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론] - 2021년 『상상인』 창간호
늙은 바람의 문법
심은섭
앳된 문장이 늙은 바람의 문법을 숭배하며 짧은 평서문으로 자랐다 그 문법은 통사규칙을 어기지 말 것을 수시로 타전해 왔다 주어가 생략된 의식으로 불규칙한 담장 밖 풍문과 동행하지 말 것을 주문하며 문장의 늑골을 더욱 조였다
그럴수록 문장은 영혼의 목록에서 사라진 뼈다귀를 핥으며 살았다 때론 뒷골목 불나방의 비문을 새기는 석공이기도 했다 세월의 단락이 바뀌어도 손금의 한 가운데로 정신이 컴컴한 헛간의 어휘와 총에 맞은 새의 머리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문법은 무명의 시간들을 따라 묘혈에 누웠다 슬픔의 독침이 문장의 혈관 속으로 퍼지고, 언어들은 일제히 경련을 일으켰다 신당을 잃어버린 무녀처럼 문장은 포효했다 문법이 없는 대궐보다 문법이 있는 옥탑방 아랫목이 더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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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론] - 『상상인』 창간호
시의 모반謀反에서 시의 머슴으로
시는 내 정신의 안식처이면서 구원의 양식이다. 반면에 시는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는 일을 혹독하게 채근하는 맹독성의 랍비이다. 한때는 S라인도 V라인도 없는 시를 맹목적으로 스토커(stalker)하는 자기중심적 사이코패스(Psychopathy)로 생활을 하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시와 맞서는 일은 우주와 맞장을 뜨는 일보다 힘겨웠다. 그런 일로 인하여 시로부터 이탈의 모반을 꾀하기도 했으며, 탈주의 땅굴을 파기도 했다. 이쯤 되어 시의 주변으로부터 쾌나 멀리 떨어져 있을 거라는 착각 속에서 주변을 뒤돌아보았을 때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내가 시의 중심에 들어앉아 언어를 조탁하는 석공으로 변해 있었다. 더 나아가 AI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시의 머슴으로 살고 있었다.
그 대가(代價)로 나는 시로부터 ‘시인’이라는 칭호를 하사받았고, 그런 애정으로 시의 노비문서를 태우지 못한 채 수십 년 동안 그를 군주로 모시며 살아왔다.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침묵의 시는 그리스도 폴이 업고 강을 건넌 은수자보다 더 무거웠다. 그 무거움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시를 통해 세계를 대할 때 서정적 감각보다 지성적 사유로 삶의 존재론적 의미와 가치를 철학적 측면으로 구현하는 일이었다. 또한 진술의 시적 표현보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이미지화라는 양식을 채용하여 시작(詩作)했다. 기존의 낯익고 클리셰(cliché)의 시적태도에서 벗어나려고 ‘무관계가 관계다’라는 데페이즈망기법을 숭배하는 습관을 기르기도 했다. 정진의 자세를 돋보이기 위해 한 발 더 나아가 타이포그래피를 불러들였다.
지금도 언어의 궁핍에서 벗어나는 일이 진정한 시의 머슴이라는 강령을 제정하고 스스로 실천하려고 다독(多讀)의 작두날 위에서 은방울을 흔들며 ‘접신된 광기의 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문학의 마당을 반짝반짝 빛나도록 제대로 쓸지 못하는 머슴을 이젠 시가 그를 떠나려고 한다. 이런 사태를 막아내는 일이 신축년 한 해가 될 것 같다.
-심은섭 시인
- 2021년 『상상인』 창간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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