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인

무의미 시론의 의미

자크라캉 2008. 10. 13. 14:54

 

 

의미 시론의 의미

장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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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4년 󰡔�시인 세계󰡕�(가을호)가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시인들이 가장 즐겨 애송하는 시는 2004년 가을에 작고한 대여 김춘수의 「꽃」이라고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로 시작하여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로 끝나는 이 시는 자아와 대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을 함축적으로 시화한 작품으로, 어느 모로 보나 한국 현대시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아도 손색이 없는 그런 작품이다. 그런데 대여는 후에 가서 이 시의 끝을 장식하는 “의미”라는 단어를 “눈짓”으로 바꾸었다. 왜 그랬을까. “의미”라는 단어 자체는 비록 추상적인 것이긴 하지만 자신이 상대에게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이 되기 바란다는 뜻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반면, “눈짓”이라는 단어는 비록 구체적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시를 혼란스러운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서로에게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는 말 자체야 ‘시적 허용’의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눈짓”이 되고 싶다는 말이 이 시에서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너의 눈길을 끌거나 너의 눈길이 머무는 대상이 되고 싶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이 말은 ‘이름을 부른다’는 말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사실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오직 인간만의 것일 수 있다. 적어도 언어를 소유하고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생명체가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러하다. 한편, 대상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소극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또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대상을 의미 있는 존재로 받아들인다는 뜻을 갖는다. 반면 눈짓이란 사람뿐만 아니라 눈이 있는 생명체라면 어떤 것이든 취할 수 있는 단순한 행동일 수 있다. 즉, 대상에게 눈짓을 보낸다는 것은 반드시 대상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아닐 수 있다. 따라서 “이름을 불림”으로써 상대에게 “눈짓이 되고 싶다”는 말은 ‘상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됨으로써 상대에게 별 의미가 없어도 상관없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식의 혼란스러운 뜻을 가질 수도 있다.

다시 한번 묻지만, 이런 혼란에도 불구하고 대여가 “의미”라는 단어를 “눈짓”으로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가 주창한 바 있는 “무의미 시”라는 논리에 거슬리기 때문이었으리라. “무의미 시”라는 논리를 정립하면서 대여는 아마도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는 식의 시적 진술, 그러니까 드러내놓고 의미를 갈망하는 과거의 시적 진술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는지도 모르다. 어쩌면 자신이 유의미한 시를 썼다는 사실까지 되돌릴 수 없더라도 적어도 이런 식의 시적 진술에 대해서는 손질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손질을 통해 그가 어떤 심리적 만족감을 느꼈는지는 몰라도 그는 그 자체로서 하자가 없는 시를 훼손하거나 시에 대한 혼란을 자초했을 뿐이다. 시란 결코 시론에 맞춰 쓸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이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무의미 시”를 쓰겠다는 행위 자체가 유의미한 것이고, 그런 이상 “무의미 시”라고 하더라도 의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니, “무의미 시”는 ‘무의미한 의미’를 갖는 시이다. 이 때문에라도 결코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난 2002년 김화영 교수가 사회를 맡아 진행한 문학 강연 자리에서 대여는 이렇게 말한다.

시의 세계는 그런 결론이 나기 이전의 아주 소프트하고 신선한 미지의 세계, 있는 그대로의 세계, 뭐라고 명명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명명했다는 것은 벌써 의미가 성립되었다는 것입니다. 의미로서 굳어지기 이전의, 아주 신선하고 말랑말랑하며 융통성이 있는 세계, 유연한 세계가 바로 시의 세계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중략) 그런 자각이 생기면서 그때부터 나는 서술적인 이미지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을 하자고 해서 그것을 한참 하다 보니까, 또 어떤 벽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언어로서 그리는 이미지라고 하는 것은 역시 의미의 영역입니다. 내가 그렇게 쓰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뭔가 의미에 천착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잘못된 것이 아닌가, 독자가 없는 시는 있을 수가 없는데, 자꾸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독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당신 시는 잘 모르겠다고 하는데, 왜 모르느냐 하면, 자꾸 관념과 결부시키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육이 나빴던 면도 있지만, 언어 자체에 그런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어 자체가 늘 의미의 그림자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미지를 아무리 순수하게 쓴다고 해도, 의미의 그림자가 깃들여진다는 것입니다.

