신이 한 손에 자신이 벗겨내진 살가죽을 들고 서 있는 것처럼 관념이라는 표피를 탈피하여 직관한 신선한 참의 세계>를 일컬으며 그러한 탈관념 시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디지털 문학’ 혹은 ‘디지털리즘 문학’이라 하겠다. 아울러 그러한 탈관념적인 디지털 문학의 원점을 이상李箱의 시에서 찾고 있다. ‘디지털 문학’의 시쓰기란 ‘읽는 시’가 아니라 ‘보는 시’를 창작해내는 것이기에 사진기술 상의 용어인 ‘접사’와 ‘염사’라는 단어로 디지털 문학으로서의 시쓰기(탈관념의 보여주기- ‘Showing’)에 대한 개념정리를 하였다.
‘접사’란 물체가 반사시키는 빛의 카메라의 렌즈구멍을 통해 들어와서 생긴 영상을 촬영하는 기술이며, ‘염사’는 일종의 선적현상으로서 내면세계의 잠재영상을 촬영하는 기술이다. 그런데, 일단 있는 그대로의 사물, 즉 관념의 제로 포인트(탈관념의 상태, ―본질의 상태)인 물체를 촬영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21세기 디지털시대에 걸맞은 문학개념을 나름대로 정립해 보려고 시도했다..
디지털시대의 ‘보는 시’는 사진이 아니다. 사진작가가 아닌 시인에 의해서 언어로 표현되므로 많은 문제점과 연구과제가 내포되어 있다. ‘염사’와 ‘접사’의 시쓰기는 셔터만 누르면 찍히는 사진기술 같이 쉽지 않다고 본다. 시인의 인식을 사진 찍듯 하는 것이므로, 우선 먼저 시인이 수사학 등 시쓰기의 기본 바탕이 이루어져서 묘사가 어느 정도 (쥐어짜듯 골몰히 생각하지 않고) 익숙해져 있어야 하고, 또 대상을 보는 시점(視点)에 문제가 됨을 알고 있어야 한다. 시점에 따라 다양한 내용(본질)이 나타나기 때문에 ‘염사’와 ‘접사’의 시점 문제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Ⅰ
디지털에 대해 간략히 정리한다
디지트(digit)는 손․발가락이란 뜻인데 수를 센 것에서 유래하여 ‘숫자’를 의미한다. 디지털은 ‘수(數)를 사용하는’ ‘디지털형(型)의’이란 뜻과 같이, 컴퓨터에서 소리나 화상 등을 ‘0’과 ‘1’의 두 가지 숫자를 이용하여 데이터화하여 사용한다. 이를 ‘2진 데이터’ 또는 ‘디지털언어’라고도 한다.
컴퓨터의 점화(그림, 사진 등)를 확대해 보면, 가로축과 세로축으로 일정하게 나열된 점이 나타난다(좌표계: Coordinate System). 이를 ‘망점(DPI)’ 또는 ‘화소’라고 한다. 이 망점이 촘촘히 많으면 화소가 높다고 하고 적으면 화소가 낮다고 한다. 이 점들은 가로축과 세로축의 값으로 위치가 표시된다. 이 위치를 2진법의 숫자로 표시하면, 어떤 점이든 가로와 세로의 위치를 나타내는 2진법의 숫자로 나타낼 수 있다. 이것을 ‘데이터화’라고 한다.
이렇게 디지털은 ‘수(數)를 사용하는’이란 뜻에서 구체적으로 좌표계의 ‘2진 데이터를 사용하는’이란 것이 되는데 여기에서 왜, 2진 데이터화 하는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컴퓨터에서 2진법을 쓰는 이유는 숫자가 ‘0’과 ‘1’ 두 가지만 있으므로 ‘1’을 on, ‘0’을 off로 약속하면 간단히 on/off의 깜박임만으로 숫자를 말하여 신호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는 모르스부호(Morse Corde)처럼 신호(Sign)기능을 하므로 ‘디지털언어’라고도 한다. 디지털은 일종의 언어기능을 하는 시스템이다. 원래 컴퓨터는 연산(계산)하는 계산기에서부터 비롯된 것인데 여기에 on/off 디지털의 신호기능(또는 언어기능)을 갖게 되었다.
디지털은 중요한 특성들을 가지게 된다. 소리를 예로 들면, 아날로그(※ 녹음테이프)는 그대로 복사해서 전송하므로 잡음이 생겨 명징한 정보를 전달할 수 없다. 이에 반해 디지털(※ CD)은 신호을 보내고 그 신호(정보)를 받아 모뎀에서 재생시킴으로써 원본 CD와 동일한 소리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디지털은 데이터를 아무리 반복해서 다운 받아 재생시켜도 질이 떨어지지 않지만 아날로그는 복사할수록 질이 떨어진다.
특히 디지털은 정보(그림, 소리 등)를 좌표계의 점으로 인식하고 또 이를 압축시킴으로써 용량을 적게 하여 신속 정확하게 송․수신한다. 그래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통화하는 화상전화에서 보듯 ‘동시성’과 ‘시각성’ 등이 두드러진다. 디지털의 이러한 특성은 미디어의 혁명을 일으키고 급속히 영상시대를 열고 있다.
필자는 「이상의 디지털리즘」에서 밝힌 바 있다. 2003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다녀온 한 기자는,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 변하고 있다고 했다. 수없이 쏟아지는 시집이나 문학지들이 20세기 이후 급변하는 영상시대에서 이미 그 호소력을 잃고 있다고 했다. 특히 컴퓨터를 통한 영상미디어가 급속히 팽창되어 일대 혁명적인 큰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고, 10대들은 모니터 앞에 앉아 전 세계와 교감하고 있다. 지금은 디지털의 정보화시대이며 영상시대이다. 기존의 아날로그 시대의 ‘읽는 책’을 외면함으로써, 심각한 문맹률을 증대하게 한다. 한 앙케이트의 조사에 의하면, 특히 소설이나 산문에 비해 시의 문맹률은 전문적인 문인사회에서조차 아주 높은 편이다. 시도 영상시대의 사회적 현상에 따라 ‘읽는 시’에서 ‘보는 시’로의 변화가 요구된다.
특히 오늘의 첨단 과학은 바이오소자1)의 반도체와 광소자2)의 칩이 개발되었으며 인공지능 컴퓨터가 등장했다. 그래서 소형의 컴퓨터가 많은 양의 정보를 처리한다. 이 컴퓨터는 그래픽(2D, 3D, 4D)3)의 도형이나 그림, 화상 등 시각적인 요소를 쉽게 디지털화 한다. 그리고 멀티미디어의 문자, 그림, 이미지, 음성 등 다양한 매체로 이루어진 정보를 빠르게 상호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인공지능, 즉 인간의 학습능력과 추론능력, 지각능력, 자연언어의 이해능력 등의 프로그램을 실행한다.
