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시인

비대상에서 禪까지

자크라캉 2008. 10. 14. 21:01

대상에서 禪까지



대담자:승훈, 이재훈(시인)



이재훈 : 선생님의 유년 시절은 ‘불안과 우울의 시간들’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내셨던 외조부와 한의학을 하셨던 조부, 그리고 의학을 하셨던 부친 밑에서 성장합니다. 외형적으로는 괜찮은 집안의 총명하고 명석한 아이였겠지만, 내면적으로는 외로움과 우울, 불안감 등에 시달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집안의 잦은 이주, 부친의 병, 모친의 자살 시도 등은 집적적인 영향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과 내면적 정황들이 자신의 내면세계를 고집스럽게 파고든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선생님의 천성적 성정性情보다는 외부 환경이 더 많은 영향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승훈:외면과 내면의 아이러니죠. 겉으론 멀쩡하고 이 시인 말처럼 그럴 듯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계속된 건 불안, 공포, 우울이었습니다. 내가 너무 내성적이고 여린 성격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불안은 내 브랜드죠. 난 초등학교 입학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설레이며 학교에 입학하던 추억이 없어요. 어느날 갑자기 낯선 아이들 속에, 그것도 시끄러운 아이들 속에 내가 앉아 있던 기억만 납니다. 무슨 카프카 소설같고 악몽같은 기억입니다. 도대체 이 낯선 곳에 내가 왜 왔는가 ? 그후 알게 된 것이지만 아버지는 나이도 차기 전에 그러니까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가을에 나를 학교에 집어 넣은 것입니다. 낯선 것에 대한 공포는 그후에도 계속됩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6. 25가 나고 난 계속 낯선 곳으로 옮겨 다니고 그후에도 잦은 이사 무엇보다 아버지 병으로 가정은 어둡고 언제 집안이 박살 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며 유년 생활을 보냈죠. 난 어린 시절 한번도 웃어본 적이 없어요. 사실 의사이신 아버지가 병으로 고생하신 것도 아이러니입니다.

 

 


이재훈 : 위의 질문처럼 생각하게 된 연유는 직접 선생님을 뵙고 든 느낌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감정도 풍부하시고 유머감각도 있으시고 웃음도 많으시고 해서 든 생각입니다.

선생님께는 두 분의 큰 스승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춘천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사였던 이희철 시인과의 만남, 한양대에서 박목월 선생과의 만남이 그것인데요. 두 분과의 만남이 선생님께 끼쳤던 영향이 어떤 부분이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승훈:불안과 우울에 지친 셈이죠. 그리고 이젠 나이가 들었잖아요 ? 최근엔 ‘왜 사냐 건 웃지요’라고 노래한 김상용 시인의 시가 좋아요. 고교 시절 이희철 선생님을 만난 건 행운이었고 대학 시절 박목월 선생님을 만난 건 운명이라는 생각입니다. 이희철 선생님은 당시 문학예술지에 신인으로 등단한 분으로 참 시가 좋았습니다. 고교 시절 난 선생님의 시를 다 외울 정도고 당시 동급생이던 소설가 전상국 형이 말하듯 선생님은 사실 나를 편애할 정도였습니다. 시의 기초가 잡힌 건 선생님의 영향과 지도 때문이고 박목월 선생님은 이미 기초가 다 된 나를 문단에 바로, 그것도 대학 2학년 봄에 내보내신 겁니다. 그러나 목월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내가 없을 정도로 선생님과의 만남은 그후 운명이 됩니다. 난 목월 선생님을 만나려고 이 땅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이재훈 : 이희철, 박목월 선생은 전통 서정계열의 작품 세계가 당신의 문학관觀이었고 그것을 작품으로 훌륭하게 구현해 낸 시인입니다. 선생님의 작품세계는 전통 서정시의 반대편에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선생님께서는 스승의 문학 세례에 큰 영향을 받는 우리 문학 전통으로 비추어 본다면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스승의 문학 경향과 반대의 지점에 가 있기 때문이지요. 이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승훈:두 선생님 모두 내가 하는 문학에 대해서는 그렇게 긍정적이지는 않으셨죠. 이희철 선생님은 ‘네가 李箱을 좋아하더니 시가 그렇게 되나 보다’라고 하신 적이 있고 목월 선생님은 ‘글쎄 아무래도 이상의 시는 장난 같제 ?’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모더니즘 계열 시인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라는 게 모처럼 등단을 시켜 놓으니까 이상, 김춘수, 김수영, 전봉건같은 시인들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니 속으로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셨을까 ? 그런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목월 선생님은 ‘너는 네 길을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대가 풍이셨죠.

