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오직 인간만이 쓰고 있다.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는 일찍이 시를 써본 일이 없다. 컴퓨터가 쓴 시는 그럼 뭐냐 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인간이 컴퓨터한테 시를 입력 시킨 결과일 뿐이다. 제 아무리 정교한 컴퓨터라도 인간의 입력없이 스 스로의 뜻으로 시를 쓰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능력은 인간을 인간으로 있게 하는 특질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리고 그 때문에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특이한 존재인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상한을 알 수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오늘 현재에 이르 기까지 무수하게 많은 시를 지어내고 있다.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하 여 시 같은 것은 이제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는 한탄이 전 세계에 널 리 퍼져 있는 현대에 있어서도 시의 생산량은 줄기는커녕 오히러 늘어 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의 줄기차고도 유구한 역사는 그 자체가 이미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새로 시를 쓰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나 타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 역시 그 예외가 될 리는 없다. 아주 많은 것은 아닐지 몰라도 일반적 통념이 막연하게 추정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시의 지망자들이 도처에서 남몰래 열심히 시의 트레이닝을 거듭하 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들의 가슴 속엔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을까]하는 안 타까운 소망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 은 시의 본질이나 원리보다도 막상 시를 쓰려고 할 때 당장 표현 방법 상의 이런저런 어려움에 기인하는 안타까움이다. 그리하여 고민을 한다 면 시의 지망자들과 함께 시 창작의 여러 가지 구체적인 방법론을 생각 해 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시 창작의 방법론이라 했지만 실상 시에는 그렇게만 하면 틀림없이 물건이 된다는 방법론의 모범 답안이 없다는 말부터 먼저 해두어야 하 겠다. 기대에 어긋난다 할는지 몰라도 그점에 관해서는 나에게 잊지 못 할 추억이 있다. 벌써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부산 피난시절의 일이 다. 당시 학생으로서 출판사의 아르바이트 교정원 노릇을 하고 있던 나 는 어느 날 회사일로 대구에 가서 역시 그곳에 피난중이던 선배 시인 조지훈을 처음 만났다. 그는 나를 끌고 문인들이 모이는 어느 술집으로 갔고 또 그 술자리가 파한 뒤에는 한 동안 나와 함께 밤길을 걸었다. 그 렇게 단둘이 밤길을 걸으면서 나는 술기운을 빌어 평소 가슴 속에 뭉쳐 있던 제일 큰 물음을 지훈에게 털어놓았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는 일언지하에, "그건 방치할 수밖에 없는 일이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그는 나의 무안함을 덜어주려는 듯 자 기도 그 말을 정지용에게서 들었노라고 덧붙였다. 그 후 나 자신이 또 한 여러 번 써먹은 일이 있는 그 말의 의미, 그것이 바로 시에는 모범답 안적 방법이 없다 는 사실인 것이다. 미국의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 (Sinclair Lewis)는 어떤 대학에서 소설창작론의 강좌를 맡았을 때 그 첫 시간에, [학생 여러분이 정말 소설을 쓰고 싶다면 지금 당장 집으로 돌 아가서 뭐든지 쓰기 시작하라]고 말했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표현은 다르지만 뜻은 완전히 조치훈의 [방치]와 일치하는 발언이다. 이처럼 모범답안이 없다는 것은 시와 문학이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라는 뜻으로 통한다. {보봐리 부인}의 작가 G. 플로베르(Gustav Flaubert)는 그 어려움 을 보다 절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말 한마디를 찾아내기 위해 꼬박 하루 동안 두 팔로 머리를 싸안고 가 엾은 뇌수를 짜는 일이 무엇인지를 당신은 아마 모르실 겁니다. 당신에겐 사상이 폭넓게, 그리고 다함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나의 경우는 그것이 보 잘 것 없는 실개천입니다. 폭포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공사가 필요 합니다. 나의 인생은 심장과 두뇌를 짜서 마침내 그것을 고갈시키기 위한 과정입니다.