현대 과학의 중심에는 컴퓨터가 있다. 이러한 컴퓨터가 ‘사용자 중심의 컴퓨터 환경(GUI)4)으로 발전되어, 마우스로 프로그램을 쉽게 실행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인터넷이 대중화․개인화되었다. 그래서 컴퓨터를 통해 영상, 음성, 매체들의 정보를 각 개인이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종합적인 컴퓨터 기술인 멀티미디어5)가 발전했다. 급속히 정보화 사회가 이루어지며 컴퓨터그래픽과 연관되어 비디오, 레이저, 빛, 소리 등을 이용한 공간예술 및 미디어예술이 발전하여 멀티미디어의 영상시대를 열고 있다.
화상전화는 그 좋은 예다. 시각성과 동시성이 두드러져 시․공간의 개념을 무너뜨려 버린다. 지구 반대 편에 있는 사람과 얼굴을 보며 통화한다. 현재 생활공간은 CF가 범람하고, “영상 속에 내던져져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렇게 디지털은 오늘의 영상시대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첨단 과학의 정보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지식이 팽창됨으로써 인식이 확장되고 있다. 기존의 아날로그의 관념들이 무차별 무너지고 하루가 다르게 뇌과학이며 유전공학이며 입자물리학이 발달하며 인체의 신비가 베일을 벗으면서 게놈지도가 우리 앞에 드러나고 있다. 이렇듯 첨단과학의 디지털시대가 열림으로서 과거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던 충격적인 생명의 실체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래서 21세기의 시는 ‘언어 이전의 사물의 인식’을 강조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보는 시’가 디지털의 영상성에서 기인했다면, ‘인식의 확장’은 정보(사물성)를 데이터화 하는 인공지능 컴퓨터의 디지털 인식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즉, 데이터화한 ‘디지털언어’의 화소(점)는 2진법의 숫자로 약속된 캐릭터가 있는 독립된 단위(unite)이다. 그런데 이 점을 하나하나의 눈이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만일 디지털 카메라가 530만 화소라고 하면 가로 세로축으로 배열된 530만 개의 눈이 있다고 생각하면 디지털의 사물 인식 체계를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다. 시인의 눈은 530만 개의 화소처럼 관념없이 사물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디지털의 눈으로 사물을 보듯, 사물을 인식하여 보는 시의 새로운 디지털적 이미지(아날로그의 보통 사람의 눈은 단일 시점에서 이미지를 만든다.)를 갈망했다.( 필자는 ‘언어기능을 하는 것’을 ‘디지털’이라 지칭하고, ‘염사’와 ‘접사’에 의한 탈관념의 보여주기(Showing)를 ‘디지털적 시쓰기’ 또는 ‘디지털리즘’이라 한다. 이것은 디지털적 탈관념으로서, 다시 순수성(본성, 동학에서 천성)을 찾는 새 패러다임, 즉 ‘디지털에 의해 형성된 비인간성을 해체한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시인은 한 시대를 살며 그 시대의 시를 쓴다. 영상시대에 맞추어서 ‘보는 시’로의 시의 이행은 필연적이라고 본다. 디지털시대의 시는 시각성이 두드러진 ‘회화적 이미지를 보여 주는 시’로서, 기존 모더니즘의 아날로그의 시가 “언어 예술이다”라고 한다면,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선다” (문덕수. 「오늘의 시작법」, 2003.)는 말은 디지털의 확장된 인식에서 볼 때에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필자가 디지털의 시는 “현미경의 유리판 위에 놓인 절편 같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러한 디지털시대의 시를 전망하며, 필자는 그 개념의 정리를 유보한다. 디지털과 함께 그 이론도 발전되어 가며 정리되어 갈 것이다. 다만, 종래의 뭉뚱그려져 있던 시의 개념이 분화되리라고 보며, 아날로그 시와 디지털시로 상대적인 개념을 갖게 되어, 디지털은 ‘보는 시’로 아날로그는 ‘읽는 시’로 대별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대비하여 보면 아날로그는 ‘자연’이고 디지털은 ‘기계’이다. 감각기관을 통한 자연한 인식과 생각을 아날로그 인식이라 하고, 디지트(digit) 즉 수(數)를 사용하는 컴퓨터에 의한 ‘확장된 인식’을 디지털 인식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아날로그’는 관념(언어)의 사회적 인문적 인식으로, 디지털은 직관의 체험적 물리적 인식으로 비교된다.
‘보는 시’란, 회화적 이미지를 ‘보는 시’를 말한다. ‘읽는 시’란, 시인의 생각이나 사유 등 관념의 언어를 읽는 시를 말한다. 시를 쓰는 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읽는 시’는 관념을 ‘말하기’라 할 수 있고 ‘보는 시’를 이미지를 ‘보여주기’라 할 수 있다(모더니즘의 이미지의 ‘시를 말하는 것(telling)’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showing)이다. 즉 디지털 방식의 ‘보여주기’를 말한다). 이 ‘보여주기’에는 ‘관념의 말’이 없고, 관념의 제로포인트인 ‘있는 그대로 대상을 묘사하여 보여줌’(디지털적)으로서 독자는 판토마임을 감상하듯 마음 속에서 생성한 이미지를 그려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가 시에 동참하는 것이 되며, 독자는 시를 볼 수 있는 수준만큼 내용을 상상하게 되고 관념화시키는 것도 제 마음대로다. 이러한 ‘보여주기’는 시인이 직접 말을 하지 않는 ‘간접화법’이라 할 수 있고, ‘말하기는’ 시인이 직접 말하는 ‘직접화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간접화법은 염화시중의 묘법같이, ‘언어 이전의 사물성’을 보여줌으로써 서로 소통하는 화법이 아닐까 싶다.
Ⅱ
‘보는 시’의 보여주기는 어떻게 하는가?, 시를 ‘염사’, ‘접사’로 찍는다고 하지만 언어로 찍는다는 것은 결국 언어로 묘사 또는 기술하는 것이 되므로, 독자의 관념을 깨뜨리고 소통해야 되는 탈관념(관념의 영점, 제로포인트)의 언어표현(이하 언표로 약칭)이 문제된다. 그래서 다음의 사진기법을 이용한 ‘탈관념의 디지털적 시쓰기(Showing)’로서 ‘접사’와 ‘염사’의 실험을 하게 된다.(「이상의 디지털리즘」 범우사, 2005. 4)
"지금까지 아날로그의 시대의 시가 ‘기술’ 또는 ‘자동기술’하는 것이라면, 미래 디지털 시대의 시는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염사(念寫)’ 또는 ‘접사(接寫)’의 ‘찍는다’는 행위로 구분 짓는다"라고 해서, 기존시의 시 방법을 무너뜨리려고 한다.
‘찍는다’는 행위를 "언어로 ‘기술’ 또는 ‘자동기술’하다 보면 생각이 들어가고 의식이 들어간다. 그러므로 시인의 생각과 의식을 배제시키는 방법으로, 나는 언어 이전의 언어(사물언어)로 사물을 사진 찍듯이 찍는다"라고 설명했는데, 그 방법으로서 내면세계를 ‘염사’하거나 원근법을 없애고 사물을 ‘접사’한다.
