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창작법

시란무엇인가?-시의 정의

자크라캉 2008. 9. 5. 11:49

 

 

1.시란무엇인가? / 김종삼

 

                                                                                  

시란 무엇입니까?

 

[1]시는 악마의 술이다. 《A.아우구스티누스/반회의파 反懷疑派》

[2]시를 쓰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그건 낚시질하고 똑같네. 아무 소용이 없는

것같이 보이지. 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좋은 수확이 되는 법이거든.

《E.크라이더/지붕 밑의 무리들》

[3]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 《호라티우스/시론 詩論》

[4]시는 신(神)의 말이다. 그러나 시는 반드시 운문(韻文)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는 곳곳에 충일(充溢)한다. 미와 생명이 있는 곳에는 시가 있다.

《I.S.투르게네프/루딘》

[5]나의 시는 어지럽지만 나의 생활은 바르다. 《M.V.마르티알리스/풍자시집 諷刺詩集》

[6]시란 것은 걸작이든가, 아니면 전연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J.W.괴테》

[7]위대한 시는 가장 귀중한 국가의 보석이다. 《L.베토벤》

[8]시는 거짓말하는 특권을 가진다. 《플리니우스》

[9]시란 미(美)의 음악적인 창조이다. 《E.A.포》

[10]시는 단지 그 자체를 위해 쓰인다. 《E.A.포》

[11]시는 단 하나의 진리이다. ……명백한 사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전한 마음의 표현이다. 《R.W.에머슨》

[12]시는 최상의 마음의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하나의 시란 그것이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의미이다. 《P.B.셸리》

[13]시란 그 시를 가장 강력하고 유쾌하게 자극하는 방법으로 사상의 심벌들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예술이다. 《W.C.브라이언트》

[14]즉흥시는 진정 재지(才知)의 시금석(試金石)이다. 《J.B.P.몰리에르》

[15]시의 목적은 진리나 도덕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시는 다만 시를 위한 표현인

것이다. 《C.P.보들레르》  

[16]기쁨이든 슬픔이든 시는 항상 그 자체 속에 이상을 좇는 신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C.P.보들레르》

[17]감옥에서는 시는 폭동이 된다. 병원의 창가에서는 쾌유에의 불타는 희망이다. 시는

단순히 확인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재건하는 것이다. 어디에서나 시는 부정(不正)의

부정(否定)이 된다. 《C.P.보들레르/낭만파(浪漫派) 예술론(藝術論)》

[18]시란 영혼의 음악이다. 보다 더욱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다. 《볼테르》

[19]한 줄의 글자와 공백으로 구성되는 시구는 인간이 삶을 흡수하고 명확한 말을 되찾

아내는 이중의 작용을 한다. 《P.클로델/입장(立場)과 제언(提言)》

[20]나는 부재(不在)를 위해서 제기된 언어다. 부재는 모든 나의 재행사(再行使)를

격파한다. 그렇다. 그것은 다만 언어뿐이라는 것의 재빠른 소멸이다. 그리고 그것은

숙명적인 오점이며 헛된 완성이다. 《Y.본푸아》

[21]시의 세계는 식물계, 이것은 또한 지상의 사랑과 미의 왕국이다. 《R.기카드》

[22]시란 냉랭한 지식의 영역을 통과해선 안 된다. ……시란 심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곧바로 마음으로 통해야 한다. 《J.C.F.실러》

[23]과학의 적절하고 직접적인 목적은 진리를 획득하고 전달하는 것이며, 시의 적절하고

직접적인 목적은 즉흥적인 즐거움을 전달하는 것이다. 《S.T.콜리지》

[24]내용이 끝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 황금어의 피안에, 도시 성곽의 외부에, 토론의

형자(形姿)를 뒤로 하고, 사고 체계를 벗어나서 신비로운 장미는 개화한다. 서릿발의

열기(熱氣) 속에, 도배지의 희미한 무늬 속에, 제단의 뒷벽 위에, 피어나지 않는 불꽃

속에 시는 존재한다. 《M.아널드》

[25]시란 본질적인 면에서 인생의 비평이다. 《M.아널드》

[26]시란 간단히 말해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이고, 다양하게, 효과적으로 사물을 진술하

는 방법이다. 《M.아널드》

[27]시란 힘찬 감정의 발로이며, 고요로움 속에서 회상되는 정서에 그 기원을 둔다.

