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다음영화>에서
[2009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고물차 팔던 날 / 최윤희
몇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가망 없다고
누군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나는 차가운 종이에 종말을 서명했다
강철 심장으로도 못 견디는 게 있었구나
세월. 그 허름한 옷을 입으면
우리네 사막에는 모래바람 부는가
낯선 이에게 너를 두고 오는 버스 칸
끝내 아내 얼굴에 두 줄기 햇살 빛난다
툭 툭 어깨를 쳐봤으나
그럴수록 우물 속 깊은 두레박 소리가 난다
한 때 새파란 어깨를 걸고 쏘다니던
늠름한 은빛 기억 때문일까
이제 우리도 낡아 간다는 사실 때문인가
결코 헐값에 합의 한 건
손때 묻은 기억까지 처분한 게 아닌데
그녀는 고물만 보면
입에서 허기진 바람소리를 낸다
창밖으로 쫓아가는 가련한 시선
구식으로 물 긷는 미련한 낭만주의자
그 옆자리가 따뜻하다
[프로필] ㅇ'67. 3. 부산시 출생 ㅇ'89. 2. 동아대학교 졸업 ㅇ'89. 3. 농촌진흥청 경남농촌진흥원 근무 ㅇ'96. 7. 농림수산식품부 국립식물검역원 근무 ㅇ'08.11. 제20회 부산가톨릭문예공모전 가작 수상
[당선소감]
내 청춘은 아스팔트 위에 피었다. 시리도록 타오르는 푸른 불꽃처럼 피었다. 더운 가슴과 뜨거운 눈물이 마르던 어느 날 생각했다. 이대로 죽고 싶다고. 붉은 동백꽃처럼 소리 없이 뚝뚝 떨어지며 죽고 싶었다. 유언도 인사도 없이 죽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유언 같은 시를 쓰고 싶었다. 남자의 시를 쓰고 싶었다. 수없이 많은 실패는 단 한 번의 좌절도 아니었다. 뼈아픔도 피눈물도 아니다. 나는 오늘 다시 태어난다. 나에게는 나를 직접 가르치고 다듬은 선생님은 없었지만 여기저기 젖동냥을 하듯 사숙(私淑)하면서 푸른 새벽을 기다렸다. 바로 오늘이다. 오늘이 끝이 아니라 비로소 내게 주어진, 내가 선택한 나의 첫날이다. 늦었지만 이제부터 전속력으로 달린다. 진군이다. 그리고 나에게 새날을 주신 박인과 선생님과 고용길 시인, 이상미 시인, 김기수 시인, 최성훈 시인님께 성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 끝에 남을 단 한편의 글을 소원하며 이제 새 길을 떠납니다.
[심사평]
‘종말을 서명’해 놓고 구원의 <깊은 우물>을 형상화 시키는 역설적 창작기법
시는 상식의 눈이 아닌 시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시의 본질로 듣고 보고 느껴야 한다. 시인은 상식의 펜이 아닌 시의 펜으로 창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윤희가 그의 시 ‘고물차 팔던 날’에 그려 놓은 시의 창은 <깊은 우물>=<삶>에 대한 따뜻한 그리움과 현실의 고통으로 믹서된 고삐 풀린 애정의 따뜻한 서정이다.
우리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은 나의 자아의 부재중에 나의 허락도 없이 찾아와 나와 함께 늙어가는 삶이라는 괴물에 대해서다. 시인은 그 괴로움의 깊은 우물 속에서 본래의 사랑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기억과 자꾸만 잡을 수 없는 진실로 점철된 현실의 관계성에서 삶의 진정한 이유를 찾고자 한다. 기억과 현실을 시의 수평선에 걸어놓고, 기억의 차가움과 현실의 따뜻함이라는 시의 두 기둥을 세워 놓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 시는 차가운 종말 같은 현실의 편린들을 모아 따뜻한 사랑으로 기워가고자 한다. 그러니까 앞부분에서는 “나는 차가운 종이에 종말을 서명”하였지만, 마지막 부분에서는 “낭만주의자 / 그 옆자리가 따뜻하다”고 삶에 대한 애정의 말뚝을 시의 자궁에 쾅쾅 박아 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의 위에서는 차가운 종말이 존재하고 시의 하체에서는 눈물이 쏟아지는 사랑의 따뜻함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이 시가 시어의 흰피톨 붉은피톨들이 잘 순행하도록 이루어진 건강한 시라는 것을 증명한다. 인체도 아래는 따뜻하고 머리는 차가워야 피가 잘 돌아 건강하다는 진단을 받을 수 있듯, 이 시가 살아있는 생명체로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듯, 유기체의 구조를 잘 갖추었다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그리고 ‘강철 심장’, 강철 같은 시의 대범하고 당당한 심장으로 이 시는 호흡한다. 최윤희의 시의 우물을 비추고 있는 이 시의 하늘에는 ‘늠름한 은빛 기억’들이 날아다닌다. ‘손때 묻은 기억까지’ 날아다닌다. ‘낯선 이에게 너를 두고 온’ 기억으로, 혹은 낯선 무덤을 만들어 그대를 두고 오는 아픔의 시점에서 사랑이 완성되도록 창작한다.
최윤희, 그에게는 시의 언어로 삶의 깊은 곳에 있는 꼭 만나야할 그리움이 있다. 삶의 이면에 있는 고독의 뿌리까지도 탐색하여 만나고자 한다.
