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당선작

김연아 / <현대시학> 제17회 신인작품공모 당선작

자크라캉 2008. 7. 14. 10:48

                                         사진<푸른날개>님의 블로그에서

 

 

 

[김연아 / <현대시학> 제17회 신인작품공모 당선작 ]


/ 김연아

늦은 저녁 고등어를 다듬는다 냉동실에서 나온 고등어는 싱크대에서 녹는 중이다 사막의 등고선처럼 일렁이는 무늬는 달의 숨결로 새긴 것일까 흐르는 물에 고등어의 잠이 빠져나간다 거실을 담고 있던 텔레비전은 사막을 쏟아놓는다 히잡을 입은 얼굴들을 앞세우고 총구를 든 한 무리의 사내들이 화면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지평선의 소실점이 사라진 곳 사막은 보이지 않는 입으로 자라는 것일까 그림자 하나 숨을 곳이 없다 나는 기다린다 달이 지나간다 달이 지나가는 동안 고등어가 녹는다 고등어는 말이 없다 그 입에 얹힌 소리가 무엇인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달은 어떤 소리를 내는 걸까)

그들이 내 몸을 가져갔어요 제 그림자를 토하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요 유서를 남기고 사막으로 간 사람들은 왜 돌아올 줄 모를까 화면이 소리 없이 뒷걸음질한다 사막의 전사들은 동굴로 되돌아가고 인질들은 뒷걸음으로 전사를 따라간다 먼지는 땅으로 돌아가고 사막은 걷히고 고등어는 녹아서 도마 위에 놓여 있다 검은 피를 흘리며. 그는 번개나 달의 먼지였을까 흘러온 길 끝에 그의 무덤이 될 내 몸이 있다 사막에서 사막이 된 사람처럼 고등어는 내 몸을 입고 내가 될 것인가 비어있는 눈이 담고 있던 건 무엇이었을까 심해를 들여다본 그 눈은 달을 삼킨 밤처럼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한다 달은 밤을 벗으며 눈을 뜨는데


 

사진<아이들세상>님의 블로그에서

긴수염고래 / 김연아

내가 늙어 눈이 깊어질 때 나는 돌아가리라
우리가 태양을 묻어버린 곳*, 바다 중의 가장 검은 바다로
거기엔 세상에서 잊혀진 이름들, 범선과 닻이 녹슬고 있으리라
저기 고래좌의 별들이 물 속에 잠길 때
바람은 사향 냄새를 몰고 온다
그러나 내 속의 쓸개 냄새는 아무도 알지 못하네

그 일은 어느 금요일에 일어났다
외눈박이 수염고래 한 마리
턱 아래 늘어진 푸른 주름을
모래톱에 내려놓고 밭은 숨을 쉬고 있다
빛이 사라지는 지평선
바다를 토해내던 숨구멍으로 일제히 날아오르는 붉은 나비떼

너는 지금까지 선잠으로 물 위를 떠돌아다녔지, 사막의 낙타처럼 햇볕에 혹을 말리며. 토성의 고리였던 시간을 지나 빙하가 우는 산에서 너는 자랐지 몬순의 비가 내리면 달과의 약속을 지키려 떼를 지어 이동하는 크리스마스섬의 붉은 게처럼 여기까지 흘러왔네 안데스의 이회토에 묻혀 있는 네 조상의 뼈, 그 속에 흐르던 낙타의 피. 난바다곤쟁이를 쫓아 남빙양 바다 밑을 잠수하던 뜨거운 숨주머니, 그 허파는 지금 죽음의 잔처럼 독으로 차 있네

마침내 너는 일흔 살이 되었다
몸을 관으로 하여 은수자처럼 떠돌려나
이제 바다거품으로 몸을 헹구고
해저동굴을 울리던 그 노래는
마리아나해구의 침묵으로 놓아두어라
시든 눈으로 황혼이 떨어진다
태양을 향해 너는 마지막 숨을 거둔다
기도하는 손처럼 지느러미를
하늘로 향한 채

* 만젤쉬땀의 시 제목.