《W.워즈워스/서정민요집 抒情民謠集》

[28]말은 어느 편이냐 하면, 시의 수면기를 재촉하는 부분이며, 상상(想像)이 시의 생명

이다. 《O.펠섬/각오 覺悟》

[29]시는 최상의 행복, 최선의 정신, 최량이고 최고의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P.B.셸리/시가옹호론 詩歌擁護論》

[30]고대인의 시는 소유의 시며, 우리들의 시는 동경의 시다. 전자는 현재의 지반 위에

굳게 서지만, 후자는 추억과 예감의 사이를 흔들려 움직이고 있다. 《A.W.슐레겔》

 

  시에 대한 정의 30개만 적어보았습니다. 더 말하라면 찾지 못해서 그렇지 수없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에 관한 말들이 이렇게 많은 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언급이 시를 쓰는데 무슨 도움이 될까요? 이런 말들을 아무리 많이 외우고 있다 해서 시가 돼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시창작의 왕도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방법을 가르치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적으로 한 번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시를 말로 그리는 그림이라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좀더 시의 모습이 분명하게 와 닿을 것 같습니다. 자! 시제(詩題) 아니 화제(畵題)를 하나 주겠습니다. [절(寺)]입니다. 이런 화제를 준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번 ‘절’을 그려보십시오. 백지위에 간단히 그려봅시다. 시간을 많이 줄 수는 없고 1분만 주겠습니다. 어디 봅시다.


그림1)

 

 

1번 그림처럼 그린 사람 있습니까? 그렇다면 아주 세밀하게 잘 그렸습니다. 대웅전도 그리고 석가탑 다보탑해서 부속건물들을 일일이 잘 그렸습니다. 실제 그림1은 해인사의 정경입니다. 만약 절을 그려라 했는데, 그림1번처럼 그렸다면 여러분은 점수를 얼마나 주겠습니까? 나 같으면 50점정도 주겠습니다. 사물을 세밀하게 포착하고 실물처럼 그려내는 재주는 높이 살만하지만 이것은 그냥 기능일뿐이지 잘된 그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림2)

 

 

 

  혹시 그림2처럼 그린 사람있습니까? 절을 그린다고 해놓고 실제 절은 어디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상상해봅시다. 탁발공양나갔다 돌아가는 스님의 뒤를 따라가다보면 앞서 그림1과 같은 절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존재가 없다고 말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 이 힘이 바로 상상력입니다. 달리 말하면 시적 이미지입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이 정도의 여백을 만들 줄 안다면 한 70점정도 줄 수 있겠습니다.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 봅시다.

 

 그림3)

 


  그럼, 3번 그림처럼 그린 사람 있습니까? 그렇다면 100점주겠습니다. 이 그림이 무슨 ‘절’과 관계가 있냐고 한다면 또 역시 할 말은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논리보다는 상상력을 발휘하라고만 했습니다. 이렇게 그려놓고 제목을 ‘절’하고 달면 보다 구체적일 것 같습니다. 저 안개 자욱한 산 속으로 후미져 들어간 오솔길을 따라가다보면 그 어디메쯤 가서 절과 만나지 않겠습니까?

시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시를 짓는다 했을 때, 사물이나 내면을 일일이 정물화처럼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의 단서(端緖)만 제공하면 됩니다. 이 실마리를 통해 시인과 독자가 만나게 되며 그것을 통해 공명하고 공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를 쓸 때 해야할 일은 어떤 논리나 기능적 측면을 염두에 두기보다는 시적인 것, 즉 시를 시답게 만드는 어떤 것의 단서를 찾아 보여주면 됩니다. 그러나 그 실마리는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다 대고 시적인 것과 감응할 수 있는 안테나를 언제나 내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 재수가 좋아 하나의 울림을 잡아채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즉 직관적으로 그것을 언어로 옮겨 놓는 것입니다.

  얘기는 송나라 휘종황제 때 일화에서 따 온 것입니다. 휘종은 그림을 몹시 좋아했던 임금입니다. 그는 유명한 시 가운데 한두 구절을 골라 화제(畵題)로 내 놓곤 했습니다. 한번은 “어지러운 산, 옛 절을 감추었네(亂山藏古寺)란 제목이 출제되었습니다. 화가들은 1번처럼 무수한 어지러운 봉우리와 계곡, 그리고 그 구석에 자리잡은 고색창연한 퇴락한 절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1등은 2번 그림처럼 숲속에 조그만 길이 나 있고, 그 길로 중이 물을 길어 올라가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가 그 스님의 모습도 없애 버렸습니다.

 

2.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


  미국의 시인 중에 아치볼드 매클리시(Archibold Macleish 1892-?) 가 있습니다. 그가 시 쓰는 법에 대해 시를 썼습니다. 한 번 봅시다.



