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2009년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는 문학도들의 큰 축제의 장이었다. 특히, 엄청난 시들이 산더미 같이 몰려와 저마다 다른 색깔로 글자 맞추기를 하고 있었다. 그 많은 작품들 중에서 여러 편을 골랐다. 그런데 다 좋은 작품들이었다. 좋은 작품들을 더 이상 내려놓을 수가 없어서 모두 당선작으로 힘 있게 한국문단에 내밀었다. 나는 그 좋은 작품들을 다 버리고 꼭 한 작품만 선택해야 할 시적 자유가 없다. 혹자가 꼭 한 작품만 뽑아야 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시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다. (이 글은 다른 모든 시들에 대한 전체적인 심사평이다. 그리고 각 작품마다 작품 평론을 싣는다.)
문근영의 시 [말빨]에 대한 문학평론 / 박인과 문학평론가 긴장된 자음과 모음의 어둠을 조여 빛나는 햇덩이 하나 풀어내는 맞춤법
신춘문예 시즌이면 많은 사람들이 더욱 글자 맞추기를 한다. 어떤 문장에 어떤 단어를 사용해야 알맞을 것인지, 어떤 낱말을 사용하거나 어떤 시어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시어의 조탁에 의한 시퍼런 풀물 같은 창작을 한다.
필자가 항상 힘주어 말하듯이, 시는 상식의 눈이 아닌 시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시의 본질로 듣고 보고 느껴야 한다. 시인은 상식의 펜이 아닌 시의 펜으로 창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 알맞다는 것은 ‘알’을 맞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우주의 ‘알’(해, 日) 하나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우리는 해맞이를 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말빨’은 시인이 조어한 말로 표준어인 ‘말발’의 센 말로 이 시에서는 사용되고 있다. 역시 이 시에서 나오는 ‘빛빨’도 빛발에 힘을 가세할 의도로 ‘빛빨’로 조어되어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글을 짜맞추는 것은 시인의 표현에 대한 자유의 행위이다.
문근영은 21세기의 현대인의 삶에 대한 우울증적이고 불확실성의 사랑을 진실과 포용의 맞춤법에 의한 결실로 하나의 철자로 완성되는 우주의 에너지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은 “아무도 소리 내어 쓰지 못하는 / 우주의 철자 하나로 / 또 천지가 술렁거린다”의 문장으로 글자 맞추기가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문맥상 우주의 철자 하나는 바로 ‘해’(태양, 日)이다. 해 하나가 떠오르는 것에 대하여 우주의 철자 하나가 떠오른다고 하는 것이고, 그 해는 우주의 시간의 맞춤법에 정확하게 수평선에서 일출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철자 하나의 표상이 문근영이 그리고자 하는, 인류의 고독과 아픔의 내부에서 들끓는 희망과 그리움의 덩어리이다. 또한 문장이나 창작품은 개인의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므로 창작한 작가 외에는 흉내 낼 수 없는 ‘아무도 소리내어 쓰지 못하는’ 특별한 언어가 되는 것이다. 이 특별한 언어가 시이고 맞춤법에 의해 탄생된 고유한 창작품인 것이다.
문근영 시인이 창작한 시의 제목만 우선 접해볼 때, 제목이 ‘말빨’인 것을 보면 이 시는 말의 힘을 표출시키고자 하는, 혹은 창작된 문장의 힘을 돌출시키고자 하는 내밀하게 압박된 뭔가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즉 문자 혹은 시어에 대해, 또 더 나아가서 시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자신의 존재와 자아의 고통과 희망에 대한 응축된 에너지를 투영시키고자, 깊고 깊은 내면에 침잠되어 있는 언어들을 띄워 올리고자, ‘말빨’이라는 제목을 달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증명이나 하듯 <1.풍선>에서는 ‘아픔의 편지’인 풍선을 띄워 올린다. 자신의 내부에 터질듯이 존재하는 아픔들을 외부의 사물에 노출시킴으로서 철자법이 틀린 맞춤법의 아픔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 맞춤법은 사랑이라는 등식으로 성립시켜도 무리가 없다. 맞춤법=사랑, 어차피 맞춤법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사랑에 대한 맞춤법일 수밖에 없으니까. 또한 인간과의 사랑도 맞춤법의 코드가 비틀어지면 온전한 ‘맞춤법=사랑’이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니까.
