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동영중학교 사랑방>님의 카페에서
칸나 / 송준영
칸나가 없고
칸나가 없는 자리엔 낮은 포복을 하던 짙은 구름 한 쪽이
칸나의 불붙는 궁둥이 자국이 난 바위에 걸터앉아
칸나의 작년을 생각하고
칸나는 흔적이 없고
칸나가 피던 작년은 흔적 없고
칸나의 생각만 피어 있고
칸나가 핀 자리는 없고
칸나만 피고
칸나가 처음 꽃이 핀 날은 신문이 오지 않았고
칸나가 핀 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음 날 소나기가 왔고*
칸나란 제목 아래 까만 겉눈썹도 젖은 눈시울도 이젠 없고
또 너무 많은 하늘이 남의 집 울타리에 하릴없이 다리 하나를 걸치고**
칸나가 아스팔트에도 피고 기침을 하며 서해로 가면
칸나도 나와 함께 피를 토하며 서해로 달려가고
칸나 앞에서 한 일도 없는 나는
칸나 속에서
칸나와 함께
칸나에 대한 시나 쓰고***
시나 쓰고 시나 쓰는
가을은 기침만 하는 나의
가을은 머리카락만 날리고 덩달아 부는 바람에 속눈썹만 날리고
아내도 없는 빈 방 칸나는
팔방 무늬 천장에 펄럭이고
국화꽃 무늬 벽에도 펄럭이고
*
-------------------------------------------------------------
패스티수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패스티쉬(pastiche)는 포스트모던한 사회를 반영하는 예술행위 양식의 한 특징인 <혼성모방>을 지칭한다. 풍자적 모방에 해당하는 패러디에 비해 패스티쉬는 비판의식이 상실된 혼성모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앞선 텍스트들을 뒤섞어 무엇인가를 창출해 내는 데 있어서 그것을 만든 의도성이 드러나지 않는, 그래서 다름보다는 닮음, 입체보다는 평면적인 결과로 나타나므로 모방의 격이나 차원에서 일정하게 구별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비판적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패스티쉬는 패러디와 달리 풍자적 의도가 없는 모방이고 죽은 언어고, 새롭다고 하더라도 과거에 이미 있던 것의 조합에 지나지 않으며 규범적인 언어나 텍스트의 특성이나 캐논의 개념이 없어지고 표면의 다양성만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에서는 91년도 작가세계신인상 수상작인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의 작가 이인화씨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패스티쉬 기법을 사용했음을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어 창작의 한 기법으로서의 패스티쉬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기도 했었다. 그러나 우리 문학예술작품에서 패스티쉬적인 징후들을 지적해 내고 그 의미나 가치를 우리의 사회문화현상 전반으로부터 추출하기에는 아직 그 논의의 장이 협소한 수준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참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절명시 / 안중근 의사 (0) | 2010.01.30 |
---|---|
오리무중 / 고형렬 (0) | 2010.01.29 |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이면우 (0) | 2010.01.18 |
구화(口話) / 이성복 (0) | 2009.11.23 |
어두운 일산 / 김정환 (0) | 2009.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