―「디지털리즘 선언」에서
시를 “기술하지 않고 찍는다는” 의미는, “관념의 언어로 본질을 흐리지 않고, 사진을 찍듯 있는 그대로의 대상(사물)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 행위는 시를 ‘쓴다’에서 시를 ‘보여 준다’로 개념을 바꾼다. 이를테면 나의 경우, 시의 이미지(회화성)는 ‘그리는 것’이 ‘쓰는 것’보다 자연스럽다. 이미지를 ‘쓴다’는 것은 만든다는 의미가 강하고 인위적(관념적)이므로 불만스럽다. 그런데 ‘그리는 것’ 또한 인위적인 것이므로, 즉 생각이 들어가고 의식이 들어가므로 사진 찍듯 사물을 ‘염사’하거나 접사하여, “관념적인 언어를 관념 이전의 언어”로 바꾼다. 그것은 어린이처럼 어떤 생각이 끼어들지 않은 직관으로서, 마치 내가 “인체의 신비전”에서 보았던 시뻘겋게 껍질이 벗겨진 시신처럼 관념을 벗긴 언어이다.
다음 시는, ꡔ첫나비, 아름다운 의미의 비행ꡕ이란 필자의 시집에 있는 탈관념의 시이다. 「첫나비」의 화두로서, “나는 기호 위를 날아간다.”고 전제하고 있는데, 기표에 첫나비가 날기 시작하는 의미의 비행으로, 사물과 사물이 만나는 ‘관계’에서 만들어 가는 의미(기의)를 뜻한다. 여기에서 ‘첫나비’를 ‘첫사랑’ 쯤의 언어로 바꾸어 놓으면, 첫나비의 ‘아름다운 의미의 비행’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무심히(관념이전) 차돌을 만나(눈맞추기), 직관의 ‘첫나비’가 돌 속을 날기 시작하면, ‘돌이 꽃이 된다.’ 바람이 불면 꽃밭이 되고, 리듬이 되고 의미가 의미를 낳고 ‘꽃이 별이 된다’.
내가 날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무심히 차돌을 본다
차돌 속을 날기 시작한다, 첫나비,
돌이 꽃이 된다
내 마음에 바람이 불면
꽃밭이 된다
숨이 살아 돌아서
숨이 살아 돌아서
리듬이 되고
의미는 의미를 낳고
꽃이 별이 된다
―「첫나비」전문
이렇듯 돌이 꽃이 되고 꽃이 별이 되고, 사물과 사물이 만나며 ‘의미의 탄생’이 이루어진다. 이 비행은 관념의 영점에서 날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 ‘아름다운 의미의 비행’은 관념이 되어 본질에서 아주 멀리 가버린다. 그러므로 처음의 관념의 영점(zero point)인 사물(사물성)을 찍게 되는데, 이런 ‘염사’와 ‘접사’가 바로 언어의 디지털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다음 염사와 접사의 예문을 살펴 본다.
(1) 염사
맹인은 촉각에 의지하며 사물을 인식한다. 손끝이 바로 눈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촉각에 의한 즉물판타지가 꿈으로 나타나는데 인터뷰한 바에 의하면 처음부터 빛을 보지 못한 사람과 빛을 보았던 사람이 서로 달랐다. 이 두 사람이 죽은 어머니에 대한 꿈을 꾸게 되면, 빛을 보지 못한 사람은 캄캄한 허공 속에 떠돌아다니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손으로 잡으려고 헤매게 되고, 빛을 보았던 사람은 하얀 허공 속에 떠돌아다니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손으로 잡으려고 헤맨다 한다.
이렇듯 체험의 유․무에 시각적인 또는 촉각적인 영상이 달리 나타나는데. 명상 체험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예기치 않았던 영상(影像)을 보게 된다. 잠재했던 세계가 스크린에 나타나듯 선명하게 떠오른다. 심지어는 거울에 보이듯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도 한다. 이 때 나타나는 영상은 임의대로 수정되거나 생각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즉, 보통 일상(日常)에서는 눈(目)의 시각(視覺)을 통하여 물상을 보게 되는데, 명상 중에는 눈을 감고 있는 상태에서 영상을 보게 된다. 이러한 것을 ‘눈으로 보지 않고 본다’는 시지불견(視之不見)이라 할 수 있을지. 의학적인 허상(虛象)과는 구별된다. 그것은 병적으로 허약하거나 무의식적인 상황에서 보는 ‘환상’이 아니라, 지극히 안정된 의식상태에서 임의로 ‘집중(명상)’함으로써 보게 되는 녹화 필름 같은 ‘잠재 영상’이다. ‘염사’는 이러한 것을 사진 현상하듯 묘사하는데, 서구의 자동기술법과는 차별되는 동양의 선적(禪的)인 것이라 할 수 있다.
461120-10675×× 吳鎭賢
2002년 12월 29일 57세로 살아 있음.
빨간 신호등이 켜졌다가 파란 신호등이 켜졌다. 뇌세포의 신경체계가 잘 유지된다. 오늘 경운동 88번지에 도착할 시간 10분 남았고. 잠깐 내 모습의 환영, 팔순 노구가 앞을 멈칫멈칫 가다가 쉰다.
말없이 손을 내밀어 잡는다. 이 때 번쩍 뇌세포에 녹화된 화면이 켜진다. 2002년 12월 24일 밤, 행렬이 거리를 넘친다. 징그러 징그러 노랫소리 질퍽하고, 한 목사가 하늘에서 돈뭉치를 뿌린다. 파란 만원짜리 지폐들 낙엽처럼 날리고 한 무리 병들고 나약한 노구들이 돈을 향해 허우적허우적 아우성친다
띵―, 붉은 등이 켜진다. 다시 ‘복제인간 아기탄생!’ 화면이 겹친다. 몸이 떨린다 쾅!쾅!쾅! 맥박이 가슴친다 숨이 가빠지고 정신이 없다 인내천 인내천 소리치고 숨을 고르면서 경운동 88번지로 가는 탈출구를 찾는다. 쏴아 ―. 싸늘한 바람,
번쩍, ⑤번 출구의 표시등이 켜졌다. 침략으로 점멸하기 시작하는 신호, →⑤번 출구,〈⑤수운회관이 깜박⑤수협중앙회로 바뀌었다가 깜박⑤수운회관으로 바뀌었다가 깜박⑤아랍문화원으로〉바뀐다.
시련의 점멸하는 이름 동학 수운, 화살표를 바라보며 내 신호체계가 경운동 88번지로 간다.
―「경운동 88번지로 간다」 전문
이 시는 지하철역에서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경운동 88번지로 가는 잠깐 동안의 염사이다.
2002년 12월 24일 무념한 상태로 걸어가던 중, 갑자기 앞에서 팔순 노구의 내가 멈칫 멈칫 가다가 쉰다. 손을 내밀어 노구를 부축하여 잡는다. 이때 또 과거의 영상들이 나타난다. 크리스마스의 행렬, 목사가 공중에서 날리는 지폐들, 허우적허우적 지폐를 잡는 노구들, 그때 띵 ― 붉은 등이 켜진다. 나는 몸을 떤다. 쾅쾅쾅 맥박이 가슴 치고 정신이 없다. 사람이 하늘 ! 사람이 하늘 ! 소리치고 경운동 88번지로 가는 탈출구를 찾는다.