이 인용문은 플로베르가 평소 짝사랑의 감정을 품고 사귀었던 연상의 여류작가 조르쥬 상드(George Sand)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세계 의 문학사에 하나의 커다란 봉우리로 솟아 있는 대작가 플로베르조차도 이처럼 비통하게 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 문학인 것이다. 시는 물론 그러한 문학의 한 장르에 속한다. 아니 그러한 문학 중에서도 시 는 언어에 대한 태도가 특히 엄격한 장르인 것이다. 더욱 어렵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시에 뜻을 둔 사람들은 이 말에 주눅을 들 필요가 조금도 없 다. 인생만사 누워서 떡먹듯 쉽게 되는 일이 어디 있는가. 설령 있다 해 도 그것은 가치 없는, 따라서 일부러 마음먹고 할 일이 못되는 것이다. 마음먹고 해볼 만한 가치있는 일은 그 종류 여하를 막론하고 어렵기 마 련인데 시와 문학이 그 중의 하나임은 구태여 두말할 나위가 없다. 플 로베르는 그렇기 때문에 자기 인생을 [심장과 두뇌를 짜서 마침내 그것 을 고갈시키기 위한 과정]으로 만들 만큼 문학에 전력투구를 한 것이다. 그의 불후의 명성은 재능의 소치가 아니라 그러한 전력투구의 노력이 스스로 얻어낸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재능으로 치면 겨우 말 한마디를 찾기 위해 하루 종일 뇌수를 짜내는 그의 경우는 오히려 둔재 중의 둔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또 처음부터 대작가 대시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문학의 수많은 기라성들은 모두가 처음부터 대작가 대시 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플로베르가 예시하는 바와 같은 노력을 통 해 자기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간 사람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 음먹고 한번 시에 도전해 볼 만한 일이 아닌가..
그래도 재능이 아주 없고서야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말은 물론 수긍에 값한다. 그러나 시를 지망하는 사람들은 그렇게까지는 걱정할 것이 없 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를 좋아해서 자발적으로 시를 선택한 사람들이 기 때문이다. 시를 좋아하는 그 마음 속엔 반드시 시에 대한 재능이 잠 재해 있다. 무슨 일이든 그 일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일에 대 해 잠재적 재능을 가졌다는 뚜렷한 징표인 것이다. 바둑을 좋아하는 사 람만이 기사가 될 수 있고 수영을 좋아하는 사람만이 다이빙선수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의 지망자들이 걱정해야 할 것은 재능의 유무가 아니다. 문제는 재능이 아니라 자기 속에 이미 잠재해 있는 재능을 자 기가 얼마만큼 열심히 키워갈 수 있느냐 하는 그 노력의 의지인 것이다. [천재는 1%의 재능과 99%의 노력의 소산이다]라고 발명왕 에디슨 (Tomas A. Edison)은 말했다. 시에 관한 1%의 재능은 그것을 쓰는 능력 이 그 존재의 한 특질로 되어 있는 인간의 기본자질이라 할 수 있다. 시 를 좋아해서 자기도 직접 시를 써보겠다고 나선 사람들에게는 그 1%의 기본자질 외에 더 많은 재능이 부여되어 있다. 그 많은 재능을 살리면 된다. 노력하면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은 남이 들려주는, 모범답안이 있을 수 없는 창작방법론도 모범답안 이상 으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도 물론 그렇게 활용되기 를 바라고 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노력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서 시를 잘 쓰게 된다면 그것도 역시 공짜인 것이다. 자, 그럼 모두 함께, 없는 공짜는 바 라지 말고 떳떳하게 값을 치르면서 시를 써보기로 하자.
1) 그것은 곧 감정의 표현이다 서양사람들은 옛날부터 시에 3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옛날부터 그랬다고 해서 고전적 삼분법이라고 불리는 이 3가지 종류의 시는 우리 도 이미 알고 있는 서정시, 서사시, 극시이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 라 그 중에서 서사시와 극시는 이름까지도 시가 아니고 소설과 희곡이 라고 바뀔 만큼 큰 변화를 겪었다. 그에 비하면 서정시는 상대적으로 변화가 덜해서 오늘날은 그것이 시라는 이름을 독점하는 형국이 되어있 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시는 서정시의 준말인 셈이다.