최윤희의 시에서 발견되는 것은 고독을 물리칠 수 있는 깊은 사랑은 오히려 그 사랑의 부재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최윤희는 그 진실의 튼튼한 잎과 열매로 따뜻한 사랑을 말하고자 시의 펜에게 표현의 자유를 허락한다.
고물차, 최윤희의 펜은 표현의 자유를 허락받아 고물차가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수술을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고물차에게 인간과 동일한 자격을 부여해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행위 속에서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고물차의 종말이 아닌 자신과 이웃의 현실에 대한, 특히 힘들게 낡아져 스러지는 것들에 대한 생명의 회상이며 피 끓는 애상처럼 간절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다.
고물차는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우리’(아내와 나)의 모습으로 오버랩되면서 이 시의 빛깔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가 바라보는 현실의 삶은 우물이고, 그것도 깊은 우물이며 두레박소리가 들려오는 고독한 우물이다. 두레박소리는 그의 삶이 고독한 우물로 변해 있다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소리가 나려면 그 우물의 물이 말라야 한다. 우물에 물이 가득차 있으면 두레박소리보다는 두레박에 가득 담겨 퍼올려지는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야 한다. 깊은 우물의 두레박소리는 그만큼 현실의 삶이 물기가 모두 빠져나간 육신처럼 메마르고 늙어 있음을 고백하기 위한 시어로 사용되었다.
그 깊은 우물은 이 20행 되는 시의 정 중앙의 행간에 위치해 있다. 우리네 삶의 중앙에 있는 깊은 근심, 혹은 사랑의 근원이 이 시의 깊은 우물로서 형상화 되고 있기 때문에 이 우물 속 깊은 곳에서는 ‘두레박소리’가 들리고 있다. 그리고 주위에 여러 개의 우물들을 더 만들어 놓았다. 아내의 얼굴에 두 개의 우물을, 그리고 삶(그녀로 형상화되고 있는)의 입에서 ‘허기진 바람소리를 내는’ 우물을 만들어 놓았다. 여러분의 삶에서도 최윤희가 그리고 있는 깊은 우물 속의 두레박 소리가 들리는가. 시의 귀로 들어야 한다.
성경을 들여다보면 야곱의 우물에서 예수께서 쉬시면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솟아올라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요4:14)
최윤희의 시어 “우물 속 깊은 두레박 소리가 난다”는 것은 목마르지 않을 그리움이 그만큼 깊다는 것이다. 아내의 어깨를 치는데 아내에게서 “우물 속 깊은 두레박 소리가 난다”고 표현한 것을 이 성경구절이 이해될 수 있게 해준다. 최윤희는 궁극적으로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구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인데 아내에게 우물이 있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바로 “물은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솟아올라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라는 성경 구절이 사람 안에 있는 깊은 우물의 존재를 암시함에서 증명된다. 물이 빠져나가 메마른 육신은 목마르지 않는 구원과 생명의 샘물을 공급받아야 하는 것이다.
차가운 종이(paper), 최윤희가 보는 현실은 차가운 종이(paper)다. 그 차가운 종이는 강철 심장을 지닌 거대한 고물차를 폐차장으로 끌고 감을 허락한다. 또한 그 차가운 종이인 현실의 끝은 ‘우리’도 무덤으로 들어감을 허락한다.
아내는 삶의 무덤의 기억으로 얼굴에 ‘두 줄기 햇살’을 키운다고 한다. 여기 나오는 이 ‘햇살’, ‘두 줄기 햇살’은 ‘두 줄기 눈물’의 속성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눈물을 ‘햇살’로 표현하는 이유는 그 눈물이 정화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인 것이다. 감정과 감각은 물론 주위의 사물까지도 정화하는 능력을 가진 것이 시인이 만들어 내는 눈물이다. 그래서 눈물을 깔끔한 ‘햇살’로 바꾸어 이 시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데, 김형출이 그의 시 ‘접시’에서 접시의 어둠을 정화시켜 비워놓기 위해 ‘눈물’이란 시어를 활용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언젠가는 고물차처럼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종말은 깊은 우물을 향한 종말이어야 한다. 최윤희가 그의 시 속에서 고물차의 영상을 띄워놓고 [야곱의 우물] 같은 우물을 여러 곳에 만들어 놓고 있는 이유는 이 시가 깊은 우물을 향한 그리움을 말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최윤희는 이렇게, 고물차라는 현실의 이미지에 구원의 창을 달아놓고 있는데, 깊은 우물이라는 창에 비치는 진리의 높은 하늘의 가치는 엄청난 희망이 되는 것이다. <고물차에 종말을 서명>→<창밖으로 쫓아가는 가련한 시선>→<옆자리의 따뜻함> 등은 단순한 서사가 아니다.
시인이 ‘종말을 서명’하는 것, 종말을 인정하며 차가운 종이에 서명하는 것은 또 다른 시작을 투영시켜야 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신께서 허락하신 시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최윤희는 시의 강철 같은 심장으로 죽음의 이미지에서 생명의 창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시의 펜에 표현의 자유를 허락한 순간 그의 시는 희망의 시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렇게, 최윤희의 시는 현실의 종말을 인정하여 서명해 놓고 생명의 구원을 끌어들이는 시적 자유의 행위를 만끽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미련한 낭만주의자 / 그 옆자리가 따뜻하다”라고 시의 결말을 다듬으며 생명과 사랑의 팻말을 이 시의 하부, 깊은 뿌리에 인치고 있음에서 표출된다.
최윤희가 시로 던지는 생명의 그물에 많은 물고기들이 그물 터지도록 걸려 옴을 희망한다.
<박인과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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