이 시에는 현재 미래 과거 시점의 영상들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컴퓨터의 ‘in-put’와 ‘out-put’같다 할까, 무념한 상태에서 계단을 오르다가 나이를 직감한 순간에 떠오른 잠재영상인 듯싶다.
(2) 접사
전망대에 서서 조감도를 보며 ‘접사’를 말하려고 한다.
“그림을 보면 인수봉보다 백운대가 낮다. 실제로는 백운대가 높다. 이 그림은 진실이 가려져 있다. 그 이유는 일상적(고정관념) 시점인 원근법으로 그린 때문이다. 원근법을 없애고 접사하게 되면 마이너스 플러스가 없어진 절대값에 접근한다. 미분법에서 미분하듯 인식한 사물(대상 x, f(x))의 어떤 절대값만 남고 장․단 깊이가 없어진다. 다만 신호기능의 기호(記號)만 있다. 바로 디지털화이다.”
이 접사는 시쓰기에서 쉽지 않은 것 같다. 먼저 일상적 시점(고정관념)인 원근법을 없애고 사물을 본다는 것은 실제로 어렵다. 그런 만큼 사물을 보는 눈이 일상으로부터 탈관념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즉,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가 ‘마음의 눈’으로 접사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직관해야 한다. 결국 염사와 접사는 ‘직관’이라는 같은 맥락에 있으며, 염사가 깊은 ‘내면세계’라면 접사는 ‘현실세계’라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접사와 염사’는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있기도 한다.
텍스트는, 비가 오락가락 하고 있는 빗길 한 장면이다. 비를 직관하여 점점 가까이 접사하면, 극단적인 간결성으로 잡다한 상들이 사라지고 엑스레이에 뼈만 보이듯 명징하다.
드러나는 시각적인 선들이 차고, 단단하고, 날카롭다. 수직으로 수평으로 솟구치고 흐르고 팔딱 팔딱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지고도 한다. 접사하는 디지털 감각의 시를 보자.
비, 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선들이 팔딱팔딱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서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 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흘깃 보는, 조각 허공에서 뿌리는 부스러기 무지개
― 「부드러움의 단상」 전문
Ⅲ
염사와 접사의 시쓰기에는 대상을 바라보는 중요한 시점이 있게 된다. 사물을 어떤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내용(본질)이 나타난다. 하나의 컵을 앞에 놓고서도 그 모양이 위에서 보면 원이 보이고 옆에서 보면 사각형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아주 가까이 눈에 갖다대면 모양도 없어지고 장, 단 높이도 없어지고 투명한 유리벽만 보인다. 그리고 점점 멀리에 놓고 결국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대상은 있다.(여기서, 시에 본질이 있느냐 없느냐, 또는 대상이 있느냐 없느냐 등의 문제는 논외로 한다.)
아무튼 <도표 1>에서 쓰는(찍는) 주체 ‘나’와 쓰여지는(찍히는) 객체 ‘나’로 나누어지고, 텍스트적 주체의 대상을 A라 하면(이때 ‘我’는 大我, 또는 ‘性’, 「무의미의 이해와 반성」에서 논의) 먼저 늘 일상적으로 보고 있는 시점 P1을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을 ‘일상성의 시점’이라고 해보자. ‘일상성의 시점’에서 ‘염사’와 ‘접사’를 하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지극히 일상적인 권태로운 내용(의미)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일상의 생활 속에서 늘 반복해서 보고 생각하여 고정관념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를 ‘평면좌표에서’ 확인해 보면(「직관시의 수학적 존재 증명」), <도표 2>에 나타난 수평의 선분인 ‘가나’와 ‘다라’가 ‘일상성’을 나타내고 있다. 필자는 이것을 ‘일상성의 직선’이라 하고 시인의 죽음 또는 시의 죽음이라 했다.
이 도표는 인식의 단면으로, ‘높이’를 보고 있는 시인의 시점이 일상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ꡔ이상의 디지털리즘ꡕ 참고) 처음 고향에서 100M 높이를 일상적으로 바라보고 있던 ‘가나’가 있고, 1970년 어느 시점에서부터 300M 높이의 남산을 계속 일상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다라’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고정된 권태로운 일상이 옮겨지는 순간 긴장하여 수직 상승한 직선 ‘나다’가 나타난다. (이것을 순간적으로 변한 ‘의식의 기울기’로 파악하여 흥분, 또는 긴장으로 탈관념 시론의 단서가 된다).
이와 같이 긴장을 일으키고 ‘대상’을 인식하는 시간적 공간적인 시점이 무수히 있게 된다. <도표 1>을 보자. 처음 대상을 보는 일정한 시점(일상성)에서 옮겨가는 시점들이 나타난다. 이것을 P2, P3, … Pn이라 하고, 이 시점에서 다양한 내용의 영상이나 소리들이 시인의 체험으로 인식되어 잠재하게 된다고 보자. 그러면 이런 잠재한 인식들은 곧 체험에 의해 집합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이 이러한 것을 사진 찍듯이 묘사 해냄으로서 염사하고 접사해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체험에는 3차원의 공간적 시점과 4차원의 시공간적 시점이 있게 된다. 그 예로 <도표 3>의 3차원에 있는 피카소의 2개의 시점(P1, P2)과 4차원에 있는 백남준의 24개의 시점이 있는 「TV 시계」을 들 수 있다.
특히 「TV 시계」는 백남준의 미니멀비디오 작품으로 영상시대의 시점을 보여준다. 디지털 시대의 첨단 예술로 극단적인 ‘간결성’, 등의 특성이 있다. ‘미니멀 아트’는 1950년 대 후기에 시작된 ‘최소한의 조형수단’으로 제작했던 회화나 조각예술이다. 백남준은 그것을 멀티모니터로써 실현하여, 우연하고 단순한 기하학적인 형태를 반복적으로 설치한다.
〈그림
2, 미니멀 비디오〉-TV. 시계 그림을
보면, 멀티모니터가 24대 설치되어 있다. 12대의 흑백 텔레비전과 12대의 컬러 텔레비전을 사용하고 있다. 이 텔레비전들은 각기 밤과 낮의
시간을 대표한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연속적인 24대의 텔레비전에서 각기 구체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화상에 나타나고 있는
상이한 각도의 선들은 시계바늘을 생각하게 하지만 모방적인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 사진작가가 카메라로 단순히 시간의 시계바늘을 촬영하여 나열해
놓는 것이 아니라, 우연한 선의 모습으로 작가의 어떤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정적인 형태로 지구의 자전 도수에 따라 생기는
24시간 주기의 시간 구상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즉, 시간이 흐르는 4차원 공간의 인식을 찍은 24개의 시점이 있다.