이재훈 : 선생님께서는 고립감, 외로움, 허무, 불안 등의 삶이 현대인의 조건이며, 현대적인 것이라 말합니다. 이것은 세계를 불화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고, 이 불화 속에 내던져진 현대인의 의식세계가 모더니즘의 에너지겠지요. 자연인으로서 선생님의 삶 또한 이러한 불화를 스스로 수긍하고 고독한 산책자로 살아가는 듯한 인상을 많이 받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적 태도 이전에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 또한 궁금합니다.

이승훈:고독이 낭만주의의 개념이라면 불안은 현대주의, 모더니즘의 개념입니다. 홀로 있기 때문에 고독하고 누군가를 만나면 고독이 해소되죠. 그러나 불안은 다릅니다. 혼자 있어도 불안하고 누구와 함께 있어도 불안합니다. 아니 함께 있는 사람이 갑자기 무서울 때도 있습니다. 물론 정신분석에 의하면 불안은 분리 불안이고 이 불안이 자아 분열로 발전합니다. 사회학적으로는 이 시인 말처럼 자아와 세계의 불화, 단절, 소외가 동기가 될 수 있고 따라서 이런 단절 속에 던져진 현대인의 내면, 곧 불안과 공포가 모더니즘의 에너지입니다. 내가 대학 시절 좋아했던 카프카의 세계가 그렇고 이상의 시가 그렇습니다. 내 시가 그렇다면 내 인생도 그렇고 거꾸로 내 인생이 그렇다면 내 시도 그렇습니다. 시는 속일 수가 없어요. 사실 난 잿빛 인생입니다. 요즘도 불안해서 시를 쓰고 해질 무렵이면 혼자 맥주를 마시고 두통으로 고생이고 매일 두통약을 먹고 감기로 고생이고 매일 감기약을 먹고 우습죠. 고독한 산책자이기 보다는 난 사실 산책같은 건 취미가 없고 여행도 싫고 그저 잿빛으로 삽니다. 무슨 목표도 없고 프로젝트도 없이 그저 하루 하루를 산 게 여기까지 온 겁니다. 그런 점에서 난 허무주의자이고 정신적 방랑자입니다. 정신적 유목민이라고 할까? 언젠가 이재복 평론가와 대담을 할 때도 그런 말을 했지만 난 그동안 낸 책이 몇 권인지 몰라요. 그래서 조사해보니 50 권이더군요. 그런데 강동우 평론가는 자기가 알기로는 53 권이래요.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겉보기와 달리 속은 엉망이죠.

이재훈 : 선생님의 작품 세계는 자아 탐구로 시작해서 그 시적 대상이 ‘나’‘너’‘그’로 변화됨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 시집 밝은 방부터는 자아 소멸, 주체 소멸로 바뀌게 됩니다. 자아와 주체가 소멸되면 남는 게 언어이고, 이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시작詩作에 그대로 투영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언어에 대한 자율성을 누리게 하고, 스스로 생장, 형질 변화하도록 언어를 방목하는 형식이 하나의 시적 방법론으로 파악됩니다. 하지만 이런 언어를 사유하고 시적 대상으로서의 언어를 질서화시키는 건 결국 ‘주체’가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언어’와 ‘주체’와의 친화와 길항 관계들에 대해 독자들을 위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승훈: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내 시세계는 자아언어대상의 관계에서 처음부터 대상, 곧 자연이나 현실을 노래하지 않았어요. 아니 난 그런 대상의 세계엔 관심이 없고 자아에만 관심이 컸고, 따라서 자아탐구의 시를 썼습니다. 이른바 비대상 시입니다. 대상을 상실한 자아는 무의식, 어두운 충동의 세계이고 이 세계는 그후 나/ / 그라는 인칭 체계로 탐구되죠. 그러나 느닷없이 이런 자아탐구가 자아소멸로 전환됩니다. 자아탐구에서 자아가 없다는 인식에 도달하기까지 30년이 걸린 셈입니다. 아니 내가 등단한 게 1963년이고 첫 시집을 낸 게 1969년이니까 시집을 기준으로 하면 25년이 걸린 셈이고. 이 시인 말처럼 1995년에 낸 시집 밝은 방이 전환점이 됩니다. 아무튼 자아를 찾는다는 게 이상하게도 자아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겁니다.

