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당선작

<현대시> 2008년 상반기 신인추천작품상 당선 - 최형심

자크라캉 2008. 5. 3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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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아반떼 HD 공식카페+>님의 카페에서

 

 

[<현대시> 2008년 상반기 신인추천작품상 당선]

 

장고의 효능 / 최형심

잔소리쟁이 남편을 냉장고에 넣기로 했다. 1미터 70, 키에 맞는 S전자 냉장고를 주문했다. 딩동! 특제 냉장고가 도착했다.

맛이 간 입술은 아래 칸 신선실, 휘두르기 좋아하는 왼손은 야채실, 나머지는 냉동실에 밀어 넣었다. 집이 고요하다.

아침마다 16년 숙성된 남편을 해동시킨다. 먼저 그의 입을 넣고 15분짜리 해동에 타이머 눈금을 맞춘다. 땡! 해동된 입에서 술 냄새와 니코틴 냄새가 확 풍긴다. 밤새 토하다만 라면 발이 엉겨있다. 고춧가루 확 뿌려 볶음용으로 랩을 둘둘 싸놓는다. 부풀었던 집이 가라앉는다.

출근시간 20분전. 땡! 밥상을 엎던 발을 해동한다. 타임오버! 발길질하는 불안한 발. 간이 덜 배었군. 엎질러진 남편을 주워 담아 냉동실 깊숙이 넣는다.

전자레인지를 돌린다. 땡! 밤새 고스톱을 치던 손이 꾸물꾸물 화투장을 찾는다. 눈 깜짝할 사이 내 뺨을 갈긴다. 얼얼하다. 나는 설익은 남편을 랩으로 묶는다. 냉동고의 온도를 확 올린다. 으, 365일 지겨운 메뉴!



지털 바이오그래피 / 최형심


5분 전의 내가 충전을 끝내는군요. 10분 후의 내가 자명종을 누르며 아침을 켜요. 이제 5분 전의 나는 전원이 들어오는군요. 10분 후의 내가 기지개를 켜고 커튼을 열어요. 밤새 까맣던 세상의 모니터가 켜지네요. 5분 전의 내 머리위로 푸른 바탕화면이 뜹니다. 오늘 바탕화면의 온도가 약간 내려갔습니다. 완연한 가을입니다.

오늘 가장 먼저 클릭해야 할 것은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죠. 10분 후의 내가 찾아가야 할 경로 : 영등포구→ 여의도동 → 사이버빌딩 → 4989호 →안쪽 두 번째 자리.

5분 전의 내가 10분 후의 나에게 보낸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10분 후의 내가 건성으로 메일을 읽습니다. 5분 전의 내가 커피를 뽑아들고 10분 후의 내가 주식 동향을 살핍니다. 종일토록 둘 중 어느 누구도 고개 들어 바탕화면을 쳐다보지 않았는데 하늘은 혼자 푸르렀습니다.

10분 후의 내가 5분전의 내가 지난달에 다운로드로 깔아놓은 새 애인 아이콘에 접근합니다. 5분 전의 내가 보낸 메시지에 그녀가 보낸 입맞춤이 10분 후의 내 뺨에 뜹니다. 5분 전의 나, 경고 메시지를 띄웁니다. 자판이 바쁘게 입을 놀립니다. 갑자기 창 하나가 둘 사이에 끼어듭니다. 10분 후의 내가 5분 전의 나를 덮쳐 5분 전의 나는 읽지 못하는 파일이 되었습니다.

10분 후의 나, 전원이 꺼집니다. 바탕화면에 어둠이 깔립니다. 오늘밤은 별도 뜨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복사하는 꿈속. 5분 전의 내가 10분 후의 나와,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리부팅되고 있습니다. 


목길 / 최형심

누군가 골목을 깎고 있다
껍질처럼 벗겨지는, 물 젖은 좌판 여인들
일수를 찍으러 대머리가 지나가고
길가에 쪼그린 고추 배추 시금치 헐값에 베어져나간다
야반도주한 계주 때문에
부글부글 속이 끓어
소금을 치며 버틴다는 새우젓장수
등이 시린 고등어 장수
와르르, 고등어 상자에 얼음을 쏟아 붓는다
몇 년째 변비를 앓고 있는 순대장수
도마에 썩썩 순대를 써는 동안
과부의 전대를 입질한 제비 한 마리
휘파람 불며 지나간다
떨이수박 한 통을 내놓은 광주댁
쩍, 배 가른 수박을
한쪽씩 베어 문 아낙들
푸념처럼 퉤퉤 수박씨를 뱉는다
막다른 골목
껍질 벗겨진 해가 떠있다

<약력>

최형심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박사 수료(국제법 전공). 현재 미국 MD Kirk School of Law(통신대학) 재학중. 현재 한국직업능력개발원 국제협력실 연구원. 주소 : 수원시 장안구 정자2동

