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몽탄면 말봉산>님의 카페에서
[2008년 계간 「시선」겨울호 계간 리뷰
함경도 / 이동호
남쪽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대합실에 앉아 있다
나는 피난민이 아니다, 하여 가져갈 봇짐도 없다
함경도가 고향이라는 옆 아저씨의 말씨에도
이제 전운은 감돌지 않는다
우리가 가졌던 불운한 역사라는 것도
현관문을 나서다 맞이한 시계탑이다
오늘은 쉰여섯 번째 전쟁 기념일,
역사 앞 앵벌이의 모자 속에 동전을 던져 넣으며,
나와 아저씨는 3․8선을 스치듯 각자
다른 현관문으로 들어섰다가 이 자리에서 만난 것인데,
생면부지의 그와 내가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 것은
첫 음절에서 액센트가 시작하는 그의 억양과
첫 음절에서 강세가 시작하는 내가 쓰는 부산 말이,
이미 전란 중에 한번 만나 닮아 있는 탓이다
그렇게 그는 혈혈孑孑이지만, 나는 단신單身이었다
부산을 갈 때마다 그때가 생각난다며
피란 가듯 아저씨가 내려놓는 큰 가방 속에는,
아직도 가보지 못한 함경도가 들었는지,
하늘은 그의 흰 보따리를 들고 자꾸만 북으로
방향을 틀고 가는데,
텔레비전 속에는 오늘, 기념할 것이 많아
까만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3․8선 같은 바지 옆 재봉선을
꼭 잡고 있던 흰 장갑으로 거총 중이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군악대의 느린 음악소리를 밟으며,
우리는 패스트푸드점에서 비무장지대로 걸어나온다
그와 나는 양쪽에서 못다 나눈 그의 함경도를 나눠 잡고,
개찰구를 함께 나선다. 열차표를 개찰구에 넣으며
잠시 갈라섰다가 다시 우리가 만난 것인데,
벌써 오십여 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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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송준영
패스트푸드점 바깥은 모두 비무장지대라는 시인의 말은 여러 번의 음미를 요한다. 패스트푸드점들은 평화롭다. 전쟁과 불운을 모른다. 평화로울뿐더러 풍요롭기까지 하다. 과거의 불운한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현재 패스트푸드점 거주자들일 것이다. 불운한 역사가 과거란 이름으로 지나간 지금 비무장지대마저 기억 속에 버려진 지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개인의 역사가 더해지면서 지형도는 지리적 지형도가 아니라 심리적 지형도를 그린다. 불운한 과거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은 지금의 평화와 풍요를 역사의 산물로 해석한다. 그들은 패스트푸드점의 세상만이 전부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 바깥으로 나와 비무장지대를 거닌다. 전운의 기억은 몸소 치른 고통의 시간과 함께 남아 있다. 그것은 마치 고쳐지지 않는 사투리의 액센트처럼 몸에서 쉽게 떨어져나가지 않는다. 과거라는 선명한 기억과 현재라는 실제적인 이곳을 모두 거쳤거나 거치는 중인 시계탑의 초점은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무표정으로 뚜벅뚜벅 시간의 길을 간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고 무표정한 시계탑만을 단속적으로 맞닥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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