이제 자아언어대상에서 남은 건 언어이고 자아가 없다면 언어가 시를 쓴다는 결론이 나오죠. 이 무렵 자아가 없다는 생각은 불교적 사유가 아니라 언어학, 특히 후기구조주의 언어학을 공부하면서 깨달은 거죠. 방브니스트, 데리다, 라캉, 바르트가 그렇습니다. 주체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말을 할 때 주체가 탄생하고 말, 언어가 없다면 주체가 없습니다. 그리고 말할 때 말하는 주체와 말 속의 주체가 태어나고 그런 점에서 주체는 두 주체 사이에 있고 주체는 계속 흘러가지요. ‘난 어제 술을 마셨어’ 하면 지금 말을 하는 나와 말 속의 나가 태어나고 나는 이 두 개의 나 사이에 있고 말이 계속되는 한 두 체의 관계도 계속 흘러갑니다. 그러니까 실체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주체가 있고 이런 주체는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텍스트적 주체, 해체적 주체, 차연적 주체입니다. 고정된 절대적 실체로서의 주체, 데칼트적 주체는 없고 주체는 차연이 생산하고 차이와 연기가 주체입니다. 말하자면 두 주체는 차이/ 연기의 관계이고 말하는 주체도 그렇고 말 속의 주체도 그렇습니다. 라캉 식으로 말하면 기표와 기표 사이에 존재/ 부재는 주체입니다. 따라서 나는 이 시인과 다른 생각입니다. 주체가 언어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언어가 주체를 구성/ 탈구성합니다. 요컨대 주체는 해체되는 거죠. 그러나 이렇게 자아소멸, 주체소멸을 깨닫고도 내 시가 계속 불안, 우울, 광기에 시달린 건 정효구 교수의 지적처럼 이 깨달음이 언어학을 매개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재훈 : 비대상,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 비빕밥 시론 등에서부터 최근 저서 탈근대주체이론과정으로서의 나 등의 시론은 우리 시사詩史에 남을 대표적 시론으로 평가됩니다. 이러한 시론은 선생님의 시세계와 함께 공존하고 있어서 어느 하나를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게 됩니다. 선생님의 시를 좋아하는 많은 독자들은 시가 먼저냐 시론이 먼저냐를 놓고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시론에 의해 시가 탄생됐는지 아니면 시에 의해 시론이 탄생됐는지를 묻는 독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승훈비대상은 말 그대로 대상이 없는 시를 쓰던 초기의 세계를 나대로 성찰한 것으로 그동안 오해도 많았고 말도 많았던 시론입니다. 대상이 사라지고 남은 자아는 무의식적 실체이고, 나는 이런 자아를 노래했습니다. 이상의 절벽같은 시가 그렇고 김춘수의 무의미 시론이 의미론을 강조한다면 내 시론은 심리학, 무의식, 억압된 심리적 에너지의 투사를 강조합니다. 나는 이런 세계를 실존의 투사, 외부세계의 무화無化, 언어의 도취로 요약한 바 있습니다. 김춘수의 무의미 시는 묘사적 이미지, 자유연상, 통사해체의 단계로 발전하고 나는 비대상, 자아소멸, 해체로 발전합니다.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 비빔밥 시론은 자아소멸 이후에 남은 언어에 대한 사유, 시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습니다. 전자는 시에는 본질이 없고 언어와 제도만 있다는 것, 후자는 이 언어와 제도의 해체를 다룬 것입니다. 비대상이 제 1기를 대표한다면 이 시론들은 제 2기를 대표합니다. 시와 시론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닙니다. 함께 가는 겁니다. 특히 현대시는 시론을 요구하고 시론은 시를 보는 시각, 입장, 태도입니다. 현대 회화도 현대회화에 대한 시각, 이론, 입장이 없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쓰레기가 회화가 되는 것도 이론, 입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시가 전통 서정시로 퇴행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짓이고 현대시에 대한 시각, 입장, 이론이 분명치 않다는 것이고 이런 것들이 미적 후진성과 통합니다. 도대체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나무, , 이슬, , 강입니까 ?