대여는 “무의미 시”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그러니까 자신의 시를 “관념”과 결부시키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 그 이유를 “교육”과 “언어”에서 찾고 있다. 그의 판단은 옳은 것일 수 있지만, 동시에 틀린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교육”과 관계없이 “언어”뿐만 아니라 “시”도 “늘 의미의 그림자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시란 언어를 재료로 하여 성립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는 언어가 아닌 소리를 재료로 하여 성립되는 예술인 음악을 “지향”(指向, 志向)할 수는 있어도 음악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같은 강연의 자리에서 대여가 고백한 바와 같이, 시를 음악으로 만들기 위해 “주문 비슷한 시”를 쓰더라도 “의미의 찌꺼기”는 남게 마련이다. 대여는 극단의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는데, “낱말도 해체시켜” “음절 단위의 시를 써” 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언어가 전부 파괴되어” 버리는 결과에 이르게 되어 결국에는 “새로운 의미의 시”를 쓰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요컨대, 대여 자신도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백한다. 물론 이 같은 고백에 이르기까지의 시 창작에 대한 대여의 모색은 참으로 값진 것이다. 방법론에 대한 대여의 고뇌는 한국 문학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진지하고도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란 언어로 씌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를 벗어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에 등을 돌린 채 “무의미 시”가 불가능함을 시가 아닌 “교육”과 “언어”에서 찾았던 것은 대여의 방법론적 고뇌의 한계로 지적되지 않을 수 없다. 무릇 세상일이 다 그러하지만, 무언가에 몰두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몰두하고 있는 그 무엇 자체가 지니는 근원적 한계에 대해서는 눈이 멀게 마련이다.

2

의미란 불가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시 자체가 무언가의 의미를 담고 있거나 견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은 여전히 있을 수 있다. 즉, 시란 의미를 유발하는 하나의 동기(動機, motive)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려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시란 의미를 능동적으로 ‘실체화’(hypostatization)하는 주체가 아니라, 관찰자(또는 독자)의 관찰 작업(또는 읽기 작업)의 과정에 생성되는 것이라는 입장이 그것이다. 미국의 시인 아치볼드 맥리쉬(Archibald MacLeish)가 「시작법」(“Ars Poetica”)이라는 시는 이런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훌륭한 논의 거점이 될 수 있다.

시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어서는 안 되는 법 / 마치 떠오르는 달과 같은 것이어야 하는 법 // 시란 그 자체로서 조응되는 것이어야 하는 법 / 무언가에 충실하기보다는. // 모든 슬픔의 역사에 대해서는 / 문에 이르는 텅 빈 길과 단풍잎 하나 // 사랑에 대해서는 / 고개 숙인 풀잎들과 바다 위의 등댓불 둘― // 시란 의미해선 안 되는 법 / 다만 존재해야 할 뿐. (A poem should be motionless in time / As the moon climbs // A poem should be equal to: / Not true // For all the history of grief / An empty doorway and a maple leaf // For love / The leaning grasses and two lights above the sea― // A poem should not mean / But be.) (제15-24행)  

