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당선작

[2009년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숲의 농담/이영휴

자크라캉 2009. 2. 3.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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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Divani Chaiman Club>님의 블로그에서

 

[2009년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의 농담 / 이영휴

-대관령 옛길에서

 

1
지난 것들은 따스함으로 채색되고
어린 시절은 평등했으나
색이란 퇴색하여
어느덧 무채색 겨울보다 멀리서 평등하다


2
바람이 지나가자
황홀한 몰락이 우수수
몇 만 년 쌓인 걸까
잎사귀 수북한 대지의 얼굴
대지에 누워 바라보는 얼굴
시간의 반은 붉고 반은 푸르게
단풍 든 지층이 드러나는
홍록의 두 얼굴


3
꽃도 열매도 아닌
천 년 전 가을빛 바람이 내 우듬지를 흔들지 않았다면
나는 두 잎사귀에 대해서 알지 못했을 것이다
타오른 숲의 가을 향만큼 아린 것이 있을까
바람은 눈썹 밑에 시간의 잔물결을 남긴다
산 그리며 흔들리는 낮짝을 부려놓으며
우리가 언제 힘겨루기 한 적 있냐고
바람의 무게로 웃는 이유는 묻지 말자
우듬지까지 타오르던 자의 몰락이나
만취한 무너짐에 대해서


4
잘 나가던 직장에서 잘리고
목이 잘리는 꿈에서 깨던 날
아내 몰래 묻었던 펀드가 죽 쒀
스스로 불안이 층층이 사는 집이라던
마이너스 가장의 순한 이웃과 내 어깨 위로
최소한 수천 목숨이 달린 나무가 우수수
잎사귀를 떨어내고 있다
다 바람의 일이다


5
머리 위로 불끈 솟았던 해가 지고
숲에선 비운 뼈가 자지러지더라도
나중 것이 먼저 것을 감싸는 일이나
뼈와 가죽 사이에 씨앗 맺는 일이나
켜켜이 산 그리며 흔들리는 일이나
제 살 뚫는 마음의 가지를 뻗어내는 일이다


6
그늘 하나씩 거느리고 사느라
외로운 나무끼리 외롭지 않다고
대관령 타고 내린 순례자의 길이
다 붉다
여기 말없이 묻어온 사람의 등을
말없이 토닥여 주는 옛고개에서
바람 불지 않는 날은 없다


7
그 바람
다 말할 수 없고
그리움은 잘라낼수록 더 붉어
자지러진 마음
좋은 날 있으면 나쁜 날도 있다고
썩을, 잎사귀들과 아이처럼 바닥에 뒹굴며
슬그머니 흘린 숲의 발성과 몸짓 몇 개로
킬킬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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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자 이영휴 시인

 

 

 

[당선소감]

  오후의 햇살이 좋아 빈 들판에서 거닐다 하늘을 봤다. 햇빛 알갱이들이 눈에 쏟아졌다. 순간 나비들이 훨훨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고, 문득 작아진 것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바닥에서 꼬물꼬물 기어 다니던 애벌레가 캄캄한 고치 속에서 이게 끝이다 생각할 때 빛의 길이 열리고 훨훨 날개를 펴는 나비, 빛의 순간은 짧지만 나비는 비상하는 동안 꽃들의 수정을 돕고 사라지지 않던가.

  아무리 작아도 시시한 삶이 없다. 시가 캄캄한 고치 속에서 빛의 길을 여는 또 하나의 눈이라면 진액이 빠져나간 두 눈은 감아도 좋겠다. 두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며 2009년을 시작하자고, 고요한 마음으로 기축 년 첫날 산책에서 돌아왔다.

  해 저녁,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바리톤의 목소리, 이메일이 반송되어서 전화로 알린다는 바리톤의 목소리 주인공은 박인과 선생님이셨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이 비워져 있어서 잠시 멍했다. 이것이 뜻이라면, 나는 아직 어두운 다락방에 있다. 불면의 시간을 채워 준 괴로움에 보답하기 위해서 더 깊은 어둠으로 파고 들어갈 것이다.

  언젠가 나, 그리고 수많은 너, 존재마다 단 한 단어, 나비날개를 달아줄 빛의 단어를 찾을 수 있을까?

  당장은 모두에게 너무 마음이 춥지 않은 겨울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라 안과 밖의 경제가 어려워, 혹 아무리 어려워도 꽃 피는 봄을 희망했으면 좋겠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이 곤고한 사람들에게 마음의 위로가 되는 한 해가 되면 참 좋겠다.

  하늘과 땅, 존재만으로도 위로인 엄마와 서로에게 힘이 되는 가족에게 사랑을 전하며, 수고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