이재훈 : 서구 문예 이론의 한국적 수용에도 큰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현대시사상이라는 잡지를 주관하시면서 여러 가지 문예 사상과 시적 담론들을 번역하고 그것을 우리 문학에 수용하는 논문들을 생산해 내는 데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저도 습작 시절에 이 잡지를 복사, 제본하면서 공부했던 게 지금도 큰 재산으로 남습니다. 또한 지금 이러한 잡지가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서구에서 이제 우리가 수용하고 천착해야 될 사상과 이론들은 어떤 게 있을까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서구 이론을 연구하시면서 가장 큰 인상을 받았던 이론 혹은 이론가로는 누구였는지 궁금합니다.

이승훈:서구는 끝났다는 생각입니다. 그들의 끝에 동양이 있습니다. 서구 사상은 이론적이지만 동양 사상은 직관적이고 따라서 동양 사상, 특히 노장 사상, 불교 사상, 禪 사상에 대한 현대적 읽기가 요구됩니다. 그런 점에서 계간 시와 세계가 표방하는 후기현대와 선의 만남은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사실 많은 문예지, 시지들이 나오지만 뚜렷한 문학적 태도를 표방한 잡지들은 별로 없고 그 많은 시지들이 왜 나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종이 낭비지요. 그건 그렇고 예컨대 데리다의 글쓰기가 놀이, 무용성을 강조한다면 장자는 이 놀이, 무용성의 유용성을 강조하고 그런 점에서 데리다가 예술을 강조한다면 장자는 예술과 삶이 하나가 되는 경지를 지향합니다. 데리다의 해체 개념도 유마 거사가 말하는 不二 사상과 비슷하고 다릅니다. 이 차이, , 균열을 파고들 필요가 있죠. 요컨대 서양과 동양의 만남, 회통 그러니까 서양도 아니고 동양도 아닌 잡탕, 비빔밥, 혼교, 난교, 혼혈이 요구됩니다. 개인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론가는 소쉬르, 프로이트, 데리다, 라캉입니다. 소쉬르가 말하는 언어의 기호학적 특성, 프로이트의 무의식, 데리다의 해체, 라캉의 자아 개념 등은 지금도 내 사유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물론 나대로 수용한 것이죠.

이재훈 : 60년대는 선생님께서 등단하신 연대이지요. 당시 선생님께서 몸 담고 계셨던 현대시 동인은 새로운 문학적 감수성으로 이념과 경향을 떠난 순수시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30년대 모더니즘 극복과 전후모더니즘의 극복이라는 명제를 안고 있었던 당시에 현대시 동인은 가장 주목할 만한 문학 그룹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와는 다르게 현재의 현대시 동인들의 면면을 보면 모더니즘적 성격을 고수하며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은 선생님과 함께 김영태, 박의상 선생 정도에 불과합니다. 당시 현대시 동인의 영향과 그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승훈1960년대 신세대로 구성된 현대시 동인은 이 시인 말처럼 1930년대 식민지 모더니즘, 1950년대 전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이른바 산업화 초기 모더니즘을 추구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현대시는 제 3기 모더니즘에 해당하죠. 30년대가 식민지 시대의 억압된 내면(이상)을 노래한다면 50년대는 실존, 존재(김춘수)를 노래하고 60년대는 산업화 초기의 내면, 갈등을 노래합니다. 60년대를 순수/ 참여로 양분한다면 순수파에 속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순수도 참여도 아닌 제 3의 그룹, 중간파로 봅니다. 중간파는 순수 (전통서정시), 참여(현실비판시) 양쪽에서 욕을 먹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죠. 그러나 서구 모더니즘, 아방가르드는 모두 회색이고 중간파입니다. 비유해 말하면 선거를 할 때 투표 행위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회색입니다. 왜 모두 투표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투표 거부, 기권, 포기는 선거와 제도에 대한 부정이고 아방가르드 정신이 그렇습니다. 새로운 예술은 전통을 부정하고 현실도 부정합니다. 현대시 동인은 60년대의 외적 현실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내면을 노래하고 이런 내면의식이 현대성과 통합니다. 어느 세대나 그 세대의 몫이 있죠.