물론 이들의 시점은 그림과 비디오의 예지만, 인식은 활자 이전의 문제로서 시인 또한 이들과 다르지 않다. 어느 시점의 이러한 체험을 찍는 ‘염사’와 ‘접사’는 곧 인식을 찍는 것이 된다.
Ⅳ
그런데 내면세계의 4차원 염사의 경우는 무척 복잡해진다. 주․객 사이에서 시점에 따라 발생하는 이미지들의, ‘대상’의 각기 다른 세계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도 하겠지만, 집합 결합하고, 연상 작용을 하여 어떤 질서를 이루고 판타지를 만들게 된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이 앞의 <도표 1>에 나타난 임의의 시점 Pn이다. <도표 1>은 2차원 평면상에 표시되어 있지만, 4차원 시․공간 시점 Pn을 생각할 수 있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판타지는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시․공간을 초월한 이러한 시점이 있게 된다. 이것을 임의의 시점 Pn이라고 가정해 놓고 보면, 이 시점에서 판타지가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체험한 인식의 일부분과 판타지가 결합(모자이크)되기도 할 때, ‘다층 구조의 다층의 의식’이 찍힌다. 「첫나비, 아름다운 의미의 비행」에 있는, 판타지 한 편을 예로 들어 본다.
붉은 공이 튄다. 목련 담장을 넘어서
깍 깍 깍 세 번 짖는다.
붉은 공이 튄다. 소리 계곡 넘어서
울긋 불긋 몇 점 핀다.
붉은 공이 튄다. 진달래 암벽 넘어서
日 ― 出 ― 山 ― 行
붉은 공이 튄다
― 「日出山行」전문
「日-出-山-行」이란 제목처럼 해가 떠서 산을 가는 모습이다. 그런데 현실이 아닌 심층의 산행으로 동영상처럼 경쾌하게 붉은 공이 튀어가면서 판타지를 펼친다. 시의 구성을 살펴보면, 아침 해와 이미지가 결합한 붉은 공이 네 번의 장면을 보여주며 튄다. 한 번은 목련 담장을 넘어서 또 한번은 소리 계곡을 넘어서, 또 한 번은 암벽을 넘어서, 또 계속 붉은 공이 튀어간다. 그 때마다 공의 시점에 따라 사물을 만나게 되는데, 골목에서 깍 깍 깍 짖어대는 까치를 보고 계곡에서 물소리를 듣고, 바위 양지쪽에서 몇 점 붉게 피는 꽃을 본다.
이 시에는 이렇게 시․공을 초월하고 현실세계가 아닌 심층의 산행에서 만난 사물들이 결합하고 연상 작용으로 나타난 판타지를 찍는 시점 Pn이 있다. 이러한 임의의 시점 Pn은 일상성에서 벗어난다. 즉, 일상성의 탈출로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데 ‘새로운 세계의 인식’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대상의 일상적인 시점 P1에서 P2, P3, P4, … Pn으로 시점의 이동은 탈관념의 인식을 찍는 방법이 된다.
인식의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시대의 ‘인식 문제’는 시의 새로운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염사’와 ‘접사’는 어느 시점에서 인식을 찍는, 즉 묘사하는 방법으로써, 디지털 문학의 한 갈레일 것이다. 시점이 이동하여 순간적으로 변한 <의식의 기울기>에서 단서를 얻어 시작한 다음의 탈관념론은 수정 보완을 계속하고 있다. 디지털 문학의 한 난제로서 「빈자리x」 시와 함께 말미에 또 하나 화두로 내놓는다.
간밤, 회색담장 ‘회색’을 헐고 푸른 울타리 ‘푸른’을 세웠다. 반짝이는 인동의 사금파리 ‘반짝’을 빼고 가시장미 ‘가시’를 올렸다. 갑자기 ‘푸른가시’ 짐승이 나와서 달빛을 갈갈이 찢고 온밤을 으르렁댔다. 다시 ‘푸른’을 밀고 가시장미 ‘가시’를 내리고 비워 둔 빈 자리x.. 아침, 울타리에 구름 한 쪼각 앉아서 쫑긋 꼬리를 들었다가 사라진다.
─「푸른가시 짐승 - 빈자리x, 3」
인식의 대상인 사물(사물성)을 A라 하고 시인의 변수(인식의 변수)를 x라고 하면, 시인이 구체적으로 인식한 사물은 Ax가 된다. 즉 남산x, 장미x, 빈자리x, 등이 된다. 이때 인식이 수없이 n번 거듭될 때 뇌에 각인되어 조건반사의 고정관념 y가 형성된다고 보면, y=Axn이 된다. 이것을 열린 개념으로 확장시키면 인생함수 f(x)가 된다. 그리고 이 방정식을 미분하면, y'=nAx(n-1) 도함수가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의식의 기울기’인 ‘순간변화율’이 발견되고, (n-1)번, n번 미분하게 되면 탈관념이 지향하는 관념의 영점(Zero Point)에 이르러 ‘無’가 발견된다. 즉 동양철학의 기층을 이루고 있는 사물의 본질인 ‘性’에 이르러, ‘空’, ‘虛’, ‘無極’‘으로서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시는 미분이다”라고 하고, 이에서 도함수의 수학기호( f'(x), f''(x), f'''(x), …, f(0))를 유추해낸다.
폭설
― 빈 자리 x․2
징~징~ 먼 징 소리가 온다
봉준이가 오려나, 징~징~
먼 징 소리가 온다
댓닢 솔잎 눈발이 分~分~
고부 백산白山이 하이얗다
하얀 옷에 내려 하이얗다
하이얗다 하이얗다
징~징~ 먼 징 소리가 온다
창을 여니, 문득 와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
폭설이 하-이-얗-다
포르르 참새 한 마리 낮게
솟구쳤다 포물선이 떨어진다
제부도 일박
― 빈 자리 x․5
스팟 뉴스의 화면에 해가 뜬다. 포이동 매파 노인이 판잣집 문을 민다. 떠오르는, ……늙수그레한 얼굴, 지직 갑자기 방전 현상이 일어난다. 어둡다.
바다로 향해 난 창을 연다. 거울의 투명한 바다가 보인다. 섬∙∙∙∙, 4개가 출렁이고 있다. 저 사이 해가 진다. 포이동에서 뜬 해가 제부도에서 진다.
간혹, 갈매기가 한 줄기 칼날처럼 휙― 어둠을 가르고 나서, 빛과 어둠 사이 몽롱한 바다가 깜박거리고, 출렁이는 늙수그레한 얼굴……. 아이가 운다. 고라실 해가 긴 춘궁기 까칠한 손 아버지가 내 머릴 쓰다듬는다.
철썩철썩 바다가 가까이 울고 있다. 또 누가 운다. 포이동의 아이 하나가 싱싱하게 서 있는 거울 저 편, 별이 출렁이고 있다.