아마도 “시란 의미해선 안 되는 법”이며 “다만 존재해야 할 뿐”이라는 논리에 동의하는 사람에게 시를 읽는 일은 꽃이나 바위나 새를 감상하는 일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 시를 ‘올바르게’ 감상하는 데 무언가 시의 ‘의미’를 읽어내는 일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냥 느끼면 된다’는 입장도 상당히 설득력을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의미하는 ‘언어적 실체’로서의 시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시에 내재되어 있는 무언가의 특정한 의미가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맥리쉬의 「시작법」이라는 시 자체가 하나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맥리쉬의 시가 한 편의 시인 이상 ‘시란 의미해서는 안 된다’라는 진술이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의 시도 ‘의미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의 시가 ‘의미해서는 안 된다’면 ‘시란 의미해서는 안 된다’라는 진술도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시가 의미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의미하고 있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이 시의 역설은 ‘시란 의미해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의미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논리를 더욱 더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시인의 전략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도 우리는 ‘무언가를 의미하기’란 시가 애초부터 지니고 있는 특성임을 부정할 수 없다. 요컨대, 시란 의미를 유발하거나 전달하는 언어의 ‘잠재력’을 바탕으로 해서 무언가를 의미하도록 만들어진 것인 이상, 윌리엄 커츠 윔새트 2세(William Kurtz Wimsatt, Jr.)가 「시에 대해 무엇을 말할 것인가」(“What to Say about a Poem”)에서 말한 것처럼 “한 편의 시는 무언가를 말하거나 의미하고, 또는 무언가를 의미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란 한 송이의 꽃, 한 덩어리의 바위, 한 마리의 새와 같은 자연물과는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즉, 근원적으로 의미를 결여하고 있는 “다만 / 하나의 몸짓”일 수는 없다. 또는 이름을 불러 주어야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그런 존재일 수는 없다. 시는 비록 꽃이나 바위나 새와 같이 ‘미적 감식’(aethetic appreciation)의 대상이긴 하나 꽃이나 바위나 새와는 달리 인위적 의도가 개입되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미가 없는 “무의미 시”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도 한 편의 시는 이미 ‘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것―요컨대, 무의미한 것―이 시라면, 또는 그런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시라면, 시란 진실로 꽃이나 바위나 새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리라. 사정이 그러하다면, 그 모든 아름다운 자연의 시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데 굳이 인위적으로 시를 창작할 필요가 있겠냐는 식의 물음도 제기될 수 있으리라.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는 다름 아닌 대여의 시 「꽃」에서 찾을 수 있다. 꽃이나 바위나 새가 있음에도 여전히 인간의 인위적인 시가 필요하다면, 시 쓰기란 바로 꽃이나 바위나 새의 “이름을 불러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를 통해 세상의 만물은 이름을 얻게 되고 나아가 유의미한 그 무엇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 읽기란 바로 대상에 새롭게 부여된 이름이 무엇인가를 해독하는 작업일 수 있다. 대여의 말대로 시가 “관념”이 아니라면 바로 때문이다. 즉, 이름을 불러 주는 일은 결코 관념을 투사하는 행위가 아니며, 시를 읽는 행위 역시 시에 투사된 관념을 읽어내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에 의해 사물에 새롭게 부쳐진 이름을 찾는 행위이다.

대여가 그토록 진지하게 추구했던 “서술적인 이미지”는 기실 이처럼 이름을 부여하고 새롭게 부여된 이름으로 대상을 부르기 위한 것일 수 있다. 또한 어떤 이름을 부여하든 거기에는 시인의 의지가 들어가게 마련이기 때문에 그 어떤 서술적인 이미지도 의미 부여와 가치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어떤 대상을 선정하여 시적 소재나 제재로 삼는 일 자체가 이미 의미 부여와 가치 판단의 행위가 아닌가. 문제는 이뿐이 아니다. 대여가 서술적인 이미지의 대척점에 놓고 그토록 회피하려고 했던 “비유적인 이미지” 역시 서술적인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대상에 부여했거나 부여하기 위한 또 하나의 이름일 수 있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이름이 상투적인 것으로 전락하여 무의미한 것이 된 대상에게 새롭게 이름을 부여하거나 아직 이름이 없는 대상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또 그 이름으로 불러 주는 작업이 이른바 ‘비유화’(比喩化)이기 때문이다.


3

“무의미 시”에 대한 대여의 추구에 인식론적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거나 정지해야 한다는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적 인식론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앞서 언급한 문학 강연 자리에서 대여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에 주목할 수 있다.