이재훈 : 선생님께서는 김춘수 선생의 무의미시론을 계승해서 새로운 시론으로 개척한 시인으로 평가받습니다. 그것이 비대상시론입니다. 작고하신 김준오 선생은 모더니즘시론을 조향김춘수이승훈의 계열과 김기림김수영오규원의 계열로 이원화할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시적 방법론을 떠나 선생님의 시에 드러나는 내면 ‘정감의 노출’과 ‘구체화’는 김춘수보다 김수영과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만, 김수영은 ‘광기’의 형태로 드러났다면 선생님께서는 ‘허무’의 형태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이것은 국소적인 부분이지요. 선생님께서는 김춘수 선생의 영향과 동시대 시인으로 대표적인 모더니스트인 오규원 선생과의 차이와 선생님 시와 시론의 변별성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이승훈:앞에서도 말했듯이 비대상 시론은 김춘수의 무의미 시론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시를 쓰든 그림을 그리든 누구의 영향을 받지 않고는 창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시인들은 이상하게도 나는 누구의 영향을 받았소 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를 쓰는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내 사유가 어디 있습니까 ? 내 생각이라는 게 모두 그동안 읽은 책, 들은 소리들의 쓰레기 아닙니까 ? 그런 점에서 내 사유, 독창성이라는 건 없고 내 사유는 쓰레기들의 재활용입니다. 또 선배가 있어야 후배가 있죠. 그런 말을 하는 시인들은 제대로 공부를 안 했거나 선배에 너무 인색한 사람들입니다. 결국 텍스트가 있는 게 아니라 인터텍스트가 있습니다. 모든 텍스트는 상호텍스트입니다. 문학은 인과성이 아니라 상호성이 중요합니다. 김수영 30년대 이상의 정신, 아방가르드를 계승하고 나는 이상과 김춘수 사이에 있고 그런 점에서 김수영의 광기, 실험을 옹호하는 입장입니다.

김춘수, 이승훈, 오규원이라? 크게 보면 같은 유파에 속하고 그것은 시에서 의미, 대상, 관념을 부정한다는 특성으로 요약됩니다. 김춘수의 무의미 시론은 관념의 제거를 노리는 이른바 묘사적 이미지에서 자유연상, 통사해체로 발전합니다. 오규원의 날 이미지 시론은 말 그대로 관념의 흔적이 없는 날 이미지를 추구하고 그런 점에서 김춘수의 묘사적 이미지를 발전적으로 계승합니다. 내가 주장한 비대상 시론은 김춘수의 자유연상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지만 나는 자유연상보다 액션 페인팅의 논리, 곧 억압된 무의식의 투사를 강조했습니다. 김춘수가 대상의 재구성, 대상과 이미지의 거리를 강조하고, 이때 대상의 의미, 곧 지시적 의미의 소멸을 강조한다면 오규원 역시 이런 재구성, 곧 대상의 날 이미지를 계속 추구하고 나는 이런 대상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요컨대 김춘수, 오규원은 대상을 전제로 무의미, 날 이미지를 추구하지만 난 출발부터 그런 대상이 없고 따라서 나의 내면, 무의식이 문제였습니다. 시의 경우엔 김춘수는 이상과 정지용 사이에 있고, 오규원은 이상과 김수영 혹은 김수영김춘수 사이에 있고 나는 이상과 김춘수 사이에 있습니다.

이재훈 : 모더니즘 시사를 조감해 보면 이상으로부터 시작해 조향, 김춘수에서 김영태, 이승훈, 오규원으로 이어지는 큰 흐름이 있습니다. 그 이후 선생님 세대를 영향받은 후학들의 시세계는 조금 다른 성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영향관계로 따져야하는가 의심이 들 정도이지요. 많이 거론되는 80년대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 등은 자아의 탐색이라기보다 사회성을 가진 의식적 모더니즘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들은 선생님의 작품세계와 일정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90년대 들어서 함기석, 박상순, 송찬호, 박찬일, 김언희 등이 더욱 친밀하게 영향받은 세대가 아닌가 싶은데요. 소위 모던한 시를 쓰는 후학들의 작품세계가 선생님의 영향과 연관짓는다면 어떤 계보와 분류로 특징지어야 할까요?

