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발표작

링반데룽* / 이혜미

자크라캉 2009. 1. 12. 16:19

 

 

[웹진 시인광장 선정 2009년 올해의 좋은 시 1000]

 

 

사진<언덕너머하늘향기>님의 카페에서

 

 

반데룽* / 이혜미

  

                                          


  내가 버린 네가 풍경으로 서 있다, 오지도 가지도 않고 저만치 서 있다. 이제 그만 돌아가, 너의 계절은 끝났어 그러자 너의 눈동자는 점점 더 초식동물의 그것으로 변하고 순식간에 너는 방울방울 사라지고 네 눈물 떨어진 자리에 폭죽처럼 터진 말줄임표들 씨앗으로 뿌려진다. 씨앗에서 침묵의 싹이 자라 순식간에 촘촘히 짜여진 나무들 나를 둘러싸고, 실뿌리들 혈관을 타고 올라와 나의 귀가 점점 나팔꽃을 닮아간다. 사방 천지 자욱한 안개 속 식물들 몸 뒤척이는 소리뿐. 나는 굵은 뿌리가 된 다리로 땅 속을 하염없이 파헤치고, 너를 쓰다듬었던 손이 실가시 듬뿍 박힌 덩굴손이 되어 아무 가지나 휘어감아 자라나는데, 가지 끝에 올라 숲을 보니 온통 발광하는 초록, 초록의 덩어리들!

 

  하나의 침묵이 태어나고 자라는 이곳이 너의 동공 속임을 안 나는 아 아 아 아 소리도 잃고 잎사귀가 된 입으로 부질없이 어둠만 뱉어낸다 뚝 뚝 수액을 떨구며, 몸 속 가득한 그늘 출렁이며 너를 부르는데 아아 저만치 네가 돌아오는 소리, 나는 쫑긋 나팔꽃 귀를 세우고 덩굴손을 흔드네 여기야 여기, 버린 네가 다가와 나에게 키스한다. 한 잎 한 입 나를 뜯어 삼킨다 점점이, 안개가 풀어낸 파편이 되어 사라지는 너와 나의 숨톨들. 네가 나를 먹는 동안 나는 순하게 잎사귀만 흔들며 망연자실, 아무래도 이 숲의 초록은 계속될 것 같네, 네가 나를 삼키고 결국 내가 나를 버릴 때까지

 

* Ringwanderung ; 방향 감각을 잃고 같은 지점을 맴도는 일. 환상방황(環狀彷徨)

 

 

계간 『서정시학』 2008년 겨울호 발표

  

 

[이혜미 시인]

 

1987년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하였으며 현재 건국대학원 국문과에 재학중에 있다.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 시부문에  '침몰하는 저녁'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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