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보이지 않는다 / 고형렬
어느날 풀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놀란다
풀들에게 눈이 있었다, 계속 풀을 뽑아 던지자 풀들이 눈치가 생겼다
풀들은 없어진 것이 아니고 어딘가로 숨는다, 나는 처음엔 은유를 알지 못했다
풀들은 나의 발소리를 들으면 지금도 두려움에 떤다
풀들을 찾는다, 풀들이 보이지 않는다, 풀들이 사라졌다, 풀들은 영민해지고
나의 눈은 어리석어졌다, 낮 속에서 풀들은 밝아지고 나의 눈은 어두워진다
이 둘은 끝없이 도망하고 추적한다
나는 풀들에게 모든 것을 노출한 채 잔디밭에 앉는다, 한숨 쉰다
풀들은 광선 같은, 어둠속 눈부처의 움직임에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다
그 법을 그들은 체득했다, 나는 제자리걸음이다
나는 이제부터 이 꿇음의 제자리걸음으로 버틸 작정이다
풀들은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보다 민감하게 움직인다
그러니까 풀들은 나의 눈에서 눈 깜짝할 사이 사라진다, 하지만 나는
풀들이 어딘가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 나이, 이제 풀의 소리를 듣는다
출처: 시집「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창비, 2010.
[시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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