서정시의 그 [서정]은 문자 그대로 감정의 표현을 뜻한다. 그러니까 시는 그 이름부터가 감정표현을 주로 하는 문학양식이란 특성을 드러내 고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우리가 직접 시를 읽어보고서도 얼마든지 확 인할 수 있는 특성이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 민요시 <아리랑>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 실제로 그렇게 발병이 났다 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문장이 아니라, 떠나는 님에 대한 야속 함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문장인 것이다. 그 야속함 속에는 님에 대 한 사랑과 이별의 슬픔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이와같이 야속함, 사랑, 슬픔 등으로 구체화된 감정을 정서라고 한다. 그래서 감정과 정서라는 말은 까다롭게 구분하지 않고 동의어로 쓰이는 게 통례로 되어 있다. .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이 시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T.S. 엘리어트의 장시 <황무지> 의 서두 부분이다. 엘리어트는 주지주의라 해서 지성을 존중하고 감정 은 되도록 억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던 시인이다. 그러한 엘리어트 의 이 시도 그러나 그 첫줄부터 뚜렷하게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4월 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말은 4월에 대한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시안 에서 말하는 화자의 주관적 감정반응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흔히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감정은 인간의 의식의 한 양상이다. 인간의 의식 속에는 사물에 대해 감정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 즉 감정이 있다. 이 감정과 함께 사물 을 논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을 아울러 갖추고 있는 것이 인간의 의식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감성을 통해 느끼고 이성을 통해 생각한다 고 말할 수 있다. 그 느낌이나 생각의 결과로써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 대상에 대한 어떤 종류의 이해이다. 그러나 그 이해의 방법과 내용은 감성과 이성이 서로 큰 차이를 보인다. 먼저 이성의 경우를 보면 그것 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곳은 대상에 대한 분석적 객관적 이해의 세계이 다. 객관적인만큼 그것은 또 다른 사람들도 전적으로 그에 동의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게 된다. 예를 들면 그것은 물이라는 대상을 [두 개의 수소와 하나의 산소가 화합하여 이루어진 물질]이라고 이해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현대의 눈부신 과학문명이 사물을 그와 같이 이해하는 이 성의 소산임은 새삼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이성적 이해는 더불어 사는 존재인 인간의 원만한 공동생활을 가능케 하는 필수 절대 의 조건이 된다. 왜냐하면 어떤 사물을 두고 갑은 그것을 꽃이라 하고 을은 그것을 돌이라 하듯 주관적 이해가 서로 엇갈린다면 인간의 공동 생활은 유지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은 인간이 가진 가장 귀중한 능력이란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이성만이 옳고 감성과 감정은 최대한 억눌러야 할 부정적 요소라는 인식도 은연 중에 용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2) 마음의 거울에 비친 세계를 그리는 것 그러나 이성의 가치를 아무리 높이 평가한다 해도 이성만으로는 인간 의 삶이 온전하게 영위되지 못한다. 그것은 이성과 함께 감성을 타고난 인간의 숙명이다. 게다가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각자 가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특수한 개별성을 가진 존재이기도 한 것이 다. 사물에 대한 감성적 이해, 즉 느낌은 그러한 개별성을 단적으로 드 러낸다. 그것은 이성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주관적 직관적 이해인 것이 다. 동일한 대상을 놓고도 그에 대한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이 그러한 감성적 이해의 실상을 말해준다..
이러한 감성과 또 그것이 빚어내는 감정을 배척하고 만사를 이성적으 로만 생각하고 처리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 것인가. 그때의 인생은 마 치 기계가 돌아가듯 정확할지는 몰라도 차갑고 삭막하기 이를데 없는 움직임의 연속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 당연한 귀결로서 그때는 또 사랑이나 동정심 같은 귀중한 덕목도 헌신짝처럼 저버림을 당할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그치고 정교한 로봇이 되어 살아가는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한 일 아닌가. 여기 서 우리는 감성과 감정이 이성 못지 않게 귀중하다는 사실, 그리고 특 히 감정이 인간을 인간으로 있게 하는 핵심적 요소라는 사실을 알게 된 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도 감정표출이 자유로운 사람 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인간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이성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지 않는 차가운 인간이라는 경원을 당한다..
