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시인

위독(危篤) 제1호 / 이승훈

자크라캉 2010. 6. 15. 19:05

 

 

사진<생명의씨앗과균형생식환>님의 카페에서

 

(危篤) 1 / 이승훈


램프가 꺼진다. 소멸의 그 깊은 난간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장송(葬送)의 바다에는 흔들리는 달빛, 흔들리는 달빛의 망또가 펄럭이고, 나의 얼굴은 무수한 어둠의 칼에 찔리우며 사라지는 불빛 따라 달린다. 오 집념의 머리칼을 뜯고 보라. 저 침착했던 의의(意義)가 가늘게 전율하면서 신뢰(信賴)의 차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시방 당신이 펴는 식탁(食卓) 위의 흰 보자기엔 아마 파헤쳐진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쓰러질 것이다.

[감상]

김춘수의 시를 흔히 '무의미의 시'라 하고,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이승훈의 시를 '비대상(非對象)의 시'라고 부른다. 이것은 김춘수가 심상만을 제시하는 서술적 이미지에 초점을 두는 데 반해, 이승훈은 무의식적 세계의 환상을 순간순간 떠오르는 언어로써 이미지의 고리를 만들어 형상화하는 데서 이르는 말이다.
이 시는 제1호에서 제9호까지 연작시 형태로 이루어진 것 중 제1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들 각 편이 의미의 맥락을 갖는 것이 아니고, 다만 '위독'이라는 말의 심상을 공통적 모티프로 삼고 있을 뿐이다. 이 시는 내면 세계의 처절하고 참담한 감정적 분위기를 순간마다 떠오르는 언어들의 상호 충동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 시에는 몇 개의 시적 소재가 등장하고 있지만, 그 외부의 사물을 노래하고 있다기보다는 시인 자신의 직관 그 자체를 시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시적 소재들이 어떤 인과적 의미망이나 사실적 풍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유 연상에 따른 초현실주의적 수법에 의해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가 '장송의 바다'라는 시구나 '위독'이라는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 죽음에 직면한 어떤 상황을 암시하는 인상만을 전해 줄 뿐, 분명한 내용 전개를 드러내고 있지 않은 난해시로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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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시에 보이는 여러 시어들, '램프'·'난간'·'장송의 바다'·'달빛'·'망또'·'어둠의 칼'·'불빛'·'집념의 머리칼'·'차건 손'·'식탁'·'흰 보자기' 등은 어떤 의미 질서의 맥락 위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내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자의식의 어두움, 또는 깊숙이 배어 있는 절망이나 고독의 감정을 제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단편적 사물들이다. 이러한 시어들은 시인의 개인적 내면인 어두움, 고독, 절망 등에 의해 발생된 것들로 무의식적 내면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램프가 꺼진다'는 첫 구절은 밝음에서 어두움으로 변화, 즉 내면 세계의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그 어두움의 깊이는 '소멸의 깊은 난간'이라는 구절로 제시되어 있다. 바로 그 같은 내면 세계에서 도달하게 된 '장송의 바다'는 끝없는 절망을 표상하며, '파헤쳐진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쓰러질 것이다'는 마지막 구절은 '장송의 바다'의 끝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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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 시를 통해 우리가 체험해야 하는 것은 이들 언어들이 상호 충돌을 통해 이룩해 내는 내면적 분위기 속으로 들어가 그 상황 속에서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시는 현실의 실제적 상황에 부딪쳐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한 실존의 내면의 무의식적 환상을 심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시의 그 처절하고 참담한 정서적 상황은 곧 현실의 참담한 상황의 무의식적 반응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