이승훈80년대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 외에도 최승호, 기형도 등은 60년대 식의 내면이 아닙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내면을 드려다 볼 겨를이 없었고 그런 점에서 과격한 모더니스트들입니다. 정치적 모더니즘, 시장 바닥의 모더니즘이죠. 그러나 최승호, 기형도가 온건한 모더니즘이라면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은 아방가르드입니다. 이 시인 말처럼 난 이들 보다는 90년대 모더니스트들이 친척 같아요. 이재훈, 정재학도 이 계열입니다. 이유는 80년대가 외적 현실을 대상으로 한다면 90년대 신세대는 내적 현실, 말하자면 현대인의 악몽을 노래하고 이런 악몽, 그로테스크의 세계는 초기 내 상상력과 통하고 내가 생각하는 우리시의 현대성을 이들이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우리 모더니즘의 제 5기에 해당합니다. 비슷비슷한 시들이 판을 치는 우리 시단에 이만한 개성, 이만한 재주, 이만한 전위를 만날 수 있다는 건 기쁨입니다. 이들은 대체로 30년대 정지용, 김기림의 온건한 모더니즘이 아니라 이상의 과격한 모더니즘, 곧 이상적 아방가르드를 계승하고 그런 점에서 이상의 후예입니다.

이재훈 : 저는 우리 시사의 모더니즘적 특성 중 초현실적인 시적 방법은 실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 예전에 이상 시의 계보를 작성하시면서 분류하신 게 초현실주의의 기법, 다다이즘의 기법, 미래주의의 기법, 입체주의의 기법인데요. 우리의 형식 실험은 다분히 말 그대로 실험의 차원에서 끝난 예가 많습니다. 깊게 들여다보면 형식 이외의 것들은 모두 형식의 무게에 눌려 무위의 경험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지요.

선생님의 시에는 의식이 형식에 구속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고의적으로 시를 작은 사각형 안에 문자를 가두는 형식을 보면, 형식에 대한 깊은 관심을 알 수 있습니다. 시 형식에 대한 선생님의 관심은 선생님 시를 이해할 때 중요한 부분의 하나로 생각되어지는데요.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승훈:실패도 있고 성공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서구의 시적 방법을 그대로 수용할 수 없고 어디까지나 굴절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서구 방법을 모델로, 무슨 공식처럼 적용해선 안되죠. 어떻게 20세기 초 프랑스를 모델로 지금 이 땅의 시를 평가할 수 있습니까 ? 수용은 수입이 아닙니다. 일종의 대화이고 굴절이고 변주입니다. 그건 그렇고 난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고 아니 형식이 내용이라는 입장입니다. 결국 시는 형식, 형태, 스타일이고 그런 점에서 난 형식주의자이고 스타일리스트이고 스타일리스트는 허무주의자입니다. 기댈 곳이 없어요. 현실도 대상도 의미도 본질도 없습니다. 언어가 있어서 시를 쓰고 언어는 현실이 아닙니다. 허깨비, 환상, 떠도는 기표입니다.

그러므로 시가 있는 게 아니라 시라는 형식, 형태가 있습니다. 시는 결국 낱말들을 이상하게 배열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조가 그렇고 자유시가 그렇죠. 그동안 시를 써 오면서 제일 괴로운 건 형태였습니다. 이 시인 말처럼 별 놈의 형태를 다 시도해보았죠. 그동안의 시쓰기는 형태 변화였고 그것은 연구분이 있는 시, 산문시, 연 구분이 없는 단련시, 낱말 하나가 시행이 되는 길고 가느다란 시, 산문시 변형, 사각형 형태, 직사각형 형태, 그리고 최근에는 다시 자유로운 산문시로 변합니다. 형태에 지치고 새로운 형태를 생각하고 다시 지치고 그런 식입니다. 물론 형식과 형태는 다르지만 크게 보면 같고 그러니까 그동안의 시쓰기는 형식, 형태, 언어를 파괴하고 다시 구성하고 다시 파괴하고 다시 구성하는 일. 그러니까 언어 놀이죠. 사는 게 재미 없잖아요 ?

