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작시

할망의 신흥종교 - 심은섭 시인

자크라캉 2021. 1. 5. 22:58

할망의 신흥종교

 

 

심은섭

 

 

 

캐럴송이 거리를 가득 메우는 12월이다

 

요한드라샬*이 첫아이를 낳았다 황급히 울음의 질량을 동사무소에 알렸다 동사무소 직원은 원시인들이 벽화에 물고기를 그리듯이 아이의 이름을 지상에 새겨 넣었다 대뜸 조모로 신분이 상승된 할망은 그때부터

 

대대손손 4대째 이어오던 종교를 잠시 뒤로 미루고 하루 다섯 차례 며느리가 보내준 손자교의 교리 동영상을 보며 빠르게 신흥종교로 개종했다 교주의 미소를 보며 열광적으로 광신도답게 교주를 찬양했다

 

어떤 날엔 수십 차례 손자교회 교주의 동영상을 보며 스스로 복습도 하고 광신도의 의무를 지켜왔다 히죽히죽, 낄낄낄, 까꿍까꿍,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기도문을 외우며 열광의 역량을 더욱 강화해 갔다

 

요한묵시록이 꽂혀있는 성전을 삼칠일 내내 찾아가 흰 손으로 성수를 떠왔다 꽃길만 걸으라며 교주의 사주 곳곳마다 화분에 물 주듯이 성수를 촘촘히 뿌렸다 그럴 때마다 어린 교주는 한 됫박의 미소를 보내왔다

 

눈꼴사나운 행동에 며칠 동안 눈을 지그시 감고 침묵하시던 예수그리스도께서 벽에 걸린 고상에서 가만히 내려오시더니 어린 교주의 볼을 쭐쭐 빨며 손자교로 개종한 할망을 빙그레 웃으시면 안아주었다

 

 

 

*차남 세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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