이러한, 잘 맞추어지는 시어의 코드를 찾아 헤매는 존재가 시인이다. 시인은 자신의 부재된 자아에 대한 본질적 진실을 구현하기 위해서 자신의 평화와 사랑과 떠나간 존재들에 대한 용서를 담을 수 있는 포용력 있는 문장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하여 ‘슬픔의 편지’를 쓰면서 “일상에 닫힌 우울증의 계곡을 벗어나” 그리움의 외출을 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역동적인 글자 맞추기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문근영이 출발한 그리움의 여행은 <1. 풍선>에서 “실타래를 풀며 풀잎 그리움은 외출중”, “미처 선언되지 않은 연서 하나가 / 밤이슬 젖은 하늘을 이슥히 끌어내리며 / 명주실 끝의 팽팽한 그리움을 저토록 흔들고 있다”로 구체화되어 나타나게 된다.
그 문장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지는 형이상학적 글자 맞추기를 하면서 생명으로 이를 수 있는 혹은 본질의 충만에 이를 수 있는 글자 하나를 만들기 위해 시간(무한한)을 엮어 창작하게 되는 것으로서 이는 신춘문예 시즌에 많은 문학도들이 수많은 소리들을 내는 문장들과 필사적인 투쟁을 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글자들을 다스리게 되면 아니, 그 글자들이 시인의 상상력과 진실의 가치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되면, 신춘문예를 압도할 수 있는 작품 하나가 탄생되는 것이다. 문근영의 창작법은 이러한 순기능적이고 긍정적인 맞춤법에 맞닿아 있다.
시인의 의도를 탐색해 보면 말빨은 떠오르는 해이다. 무한한 시간의 덩어리의 표상이다. 무한한 시간의 실타래이다. 이 시간의 실타래가 풀려서 없어지는 만큼 다른 곳에서 실타래가 완성되고 있을 것이다. 그 해는 우주의 언어이고 우주의 맞춤법에 의해 창조된 ‘철자 하나’이다. 우주의 모음과 자음이 잘 조화된 ‘철자 하나’라는 것이다.
그 우주의 철자 하나를 내뱉기 위해서 발성연습을 하는 어둠과 고통으로 얼룩진 그리움의 바다는 “밤새 입을 옴싹거린다”라고 표현하고 결국 “턱 긴 해안선이” “불덩이 같은 언어를 뱉어 놓는다”고 시적 진술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음에서 문근영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우주가 철자 하나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문근영의 시는 산고의 시간을 푸르고 아프게 엮어내고 있는 것이다.
긴 긴 우울증의 밤을 유영하는 달이 지고 해가 뜨려면 그만큼 고통의 밤의 숙련을 필요로 한다. 성경적으로 묵상해 보면 고통은 더 큰 생명의 빛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달(月)이 해(日)가 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달의 기둥 즉, ‘月’이란 글자를 받치고 있는 두 기둥인 ‘||’가 깎이고 깎이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 어둠과 고통에 닳고 갈려서 조약돌처럼 빤질빤질한 日가 하나 떠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의 맞춤법이다. 제 살 저며지는 고통 없는 출산이 어디 있으랴.
문근영의 말빨의 흐름을 보면 제공되는 도표에서 보여지듯이 <제목 : 말빨(태양, 日) → 슬픔의 편지=연서(달빛 시위, 月) → 엇나간 말 → 허무의 말빨 → 길 잃은 언어들 → 물결의 모음과 자음들 → 숙명의 말들 → 하얀 말빨 → 불덩이 같은 언어 → 할 말 → 빛빨(日) → 맞춤법 = 우주의 철자 하나(떠오르는 해, 日)>와 같다.
위의 도표에서 월月과 일日의 시간의 맞춤법은 계속 반복하여 돌고 도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시간의 법칙에 순응하는 존재의 법칙이다. 여기서 “슬픔의 편지”는 철자법이 틀린 사랑이고, “우주의 철자 하나(日)”는 맞춤법이 완성된 사랑이다. 맞춤법이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은 시가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이며 그 완성된 시가 인류와 우주에 대한 사랑이다. 그래서 문근영은 시를 완성함으로써 사랑을 완성하는 것인데 사랑은 이렇게 자신 안에서 항상 하나의 우주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터득한다. 그러면서 그것이 우주의 현상의 거울로 타인에게, 혹은 주변의 사물에게 투영되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시로 투영된 풀잎 그리움의 우울증(月)은 일출(日出)이다. 밝은 햇발처럼 강인한 생명력이다.