이재훈 : 김춘수 선생의 시적 흐름이 의미에서 무의미로 다시 변증법적 통합을 거친 의미로 되돌아왔다는 것으로 거칠게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선생님께서는 ‘자아 탐구’, ‘자아 소멸’로 철저하게 자아와 싸워온 고투의 흔적으로 보여집니다. 대신 변화하는 내면의 운동성을 이성으로 파악해 보려는 의지가 시적 대상의 전이轉移를 통해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시집 인생을 기점으로 선생님의 시세계가 선적인 세계로 옮겨갔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것은 선생님의 사유 활동이 현재 선세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논리를 넘어서서, 선생님의 작품 세계의 새로운 돌파구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선적인 세계가 선생님의 시세계의 새로운 지향점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승훈:이 시인 말처럼 김춘수는 의미에서 무의미로 다시 변증법적 통일로서의 의미로 돌아왔습니다. 아니 돌아온 게 아니라 지양되고 발전되었습니다. 나는 자아탐구에서 자아소멸의 단계를 거쳐 이 시인 말처럼 시집 인생(2002)을 기점으로 禪의 세계, 선적인 세계로 전환합니다. 아니 전환보다는 발전이나 초월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아소멸, 주체소멸을 주장하면서도 내가 자아로부터 완전한 자유나 해방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언어학, 특히 후기구조주의를 매개로 했기 때문이고 그건 이론이고 따라서 이론과 실천 사이에 괴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불교, 그것도 선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나로서는 너무 늦은 법연이지요. 90년대 후반 어느 봄날 진주 장모님 49제가 하동 칠성암에서 있었고 그때 ‘금강경’을 만났고 그때 처음 내가 펼친 부분이 ‘대승정종분’이고 거기서 보살은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을 버려야 한다는 부처님 말씀이 나와요. 특히 아상을 버리라는 말씀이 충격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아탐구니 자아소멸이니 하는 게 결국은 아상에 대한 집착이니까요. 자아는 相이고 想이라는 것. 부처님의 이 말씀과 만나고 나서 한결 가벼워지고 그후 無我, 無住, 不二, 空같은 개념들이 내 사유를 지배하게 됩니다. 시집 ‘인생’은 이런 사유들을 담고 있습니다. 결국 선이 강조하는 것은 있음/ 없음을 초월하는 공이고 자유이고 해방입니다. 올해 낸 시집 ‘비누’에서는 이런 인식을 좀더 자유롭게 노래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자아탐구에서 자아소멸을 거쳐 마침내 자아불이로 발전했고 자아 있음(자아탐구) / 자아 없음(자아소멸)의 대립이 변증법적으로 종합되고 아니 선은 종합이 아니므로 있음/ 없음의 경계를 초월하는 공, 불이의 세계로 나간 셈이지요. 불이나 공은 이런 유/ 무를 초월하는 세계이므로 나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나는 너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不二 사상, 요컨대 무슨 분별, 대립이 지겹습니다. 최근에 쓰는 시들은 시와 삶의 경계를 깨는 작업이고 시와 삶 역시 불이의 관계에 있고 이젠 시를 쓰려는 생각도 버리고 시를 쓰고 아니 밥 먹는 게 시이고 아이들 가르치는 게 시이고 낮잠 자는 게 시라는 생각입니다. 삶과 시의 경계 뿐만 아니라 시와 비시의 경계도 깨야 합니다. 따라서 이젠 삶에서도 시에서도 한 결 자유롭습니다. 요컨대 시는 없고 시라는 것이 있고 이 시라는 것, 정의, 명명도 허상입니다.

결국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바르트는 선에 대해 말하면서 필름을 넣지 않고 셔터를 누르는 카메라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내용, 의미, 기의 없이 사물을 보는 행위지요. 삶에 무슨 본질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까 ? 결국 그저 있는 것, 그저 사는 것, 그저 쓰는 것이지요. 이 ‘그저’가 중요합니다. 그저 배 고프면 밥 먹고 술 생각 나면 술 마시고 잠이 오면 자는 겁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쓰고 결국 삶이 시이고 시가 삶입니다. 나는 선을 만나고 시의 새로운 돌파구가 아니라 삶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셈입니다. 그러나 나는 불자도 아니고 그저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는 글쟁이입니다.

이재훈 : 본 대담은 그간 있었던 선생님의 시적 작업을 큰 줄거리를 통해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해 보려는 시도였습니다. 많은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답변에 큰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