※ 포이동 : 서울 강남구 포이동, 쓰레기 하치장이 있음
이상을 만나다
거울, 프리즘, 캄캄한 방에 작은 창문 하나(빛이 잘 들어온다). 어느 곳의 별에선가 오는 빛, 이상이 거울로 빛놀이를 계속하고 있다. 방문을 잠거 놓고 자와 컴퍼스 원시적인 도구들을 들고 x, y, z축 공간에 은싸라기 점을 쏟아 놓다가 유성을 긋다가, “유클리트 기하광학은 틀렸어!” 탄식하고, 빛의 우주 여행을 떠난다. 스펙트럼의 아름다운 선, 우주선을 타고 빨, 주, 노, 초, 파, 남, 보라로 무한궤도를 가다가, 그러다가 늘 거울 속에 추락한다. 그 때마다 한 일억 년 전쯤의 빛이 막 도착해서, “나보다 더 늦는 녀석도 있어” 속삭인다. 이상이 죽지 않은 시간, 거울과 스펙트럼을 가지고 앉아, 누가 빛보다 빠른 발명품으로 만나러 오길 기다린다. “빛보다 빠른 연상”이라든가……, 언뜻 어느 우주에선가, “나, 자연이고 싶어” 휴대전화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해맞이 첫 말
―사물언어를 위한 序
첫 말言들이 꽃과 섹스를 시작한다
오늘
꽃에서 해日, 해에서 바다로 이미지 미끄러지기
유쾌히 말이 미끄러진다. 저어 먼
언어들이 팔팔 뛰는
바다의 수평선에
이쁜 눈썹 같은 민족이란 언어가 기우뚱하다
(단, 민모 또는 민족시인이 내 말을 못 알아들어도 어쩔 수 없다.)
다시 창가에서 말과 꽃의
고독한 섹스
이미지 미끄러지기, 첫 언어 힘차게
꽃대를 뽑아올리고 있는 제주 한란寒蘭
뚝 뚝 피멍울이 져 버리는 한란寒蘭
순백이 일순간 흔들리면서
오르르르……. 전 신경이 떤다. 꽃아
눈썹 같은 달 하나 반짝이며 떨어진다
천 개 만 개 별들이 쏟아진다
간밤에 맺힌
이슬 방울 선한 자식들
모어의 첫 언어 아 ― 아 ―
※ 민족시인 : 고정관념의 시인을 상징.
(2005년 6월 중순)
미당이 오다
1.
관악산 기슭에서
미당의 꿩이 꾸엉 꾸엉 울었다
그 미당未堂의 운韻을 밟아
내 배고픈 ‘입술 푸른 뻐꾸기’가 울었다
꿩이랑 이사를 갔나, 홀로
서로 한동안 눈빛이 통하지 않고
저승의 소식이 캄캄하다
소위 요샛말로 내가, 기氣가
코드가 잘 맞지 않아서일까
북악北岳으로 서재를 옮겨서일까
그 영감 좀 볼일이 있는데……, 통
감감 무소식이다.
2.
― 끼륵
문득 초가을 밤기러기 중천中天에 운다
박석고개 어림 넘어
서울서울 깃 치며 소리가 넘어
설풋 잠을 깨어 앉으면
공기는 얇은 살얼음
깨어질듯 살작 물상物象들이 어린다
북악 족두리봉에 놓아 두었던 달
내 어깨 위로 내려와
떠 놓은 물 그릇이 환히 밝다
새벽, 미당이 오다, 물 속
늘 ‘거시기’하면 짓던 표정
그 영감 일렁이더니 실죽 웃고 있다
또 내가 버르장머리 없이
불쑥 달덩이 하나 앞에 놓고
“배 아들입니다” 하니
운韻을 받는다, “이화월백梨花月白했것다?”`
※ 미당 : 서정주.
※ 입술푸른뻐꾸기 : 1975년 ꡔ시문학ꡕ에 등단완료작품(서정주 추천).
밤비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 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나팔꽃 소리가 핀다
한 가닥 새순 리듬이 날아간다
아침 하늘을 향하면
허무虛無가 한껏 펼쳐지고
쏟아지는 빛살을 향해 머리를 치켜
푸른 뱀처럼 모가지를
흔들고 두리번거리다가
정확히, 타고 오를 선線을 잡는다
나풀나풀 날아가는
한 가닥의 리듬,
시계가 도는 반대 방향으로 올라가서
더 높고 더 아찔한
감당할 수 없는 자리
몸이 떠는, 나팔꽃 소리가 핀다
동영상 “풀벌레”
스스로 때가 있고 스스로
꽃들이 깨어나서
일제히 머리를 치켜들고 가느다랗게
숨을 한 번 쉬고 나서, 몸을 일으킨다.
이 때 배경은 순수의
하얀 백지이다.
새벽녘 소나무 사이에 끼인 달
열사흘쯤의 나이 환한
달빛에 이슬이 흔들리고 있다.
동영상《풀벌레》한 마리
하늘이 하늘을 먹고 상처 하나가 기어가고
빠른 초침 하나가 뛰어간다.
콩당콩당 내 심장의
꽃을 넘어 오는 소리가 있다.
※ 以天食天 ;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
서른 한 마리 나비를 풀어 놓다
나비, 봄의 환희 군무는 끝났다. 뚝 하고 절기가 꺾이면서 일시에 꽃이 진다. 나는 다시 달력 안에 서른 한 마리의 나비를 풀어 놓는다. 여름으로 가고 있는 철쭉 능선 어느 길목에서, 이제 막 윤기나는 잎들이 아이 손인 듯 반짝 반짝 흔들어 댄다. 약수터 쯤에선가, 서성이면 까악― 하고 먼저 새가 여름을 안다. 망망한 신록의 바다가 펼친다. 나풀대고 넘어가는 고독한 나비, 나비.
흰 옷깃, 얼핏 신이 떨치는 나비
나비, 한 점이 날아간다
어디선가
파르른 靑薄紙 하늘이
은은히 바람에 떨린다
소나기 씻긴 뒤라서 그런가 보다
칡넝쿨 치렁치렁 늘어뜨린
산머리 잘 빗긴 뒤라서 그런가 보다
깨끗이 파르른 하늘의 낮달
내 눈썹 위에 걸려 있게 되면
고것 참 울음덩어리가 된다
청박지 위에 떨리는 나비
고씨동굴에 가면
으응, 응 응
바람의 비음이 살아 있다
스을, 슬 슬
물의 舌音이 살아 있다
깊은 콧소리에 빨려 들어서
감미로운 굴림에 감겨 들어서
리을[ㄹ] 리을[ㄹ] 속내에서 황홀하다
「동굴」하고 내가 부르자
당장에 도웅~, 웅~웅~
구울~, 울~울~ 살아 있다
날개를 벗은 밀실이다
※ 고씨동굴 : 강원도 영월에 있는 동굴의 하나.-
『디지털의 실예』
디지털이란, 일종의 언어 기능을 하는 시스템이다.