                                사진<잣고을생태체험학습장>의 카페에서
먼지벌레의 잠 / 김연아

그렇다, 너는 해질녘 태어난 어둠의 사생아
바람을 걸치고 이 지상으로 찾아와
언제나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

어둑한 강기슭, 시든 풀냄새 아래 너는 엎드려 있다 애매미 짤막한 노래가 심장에 타들어 갈 때, 잠결에 마시는 더듬이 끝의 물 냄새, 그 입에서 중얼중얼 흘러나오는 거품, 하루가 그 몸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하루살이처럼, 네 몸은 바람결에 풀리기 시작한다 소나기를 담았던 눈은 다시 비워지고

민달팽이가 남긴 은빛 길을 따라
나뭇가지로 몸을 옮긴다
가지 끝의 길은 팽팽히 조여져 떨고 있다
한기가 등줄기를 빠르게 지나간다
생식을 끝낸 먹그림나비가
땅바닥에 날개를 문대어 제 무늬를 지우듯
먼 불빛을 향해 너는 날개를 편다
다리 위에 조등 같은 초승달이 내걸리고
저 멀리 어느 집 하나
새벽까지 열려 있는데



                                                            사진<야생화>님의 블로그에서
리엄 블레이크가 가네 / 김연아

눈 내린 자작나무 숲을 윌리엄 블레이크가 가네
나는 윌리엄 블레이크를 모르고
나는 나를 모르고
내가 안다고 말하는 꼭 그만큼
정말 알지는 못하고
지금 내 머리 속에 사는 남자 윌리엄 블레이크

짐자무시의 흑백필름으로 윌리엄 블레이크가 가네
블레이크를 기억하지 못하는 블레이크
이미 죽은 남자 윌리엄 블레이크
더 이상 빛을 방사하지 않는 검은 별을 따라
시원으로 가는 길을 윌리엄 블레이크가 가네
말이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흐르지 않는 나무도 순례를 하는 걸까
하늘에서 땅 속으로 이어지는 수직의 순례
자작나무 껍질 아래 별의 비밀 같은 어둔 글자들이 돋아나네
그대는 벌써 하루의 끝에 와 있고
오늘 나는 어둠 속에 잠겨 있어
불이 꺼진 재처럼 나는 나를 완전히 잊지는 못하고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잠시
붉은 길이 인도하는
마음의 일곱 번째 방향을 생각하지
우리는 원래 말을 모르는 존재였네
말은 꽃과 같아 땅에서 떠나면 시들고 말지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언어를 가지고
나는 밤으로 가네
말을 잊어버린 사람을 찾아

어둡게 빛나는 그대 눈동자로 길은 자라지만
길은 언제나 한 발 앞서 멀어져가네
내가 길이 될 수 있을까
기억이 복제되는 순간을 어떻게 사라지게 할까
내 노래를 가지고 윌리엄 블레이크가 가네
꽃으로 덮인 카누에 실려 어스름을 넘어가네
바다 위에 걸린 하늘 문이 닫히네
눈꺼풀이 내려오듯 그렇게




                                   사진<아른다운 石蘭>의 카페에서
말은 월식처럼 어두워졌다 / 김연아


아무리 죽음을 공부해도 내 망상은 죽지를 않아, 해질 무렵 지빠귀 울음소리를 따라 집을 나왔다 태양의 한가운데를 쓰윽 뚫고 저 세상 입구로 들어가고 있는 수리산, 앞으로 가고 있었는데 여전히 산허리를 돌고 있었어 그 곳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 안에 있는 것은 밖으로 나올 수 없어 진달래술을 마신 것처럼 숲이 나를 끌고 다니네 처음 걸었던 길들이 멀리 어스름에 묻히고 환하게 솟아오르는 우듬지, 나이도 없이 태어나는 바람이 걸려 있다

달의 사제처럼 바위 성소에 제물을 바쳐볼까
내 말이 아홉 번째 하늘에 가닿을 수 있을까
북을 두드리며 자작나무를 타는 샤먼처럼
밤을 기다려 나무 위로 올라간다
처음 하늘이 열리던 날처럼 내 그림자를 벗고
나무에게 나무(南無)하도록
가지 끝에 걸어둔 옷이 허수아비마냥 바람에 나부낀다

자정의 비밀 집회 같은 숲의 웅얼거림, 쓰러진 고목 위로 지나가는 바람은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낸다 바로 그 순간 나는 하나의 비밀을 보았다 그러나 비밀은 뒷걸음으로 사라져간다 쓸개 담긴 밤이 나를 찾아왔다 그 쓸개를 찍어 나는 쓰리라, 화산의 달이여 떠올라라, 강물의 북들이여 깨어나라, 구름은 분화구를 메우고 몇 줄기밖에 떨어지지 않는 비, 검은 밤이 입 속에 쌓인다 내 말은 월식처럼 어두워지고


---------(심사위원 : 정진규, 이수익, 오태환) --------------------------

 
김연아 / 함양 출생.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졸업. 주소 : 경기도 의왕시 내손1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