그래서 불확실한 진실의 어둠 속에서 희망의 우울증을 앓고 있는 자아의 부재중에 실종된 사랑은 결국 자신의 내부에 실존하며 항상 신이 비춰주는 우주의 거울, 그 아침 하늘에 그 실체를 눈부시게 나타내고 있음을 표현하는 시가 ‘말빨’이다. 사랑의 신(God)의 소유물인 사랑은 결국 시인 자신에게서 나와서 자신 안에 있는 것이지 사랑이 다른 곳에서 노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사랑이 노숙을 한다면 문근영이 그리는 사랑의 본체인 태양은, 아침에 어둠의 저편에서 슬그머니 나타나는 그 태양은, 노숙자가 될 수밖에 없다. 사랑은 결코 노숙자가 될 수 없다.
창작품에서 드러나는 '말빨'의 법칙을 몇 가지 간추려 보았다.
1. “슬픔의 편지”는 철자법(=사랑법)이 틀린 사랑이다. 2. <연서>는 마침내 우주 저 편에서 <우주의 철자 하나(日)>로 떠오른다. 3. <엇나간 말들=슬픔의 편지>가 <우주의 철자 하나(日)>로 압축된다. 4. <길 잃은 언어들>이 새 아침에 <우주의 철자 하나(日)>로 응축된다. 5. 수많은 <물결의 모음과 자음들>이 <우주의 철자 하나(日)>로 맞춰진다. 6. <숙명의 말들>이 <우주의 철자 하나(日)>로 형상화 된다. 7. <하얀 말빨>들이 <우주의 철자 하나(日)>=<빛빨>로 완성된다. 8. <불덩어리 언어>가 <우주의 철자 하나(日)>임을 알 수 있다. 9. <할 말>들이 <우주의 철자 하나(日)>로 창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0. <빛빨>=<우주의 철자 하나(日)>이다. 11. 맞춤법=<우주의 철자 하나(日)>이다. 12. <우주의 철자 하나(日)>는 <말빨>임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경로로 “밤새 입을 옴싹거리며” 말 배우기를 하던 바다가 드디어 불덩이 같은 언어(言語)인 해(태양, 日)를 수평선에 뱉어내기 시작한다는 것이 이 시의 핵심이다.
그래서 문근영이 <풍선>으로 띄우고 있는 “슬픔의 편지”는 “그리움”으로 틈이 난 “사랑의 간극”을 지나 “허무의 말빨들”을 세우고 “슬픔의 틈에 마침표”를 찍으며 “길 잃은 언어들”의 “모음과 자음들”을 그 “뼈대만 남은 말들”을 다듬으며 “밤새 입을 옴싹거리며” 말 배우기를 마치며 “할 말처럼 잔뜩 우려진” “빛빨”, 그 무수한 언어의 빛빨들을 세우며 “사전처럼 맞춤법이 틀림없이” 일출을 그려내는 것이다. 이 떠오르는 시간의 실타래(해, 日)가 풍선에 달린 명주실타래를, 그 풀잎 그리움의 실타래를 슬픔의 허공에 띄워 풀어내며 문근영이 만들고자 했던 것으로서 형이상학적 그리움과 생명과 사랑과 평화의 관념들을 형이하학적 철자 하나로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이 철자 하나가 문근영이 찍은 마침표이다. <2. 틈>의 마지막 연의 시어 “슬픈 틈에 마침표를 찍으며”에서 보여지듯이 수평선을 사이에 둔, 바다와 하늘의 경계지점인 그 슬픈 틈에 존재하는 수평선에 어두움에 종말을 고하는 마침표를 찍었다는 것이다. 이 마침표가 빛을 발하며 밝음으로 시작하는 해로 튀어 오르게 되는 것이다.