① 정보 → ② 좌표계(Coordinate System) → ③ 디지털화(2진데이타) → ④ 송․수신 → ⑤ 정보재생(모뎀)
(1) 실선의 정보 (2) 좌표계(Coordinate System)의 점화
(3) 디지털화 (2진데이타 ― 디지털언어 송․수신)
(x1 y1, x10 y10, x11 y11, x100 y100, x110 y110, x111 y111, x1000 y1000)
(4) 정보 재생(모뎀)
※ 2D, 3D, 4D?
○ 2차원 평면(x축 y축) 구성: 2D ― 평면 그림
○ 3차원 공간(x축, y축, z축) 구성: 3D ― 투시도
○ 4차원 시공간(x축, y축, z축, 시간축): 4D ― 애니매이션
또 송신하는 방법으로써 보면 아날로그는 사물(자연)을 있는 그대로 복사하며 송신한다. 디지털은 일정한 간격으로 필요한 부분만을 데이터(디지털언어)화 시킨 후 데이터를 송신한다. 이러한 <도표 2>의 디지털의 좌표계(Coordinate System)를 살펴본다.
좌표계란 직선, 평면, 또는 공간내의 어떤 점을 x, y, z의 값으로 표시한 것이다. 각 축의 교차점은 원점이 되며, 좌표값은 원점으로부터 x, y, z값으로 표현되므로 정확한 위치 표현이 가능하다.
<도표 1>은 아날로그의 실선이다. 연속적인 선이 자연한 상태로 있다. <도표 2>는 디지털의 점선이다. 컴퓨터에서 있는 선을 확대하면 육안으로 보이지 않던 점선이 나타난다. 예시한 이 점은 직교좌표계이다. 두 개의 서로 교차하는 수직의 x축과 y축에 점의 위치가 일정한 간격으로 표시된다. 그 위치를 x1, x2, x3 …, y1, y2, y3 … 으로 자리매김하고, ‘0’과 ‘1’만으로 된 2진법의 숫자로 표시하면, 그 점의 자리를 숫자로 말할 수 있게 된다.
참고자료 <3>
참고로, 현대미술에서 디지털의 ‘멀티미디어’가 언급되기 시작한다. 「멀티미디어 인간 이상은 이렇게 말했다」(김민수 저, 생각의 나무 간, 1999) 김민수는 시각디자인의 조형적인 측면에서 이상의 시를 말하고 있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로서 멀티미디어의 디지털시대 예술의 첨단에 서 있다. 필자의 접사와 염사를 말하기 앞서 아방가르디스트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감상해 본다.
〈그림 2), 퍼포먼스〉-바이올린을 끌고가는 백남준
지금 백남준이 바이올린을 끈으로 묶어 길거리에서 끌고 간다. 그에게는 실험의식이 있다. 누가 이것을 그대로 흉내내게 되면 영락없이 정신이상자로 취급받는다. 그의 아방가르드를 이해하면 사진만을 보고 있어도, 백남준은 진지하게 보이고 나는 전율한다. 왜 그런가?, 백남준이 벌이고 있는 해프닝 속에 들어가 동참하기 때문이다.
이 연출에는 “참인가”라고 묻는 실험의식이 깔려 있다. 바이올린의 활로 연주해내는 소리가 정말 “참인가”라는 의문을 갖고, 기존의 활로 연주하는 정체된 방법을 깨뜨린다. 이것이 아방가르드인데, 새로운 연주방법으로써 활을 버리고 바이올린을 끈으로 묶고 땅 위로 질질 끌고 간다. 지금 그는 ‘바이올린이 땅 위에서 끌리며 나는 소리’로써 진지하게 연주한다. 누가, “참입니까?”
□ 체험적 자생시론
(1)
지난 20년간 <시의 수학적 존재 증명>이라는 가설을 가지고 끈질기게 탐구해 온 오진현 시인이 디지털리즘을 선언하고 본격적인 작업을 위해 이상의 작품세계를 디지털관점으로 분석한 <이상의 디지털리즘>을 출간했다.
컴퓨터에 담겨 있는 정보를 디스켓에 복사하듯 시를 신체에서 복사해 낼 수 있다는 영감을 얻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이상의 오감도를 분해하고 해부하고 조립하여 이상의 작품세계를 디지털화하는데 성공했다.
이상의 시야말로 디지털리즘의 원점이라고 단언하는 저자는 디지털시대의 시는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염사” 또는 “접사”를 통해 찍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기술하지 않고 찍는다>는 의미는 <관념의 언어로 본질을 흐리지 않고 사진을 찍듯이 물리적 인식의 “사물언어”로 진실을 보여 준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미지를 쓴다는 것은 만든다는 의미가 강할뿐만 아니라 인위적(관념적)이다. <그리는 것> 또한 인위적이어서 생각이 들어가고 의식이 들어가기 때문에 사진을 찍듯이 사물을 “염사”하거나 “접사”하여 관념적인 언어들을 관념 이전의 언어, 즉 본래의 자리로 돌려 놓는 것이다.
저자는 <마음은 본래 비어 형상이 없고, 마음으로 보고 느끼는 것들의 만상(심상)이 있게 된다. 그래서 마음이 물을 보면 물이 되고, 바람을 보면 바람이 된다. 내 손에 꽃을 들고 있을 때, 마음이 화병이면 꽃이 되고, 마음이 쓰레기통이면 쓰레기가 된다.> 고 말한다. 탈관념의 시는 이를 바탕으로 탄생된다.
이 책은 제1부 디지털리즘․1에서 탈관념과 디지털리즘의 시 쓰기를 제2부 디지털리즘․2에서는 디지털리즘과 이상의 시 세계를 제3부 탈관념에서는 직관시의 수학적 존재증명을 제4부에서는 자선시집 디지털리즘 미당이 오다 제5부에서는 자선시집 첫나비 아름다운 의미의 비행을 싣고 있다.
원로시인 문덕수 교수는 이 책은 앞머리에서 저자의 새로운 이론에 대해 격려를 보내고 있다.
(2)
남구 吳鎭賢 시인이 ‘탈관념’의 시쓰기로서 ‘접사(接寫)’와 ‘염사(念寫)’를 말한 적이 있다. 사진기술을 시쓰기에 도입한 말이다. 접사는 카메라의 렌즈 구멍을 통해서 들어오는 바깥 물체의 빛을 모은 영상을 촬영하는 기술이며, 염사는 내면 또는 심리 세계의 물체를 촬영하는 기술이라고 한다. 접사건 염사건 있는 그대로의 사물, 즉 탈관념의 물체를 촬영한다는 점에서, 오진현 씨는 자기의 탈관념 시론에 안성맞춤의 개념으로 간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그는 쉬르레알리슴에서 말한 자동기술법과의 차별도 시도했다.
근래에 와서 오진현 시인은 〈디지털 문학선언〉을 발표했다. 물론 지금은 아날로그 시대가 아니라 디지털시대다. 혼미와 정체의 한국 시단에 이러한 큰 이슈의 화두를 던졌다.(누가 이런 화두를 던졌던가. 화두를 던진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다.) 그가 말하는 디지털리즘의 문학은 탈관념 시론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그 원점을 이상(李箱)의 시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이 책자의 절반 이상이 이상의 시에 대한 오진현 나름의 탈관념적 독법으로 채워져 있다.