실상 감정은 이성과 대비되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근본에 있어서는 그 속에 이성도 포괄하는 종합적 능력이다. 비단 이성만의 이야기가 아 니다. 그 사람이 자란 환경, 받은 교육, 읽은 책, 만난 사람, 그리고 현재 의 정신적 조건 등 말하자면 여태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축적한 경험의 총체가 감성의 작용인 우리의 느낌, 즉 감정 속에 용해되어 있다. 그러 한 경험의 총체가 하나의 육체를 빌어 구체적 인격을 이루게 된 것이 바로 인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은 그 사람의 인간적 조건 전부를 반영하는 종합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시는 이러한 인간의 감정을 주 로 표현하는 문학 양식이다. 그러니까 시는 그 감정 속에 용해된 우리 의 인간적 조건 전부를 통해 사물의 세계를 바라보고 그리하여 그것을 표현한 것이라는 대답이 나오게 된다. 다시 말하면 시는 사물과 세계를 가장 인간적인 눈으로 조명하고 이해한 결과인 것이다..
이 경우 눈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마음의 눈을 뜻한다. 그리고 마음 은 그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감성과 또 그 감 성의 작용의 결과인 감정과 본질적으로 통하는 의식세계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앞서 말한 바 감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경험의 총체가 그 속에 용해되어 있는 통합된 의식이요, 또 인간의 개별성을 나타내는 의식이 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마음을 통해 느끼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 느낌, 그 생각이 하나로 어울려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이성만 가지고는 결코 마음의 이 통합성을 이루어내지 못한다. 감성은 그와는 달리 처음부터 그 속에 이성을 포괄하는 종합적 능력이기 때문에 그 자 체가 이미 마음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가 감정을 표현한다는 말은 곧 우리의 마음에 비친 세계를 표현한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3) '가치있는' 감정을 표현해야 {논어}의 양화편(陽貨篇)에 보면 공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시를 배우지 않으면 그 사람은 마치 담벽을 보고 마주 선 것과 같다]고 말했 다는 구절이 나온다. 담벽을 보고 마주 선다는 것은 융통성 없는 답답 한 삶이 됨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물론 감정이 메마르고 따라 서 그 마음이 또한 볼품없이 막혀 있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돈만 아는 사람, 권세만 추구하는 사람, 자기 일신의 동물적 욕망에만 사로잡혀 우 주와 인생의 그 도처에 편만해 있는 무수한 다른 가치에 대해서 소경이 되어 있는 사람은 손쉽게 들 수 있는 그런 예가 될 것이다. 시와 감정, 그리고 시와 마음의 상관관계를 공자는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러나 시가 감정을 표현한다는 말은 오직 감정 그것만을 표현한다는 뜻이 아니다. 감정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저속하거나 무가치한 감정 은 배제하고 의미있는 감정, 가치있는 감정을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러 자면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차원높은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철학적 명상 과 지적사고(知的思考)를 쌓지 않으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표현의 효 과를 드높이기 위한 기술적 고려는 오히려 우리에게 감정의 억제를 요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우리는 또 시대의 발달이 인간에게 더 많은 지적 활동을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적 사고가 일찍 이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대인 의 정신상황이다. 시라는 이름의 마음의 거울이 이러한 우리 시대의 현 실적인 인간의 삶을 도외시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우주와 인생 그 모두를 마음의 눈, 즉 가장 인간적인 눈으로 비쳐내는 것이 시인인 것 이다. 그때의 그 마음 속에는 물론 시대가 요구하는 현저하게 증대된 지적 사고도 용해되어 있다. 시는 감정표현을 내용의 기본특성으로 하 되, 사물과 세계에 대한 지적 분석과 비판정신도 아울러 수용하는 문학 양식인 것이다..
이상은 시 창작의 실제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말하자면 시의 원 리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시가 무엇을 표현하는가라는 이 정도의 원 리는 앞으로 시를 쓰려는 사람들이 일단 알아둘 필요가 있는 기본적 이 해사항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