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인

무구(無垢)한 그들의 죽음과 나의 고독(孤獨) / 김춘수

자크라캉 2008. 12. 1. 10:07


사진<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님의 블로그에서

 

 

 

 

구(無垢)한 그들의 죽음과 나의 고독(孤獨) / 김춘수
 

   1

스스로도 모르는
어떤 그날에
죄(罪)는 지었습니까?

우러러도 우러러도 보이지 않는
치솟은 그 절정(絶頂)에서
누가 그들을 던졌습니까?

그때부텁니다
무수한 아픔들이
커다란 하나의 아픔이 되어
번져간 것은―


   2

어찌 아픔은
견딜 수 있습니까?

어찌 치욕(恥辱)은
견딜 수 있습니까?

죄(罪)지은 기억(記憶)없는 무구(無垢)한 손들이
스스로의 손바닥에 하나의
장엄(莊嚴)한 우주(宇宙)를 세웠습니다


   3

그러나
꽃들은 괴로웠습니다

그 우주(宇宙)의 질서(秩序) 속에서
모든 것은 동결(凍結)되어
죽어갔습니다


   4

죽어가는 그들의 눈이
나를 우러러보았을 때는

내가 그들에게
나의 옷과 밥과 잠자리를
바친 뒤였습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나의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린 뒤였습니다


   5

그러나
그들의 몸짓과 그들의 음성과
그들의 모든 무구(無垢)의 거짓이 떠난 다음의
나의 외로움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수정(水晶)알처럼 투명(透明)한
순수(純粹)해진 나에게의 공포(恐怖)를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죽어가는 그들을 위하여
무수한 우주(宇宙) 곁에
또 하나의 우주(宇宙)를 세우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