〈문덕수의 서문 중에서〉
□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직관의 시 쓰기
「탈관념적 독법」이란 ‘동학의 인식론적’ 새로운 시론의 패러다임으로, 기존에 있던 프로이드의 심리학적 독법이 아닌, ‘동학적 관법’이라고 오진현 시인은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순수 직관 상태인 관념의 제로포인트(zero point)를 제시한다. 「선도 없고 악도 없다. 그리고 선악을 가리지 않는다」는 무선무악(無善無惡), 불택선악(不擇善惡)이라는 일원론(一元論)의 선악관(善惡觀)을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선․악」이 사람의 인식에 의해 만들어진 「고정관념(언어)」이라고 파악하며, 갓 태어난 아기(갓난아이)에서 ‘관념의 제로포인트’를 발견하고 있다. 즉 방긋방긋 웃는 아이는 무선무악하며 불택선악한다. 이러한 아이의 선․악을 가리지 않는 제로포인트로부터 인식이 성장하여 관념이 형성된다고 한다.
오진현 시인은 지금 「고정관념의 대탈출을 모의 중이다. 그 방법의 하나가, 성장한 관념으로부터 제로포인트인 「아이」로 다시 되돌아 가는 것(피드백-feedback)이라 주장한다. 그럼으로써 순수 본질에 이른다는 논리체계를 갖추고 있는데. 그는 이것을 「탈관념」이라 정의하고, “다시개벽” 하는 동학의 패러다임이라고 밝힌다.
□ 동양의 ‘인식론’을 바탕으로 한 「李箱의 詩 다시 읽기」
저자는 <오감도>15편과 <선에 관한 각서>3편을 통찰하고 “탈관념”의 제로포인트에서 이상의 시를 분석했다. 저자는 이상의 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발표된 이상에 대한 연구논문 거의 모두를 섭렵했으나 연구논문들이 하나같이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 입장을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시말하면 이상의 시는 없고 프로이드 심리학만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다다이즘”이니 “초현실주의”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서구인이 아닌 동양인의 의식을 가진 이상을 간과함으로써 서구식 “지식놀이”의 평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에 이상은 난해한 시를 쓰는 시인으로 각인되어 왔던 것이다.
그동안 일반 독자들에게 한쪽 측면만 강조되어 왔던 이상의 시세계를 디지털리즘으로 접사함으로써 인식의 오류를 찾아내게 된 것이다.
탈관념적 독법에 의하면, 「오감도」에는 제로포인트인 ‘아해’가 있다. 그래서, 「탈관념」의 시론을 입증하는 검증으로써 안성맞춤인 이상의 시를 선택하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의 「오감도」 15편에 원초적 생명의 유니트인 ‘아해’의 관념이 단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시제1호」 성장하는 관념 ― ‘무서운 아해’
「시제2호」 성장하는 관념 ― ‘나의 아버지’
「시제3호」 성장․분화하는 관념 ― ‘싸움하는 사람’
「시제4호」 본질이 전도된 관념 ― ‘환자’
「시제5호」 사회적 관념이 성장한 ‘22세의 이상’ ― 본질이 전도된 섹스(유희)
「시제6호」 ‘앵무새 언어’ ― 「스캔들」
「시제7호」 ‘식민관념’
「시제8호」 본질의 진실찾기 ― 해부
「시제9호, 10호」 관념의 자위 ― 입과 성기
「시제11호」 관념의 대립 ― 집착과 혁신
「시제12호」 관념의 전쟁
「시제13호」 관념의 참회
「시제14호」 관념의 역사 ― 죄의 낙인
「시제15호」 전 생애의 죄가 보이는 거울
오진현은 그 동안 탈관념, 접사와 염사, 디지털리즘의 화두를 던지면서, 자기 시의 논리화를 훨씬 넘어선 새로운 아방가르드 운동을 전개해 왔다. 이러한 전위적 몸짓만으로도 의의가 있지만, 시론에 관련된 슬로건을 표방하고 논문도 발표한다면, 자기가 내세우는 화제를 밑받침할 수 있는 논리적 작업도 불가결한 부분이며, 자기에게로 되돌아 올 비난이나 반론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오진현의 「접사와 염사의 시점(視點) 문제」를 면밀하게 읽었다.
(1)
오진현은 ‘디지털리즘’(digitalism)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이 개념의 사용에 대한 자기 검증이 필요하다. 오진현은 디지털(digit), 디지털(digital)의 어원을 설명하면서, 디지털은 2진법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고, “디지털은 이런 가능성을 가진 것을 지칭한다. ‘이름’은 여기서 필자가 붙임”이라고 하여 ‘디지털리즘’이 자기의 조어임을 밝히고 있다. ‘digital’에 ‘ism’이라는 말을 붙여 ‘digitalism’이라는 새 용어가 되는지 안 되는지 여기서 단언할 수 없다. 다만 기존 사전(Kenkyusha's New English- Japanese Dictionary, 2002)에서는 digitalism을 “디지털리드 중독증”이라는 병리학의 용어로 쓰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리스’(digitalis)라는 것은 식물이름이거나 그런 식물로 만든 일종의 강심제인 디지털리 제제(製劑)를 의미한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오진현이 쓰고 있는 디지털리즘은 digitaltism = digitalism으로 만든 것이 분명한데, 디지털이 가진 성질이나 기능을 하나의 개념 내지 관념으로 체계화 할 수 있는 술어인 ‘디지털리즘’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인지, 오진현 자신이 검증해야 할 것이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영문학자나 철학자의 조언을 받는 것이 좋다.)
(2)
‘접사’와 ‘염사’는 모두 사물에 대한 탈관념의 시점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가 ‘탈관념 운운’ 하지만, 이 개념은 조향(1917~1984)의 ‘오브제론’, 김춘수(1922~2004)의 ‘대상의 붕괴’(ꡔ의미와 무의미ꡕ), 문덕수의 ‘대상에서의 해방’(「내면세계의 미한」)등의 선행 이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또 일부 중첩되어 있다. 또 탈관념은 프랑스의 철학자 정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해체론 등과도 관련된다. 오진현 씨는 이러한 여러 선행이론, 성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연속적 발전 과정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3)
오진현은 ‘염사’(念寫)에 대하여 “내면세계의 잠재 영상을 촬영하는 기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다음에 이어서, “일단 있는 그대로의 사물, 즉 관념의 제로포인트(탈관념 상태 ― 본질의 상태)인 물체를 촬영한다는 점에 주목하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바로는 “내면세계의 잠재영상” 즉 있는 그대로의 내면세계의 사물을 그대로냐 하면 “내면세계의 잠재 연상”은 단순․소박한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결친 시간과 공간의 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프로이드가 말한 무의식, 윙이 말한 집단 무의식도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데, 이것을 오진현씨는 “잠재영상”이라고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염사라는 촬영기술로 이전 무의식이나 집단 무의식까지의 촬영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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