문근영이 그의 시에서 고백하는 ‘마침표 하나 찍는 행위’, 그것은 그렇게 푸른 물결의 모음과 자음들이 아우성치는 바다 깊은 곳에서 신음하던 ‘하얀 말빨’의 마침표를 탈출시키는 행위이다. 인류의 시대적 우울증의 심연에서 마침표=점(•)=해(日) 하나 “풀잎 그리움의 외출”로 탈출시키는 행위이다. 저 기억의 수평선에 시인에 의해 점 하나 찍힌 것이다. 그러면서 스프링처럼 튀어오르는 그 점이 바로 태양(日)이 되는 것이다. 마침표가 태양으로 환골탈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2008년을 마침표로 찍고 2009년의 새 해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 해는 온 누리에 밝고 맑고 눈부신 무수한 희망과 생명의 빛빨들을 내쏟아 비추며 일순간에 만물의 심장에서 어둠을 몰아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숨죽이고 있던 만물들이 마침내 술렁거리며 저마다의 말짓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말빨, 혹은 시의 위대한 생명력이다.
이로서 시간의 태양이 지면 찾아드는 어둠의 세상에서 다른 시간의 태양이 새롭게 떠오른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하나의 실타래가 풀어지기 시작하면 다른 곳에서 또 다른 하나의 실타래(태양)가 완성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므로 시간이란 무한성에 근거한 인류의 초감각적 에너지라는 것으로 이 시에 의해 판명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란 존재의 에너지이다. ‘나’라는 존재에서 시간이 종말을 고하면 ‘나’라는 존재도 어김없이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시간의 맞춤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직 유일한 신(God)이 만들어 놓은 법칙이다. 이 법칙을 깬 자가, 시간이 존재하는 세상에는 아직 없다.
문근영의 시 ‘말빨’은 이렇게 증명된 바와 같이 어둠의 땅에서 일출의 세상을 여는 것인데, 어둠의 땅에서는 달(月)이 그리움의 빈대떡으로 나타나고, 일출의 아침에는 해(日)가 기쁨과 환희의 호떡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시간으로 굶주린 세상에 밝음의 ‘빛빨’(=日)들을, 그 시간들을 내려 쏟는 것이다. 그런데 작자의 사랑이 본래 자신 안에 있을 뿐이지 다른 데로 빠져나가 노숙하지 않듯이 태양의 빛빨과 달의 빛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달의 빛빨=말빨은 태양의 빛빨=말빨의 반영(反映)인 것이다. 그러므로 문근영의 그리움은, 혹은 사랑은 외출하는 것이 아니고 본래 자신 안에 존재하면서 외부의 사물에 그 그리움의 빛빨을 투영시키는 것이다.
결국, 문근영은 “풀잎 그리움의 외출”=“풍선의 외출”에 달린 “명주실”의 낚싯줄로 환희와 설레임의 해를, 그 2009년을 눈부시게 낚아 올리게 된 것이다. ‘슬픔의 편지’로 띄워 보낸 <풍선>의 이미지가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풍선(태양, 日)으로 환골탈태되어 나타난다는 것, 이 시작법은 대단한 의도 아래 철저히 계획된 범우주적 창작기법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문근영은 신의 언어인 자연을 표현할 줄 아는 ‘말빨’을 소유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말(言), 혹은 글을 떠오르는 하나의 ‘태양’(日)으로 승화시킨, 어둠의 저 편으로 떠나간 풍선 하나가 다시 수평선에서 태양이 되어 떠오르게 한, 문근영의 창작은 “온 천지가 설레이는” 우주의 화음을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 시의 태양의 외출은 문근영에게 거대한 희망이다. 이 태양이 스러지지 않고 아침마다 떠오르는 한, 문근영이 그리고 있는 21세기의 그 시대적 우울은 “계곡의 문을 열고” 이미 떠나버린 것이다. 아픈 물결의 자음과 모음들의 고통 속을 인내로 긴 긴 밤 내내 잠수하며 견디다 수평선으로 삐져나와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는 그 태양은 시의 위대한 탄생이다.
신이 주신 가나안 땅에서 세기의 우울증은 떠날지어다. 혹여 남은 우울증은 티끌 하나라도 인류의 심장에서 작가의 시간 속에서 영원히 떠나갈 것을 명한다. <박인과 문학평론가>
[심사위원] / 2009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
고용길(신춘문예 등단 시인), 이상미(신춘문예 등단 시인), 김기수(신인문학상 등단 시인), 최성훈(신춘문예 등단 시인), 홍지희(신춘문예 등단 작가), 정선교(신춘문예 등단 소설가), 박인과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