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창작법

극적서정시 보기 / 이승훈의 알기쉬운 현대시작법

자크라캉 2007. 7. 12. 17:31

 

사진<박애단>님의 카페에서

 

<극적 서정시 보기>

 

떤 싸움의 기록 / 이성복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하며

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

휘들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

아버지의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

문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 신은 채

마루로 다시 기어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 내리

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누나 작은 누나의 비명,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 냄새 술 냄새를 맡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 버릴테야

법도 모르는 놈 나는 개처럼 울부짖었다 죽여 버릴테야

별은 안보이고 갸웃이 열린 눈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라일락꽃처럼 반짝였다 나는 또 한 번 소리질렀다

이 동네는 법(法)도 없는 동네냐 법(法)도 없어 법(法)도 그러나
나의 팔은 죄(罪) 짓기 싫어 가볍게 떨었다 근처 시장(市場)에서
바람이 비린내를 몰아왔다 문(門) 열어 두어라 되돌아올
때까지 톡, 톡 물 듣는 소리를 지우며 아버지는 말했다


 

이성복, 「어떤 싸움의 기록」부분

 

<감상>

                        이 시에서 전개되는 것은 어떤 싸움이고

그것은 술에 취한그가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으로 그를 내리치며 시작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대해 시인,

곧 주체는 거리를 유지하며 비판하거나 정서를 매개로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보여 줄 뿐이다. 이렇게 시인이 극적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여 주기만 한다는 점에서 이 시는 극적양식을 띤디

중요한 것은 대체로 드라마가 3인칭 시점임에 비해 이 시의 극적

장면은 1인칭 시점으로 제시된다는 점. 따라서 시 속에 나오는

'나'는 슈타이거가 말하는 주체가 아니라 극중 인물 가운데 하나이며

주체, 곧 시인은 이 싸움을 보고하고 기록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에는 극적상황에 참여하는 '나'와

이 상황을 보고하는 '나'가 있다. 극적상황이 객체라면 이 상황을 보여

주는 시인(극작가)은 주체이고 이 시의 경우 주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른바 절대 정신으로 존재한다. 그는 존재하지만 그는 극의 논리를

따라가고 상황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말하지 않고 그저 보여 줄뿐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시인이 보여주는 극적상황이고 시인은 보이지 않는다.

이 시가 보여 주는 것은 술 취한 그와 아버지의 싸움이고 시인은 싸우는

이유에 대한 설명도 언급도 비판도 없다. 싸움이 환기하는 것은 격정이고

우리는 이 싸움의 미래, 곧 어떻게 결말이 날 것인가에 흥미가 있다.

과연 싸움은 어떻게 끝나는가? 화가 난 '나'는 ' 이 동네는 법도 없는

동네냐'고 소리치며 죄짓기 싫어 팔을 가볍게 떨고 문틈으로는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아버지는 '문 열어 두라'고 말하며 끝난다.

 

<이승훈의 알기쉬운 현대시작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