                시법(詩法)


          시는 둥근 과일처럼

          만져지고 묵묵해야 한다.


          엄지에 닿는 낡은 메달처럼

          소리 없고


          이끼 자라난 소매에 닳은

          창시렁의 돌처럼 조용해야 한다.


          시는 새들의 비약처럼

          말이 없어야 한다.


          시는 달이 떠오르듯이

          시간 속에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


          달이 밤에 얽힌 나무로부터

          가지를 하나하나 풀어 놓듯이


          겨울 잎새 뒤에 있는 달이

          마음에서 기억을 하나하나 풀어 놓듯이


          시는 달이 떠오르듯이

          시간 속에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


          시는 사실이 아니라

          동등해야 한다.


         슬픔의 모든 내력으로는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를


         사랑의 경우

         기울어진 풀잎과 바다 위에 뜬 두 불빛을-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 한다.


  시를 여러 가지 이미지로 비유했습니다. 시는 둥근 과일이고, 낡은 메달이며,  만져지고 묵묵한 것이고, 소리 없는 것이고, 움직임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뭔가 알똥말똥합니다. 그러나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시는 사실이 아니라/동등해야 한다.’는 말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시 속에 펼친 정서나 역사가 모두 사실일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상상할 수도 있고, 꾸밀 수도 있고, 과장된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등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그것을 뒷받침하는 비유를 ‘슬픔’과 ‘사랑’을 들어 했습니다. 인간 삶의 여정을 볼 때, 이 두 정서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두 정서는 시의 영원한 테마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슬픔’을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와 동등하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을 ‘기울어진 불빛’과 ‘바다 위에 뜬 두 불빛’으로 동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아하’ 하는 탄성과 함께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정도 센스는 있어야 시를 쓸 수 있습니다. 시는 ‘슬픔’을 그냥 ‘슬프다’ 얘기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을 그저 ‘사랑’이라 얘기하지 않습니다. ‘슬픔’과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것과 동등하게 만들어 줄 뿐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동등하게 만드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슬픔’과 ‘사랑’의 깊은 의미를 경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시는 보이는 만큼 쓰는 것이고, 산 만큼만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예술에 신동(神童)이 있습니다. 장영주와 같은 챌리스트, 유태평양과 같은 판소리꾼, 올름스테드라는 뉴욕의 네 살바기 화가 등이 놀라운 천재성을 발휘한다는 것을 언론을 통해 전해 듣곤 합니다. 그런데 시인신동이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있다 해도 소위 유치한 동시 정도 쓸까. 그만큼 연륜이 있어야 된다는 증거겠지요.

자, 이제 마지막 구절에 와서 우리는 시가 무언지 다시금 되새기게 됩니다.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는 이 명제 앞에 시를 쓴다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읽게 됩니다.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시에서 무슨 의미를 찾으려고 그동안 애쓰지 않았나 생각해봅시다. 그런 것 같습니다. 특히 학교 교육에서 이 시의 소재는 주제는 해가면서 시의 의미 찾기에 골몰하지 않았습니까? 대학의 시창작 교실에서도 그것을 답습하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에서 ‘시의 언어는 사물이며 산문의 언어는 도구’라고 말했습니다. 이 언명은 시의 운명을 바꾸는 존재론적 전환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이후 시는 패배의 길을 걷는 지도 모릅니다. 산문이 앙가쥬망에 기여하는 장르로서 급속히 대중 속으로 파고 들 때, 시는 세상과 멀어진 듯 사물처럼 놓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한다면, 시라는 것이 달리 말하면 시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인간처럼 시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불변의 진리는 대중에게 식상할 수도 번거로울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것은 차후의 문제이고 다시 시가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로 돌아갑시다. 이 지점에 중요한 신비평가가 있습니다. I. A 리챠즈입니다. 그는 “중요한 것은 결코 시가 의미하는 바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라고 그의 책 『poetries and sciences(1970)』에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시의 자율성에 대한 존재론적 선언입니다. 그래서 시가 정신 신경적으로가 아니라 중립적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따라서 해석은 시인의 의도나 시인의 반응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사물자체의 묘사에 의존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시의 운명이란 것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시인의 의도는 시 앞에서 그 의미를 잃게 되고 독자의 영역이 확대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한 편의 시가 시인의 의도대로 한 가지 의미로 고착된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사물(事物)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물(死物)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정된 의미망에 묶여 있는 사물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 바로 시 짓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이것은 러시아 형식주의들의 명제이기도 한 일종의 ‘낯설게 하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