이미지 그 자체를 위한 이미지, 내부에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미지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즉물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선적인 태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관념을 일체 배제하고서 사물을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에는 흔히 관념의 눈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관념을 떠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인데, 이것은 후설이라고 하는 철학자가 에포케라고 하는 말을 써서 표현한 것입니다. 에포케는 판단을 괄호 안에 넣는다는 것인데, 판단을 중지(보류)한다는 말입니다.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판단이니까, 이미 결론이 나 있는 상태입니다. 모든 관념이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판단으로 가기 이전의 상태를 본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회의적인 태도입니다. 이런 것이 제 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쓴다는 것은 순수하게 쓴다는 것이고, 배후에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관념”이라는 “판단”을 “중지” 또는 “보류”함으로써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 대여의 논리이다. 또한 그런 방식으로 사물을 봄으로써 얻어진 것이 이른바 “서술적인 이미지”라는 것이 그의 논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여의 논리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절차로, 우리는 우선 후설이 말한 “경험적 자아”라든가 “순수 자아”와 같은 개념에 주목할 수 있다. 후설은 판단이나 선입관으로 인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자아를 “경험적 자아”(das empirische Ich)―또는 “개인적 자아”(das persönliche Ich)―로 명명하고, 이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자아를 “순수 자아”(das reinen Ich)라고 부른 바 있다. 이 같은 용어에 기대는 경우 대여가 추구했던 것은 “경험적 자아” 또는 “개인적 자아”를 뛰어넘어 “순수 자아”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순수 자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우리에게 가능한가이다. 후설은 “순수 자아”와 관련하여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때 체험되는 자아는 그 자체로서 받아들여지거나 또는 독자적 탐구 대상이 될 성질의 그 무엇도 아니다. “관련 양상”이라든가 “행동 양식”이라는 측면을 떠나서는, 그 어떤 본질적 요소도 완벽하게 결여하고 있으며, 그 어떤 설명 가능한 내용도 갖추고 있지 않으며, 아울러 자체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그 무엇이다. 즉 순수 자아라는 말 이외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만일 “순수 자아”란 “그 어떤 본질적 요소도 완벽하게 결여하고 있”는 동시에 “그 어떤 설명 가능한 내용도 갖추고 있지 않”고, 따라서 “독자적 탐구 대상이 될 성질의 그 무엇도 아니”라면, 심지어 언어조차 “순수 자아”의 영역에서 부정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황은 결코 상정될 수 없는데, 위에 인용한 후설의 언명이 하나의 반증 자료가 될 수 있듯이,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순수 직관에 도달해 있는가에 대해 알거나 말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언어는 그 자체로서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는 필요 불가결의 조건이기 때문에 일종의 역설을 피할 수 없다. 즉, 언어조차 부정되어야만 하는 순수 직관의 상황에서도 언어는 결코 부정될 수 없다. 바로 이 같은 모순으로 인해 “순수 자아”란 관념 속에서나 존재하는 비현실적 개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바꿔 말해, 이론적인 사색의 자리에서가 아니라면 누구도 순수 자아의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순수 자아”에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순수 자아”의 경지에 이르려는 의지조차도 극복되어야만 한다.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마음을 완벽하게 비워야 한다면, 마음을 비우겠다는 마음조차 마음에서 비워야 한다. 하지만 마음을 비우겠다는 마음조차 마음에서 비우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설사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비우겠다는 마음조차 마음에서 비운 경지에 이른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는 이미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바로 그 사람일 수 없다. 그는 이미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의지에서조차 떠나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찌 대여가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 좌절이 대여를 “주문 비슷한 시”로, 이어서 “음절 단위의 시”로, 결국에는 다시 “새로운 의미의 시”로 이끌어간 것이리라. 거듭 말하지만, 대여의 방법론적 고뇌와 탐구는 우리 시단에서 흔치 않은 것으로, 우리 모두가 주목해야 할 만큼 진실로 값진 것이다. 하지만 대여의 방법론적 고뇌와 탐구에도 불구하고, 시는 여전히 대상을 위해 이름을 짓고 또 그 이름으로 대상을 불러 준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대상은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된다. 의미란 결국 모든 시인과 모든 독자가 피할 수 없는 것, 운명적인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것, 일테면 운명적인 것이 다름 아닌 의미라는 사실―그것은 시인에게든 독자에게든 저주인 동시에 축복이다. 아니,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저주인 동시에 저주임에도 불구하고 축복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