 

[選 後 感]
250여 분의 응모자들 가운데 두 차례의 예심을 거쳐 열 분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 분들 가운데 세 분은 이미 저명 시 계간지나 현상응모, 기타 신춘문예 등에 당선된 이력이 있어 심사에서 제외하였다. 전체 응모자의 수나 작품의 수준은 예년의 평년 수준을 약간 웃도는 느낌이었다. 이번 심사에서 특이한 점은 대입 때문인지 고등학교 재학생들의 응모가 10여 명 있었는데, 수준은 기성시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아무튼 본심에 오른 일곱 분은 가나다순으로 권혁찬, 배문선, 이상학, 이언지, 조창규, 조혜은, 최형심 씨들이다. 우리는 이 가운데 최형심, 조혜은, 배문선 씨의 작품을 놓고 최종 논의하였다. 우리가 보기에 이 분들의 작품이 다른 분들의 작품보다 나아보였다. 이 분들은 모두 기성으로 소개해도 충분할 만큼 우리시의 평균적인 수준에 이른 분들이다. 오랜 논의 끝에 우리는 신인의 패기와 앞으로의 성장가능성을 보아 최형심 씨와 조혜은 씨를 새로운 시인으로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합의하였다. 우리는 배문선 씨는 물론 조창규 씨도 앞으로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재목이라고 생각하였다.

최형심 씨를 추천한다. 최형심 씨의 시는 한마디로 말해 오늘을 사는 캐리어 우먼의 디지털적인 도시서정이라 할 수 있다. 과거 한국시의 디지털적 상상력이 소재 차원에 머물렀다면, 최형심 씨의 시는 디지털적 상상력이 육화되어 자연스럽게 시 속에 드러난다. 새로운 도시문명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냉장고의 효능」에서 보듯이 잔소리쟁이 남편을 냉장고에 넣어버리고, 전자레인지로 해동시키고, 다시 랩으로 싸 냉동고에 넣어버리는 지겨운 일상(?)이 ‘땡’하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메뉴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요술쟁이 아내와 같이 한편의 시를 능숙하게 요리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능력은, 다소 거친 부문도 있지만, 최형심 씨 시 전반에 드러나는 좋은 덕목이자 재능이다. 어떻게든 한편의 시를 만들어내는 이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최형심 씨를 안심하고 시단에 소개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 솜씨는 전반적으로 보아 섬세하고 매끄러우며 새로운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다만 가능성이다. 새로운 도시서정을 온 몸으로 사는 이 젊은 여성 시인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선배 시인들이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즉물적인 오늘의 일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노래할 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최형심 씨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부탁하고 싶다. 최형심 씨의 시 속에는 비유가 없거나 빈약하다. 비유는 운율과 함께 시의 중심이 되는 두 축 중의 하나로 시에 입체감을 더해 줄 뿐 아니라 비유를 통해 시인은 이른바 자신의 철학적 사유와 시적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디지털적인 도시서정이 즉물적으로 드러나기보다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훌륭한 비유로 거듭난다면 최형심 씨의 시는 지금보다 더욱 깊어지고 풍부해질 것이며, 그를 시단에 소개한 우리는 매우 행복할 것이다. 정진을 바란다.

조혜은 씨를 추천한다. 조혜은 씨의 시는 한국시의 새로운 징후를 젊은 시인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서태지의 등장 이후 한국의 가요가 서태지 이전의 가요와 서태지 이후의 가요로 갈렸듯이, 한국시의 새로운 징후는 한국시를 미래파 이전의 시와 미래파 이후의 시로 나누어 놓았다. 세대가 다르니 소통이 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 새로운 징후를 한마디로 압축해 말한다면 우리 시단에 이른바 래퍼들이 등장한 것이다. 과거의 시가 노래였다면 새로운 시는 랩과 노래의 혼합인 것이다. 이것은 판소리가 아니리와 창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다. 노래만으로는 복잡다단한 오늘의 삶을 제대로 담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랩 속에는 새로운 세대의 서사와 진술이 환상적으로 혼합되어있다. 어떤 시인은 창을 모르는 삼류 아니리 광대처럼 죽어라 아니리만 불러대고, 어떤 시인은 훌륭한 광대처럼 창과 아니리를 모두 노래한다. 크게 보아 한국시는 지금 성장통을 앓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조혜은 씨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 시의 새로운 징후를 몸으로 체득하는 안테나와 새로운 환경을 개척해 나가는 시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미 익숙한 것이지만, 감각의 새로움을 느끼고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조혜은 씨에게 부탁하고 싶은 바가 있다면, 요설과 현란한 수사와 이미지 과잉이 넘치는 시단에 소통되지 않는 언어로 시를 쓰는 일군의 시인들 이후의 시를 써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설익고 거친 아니리 광대 이후의 시인을 기대해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무리한 부탁인가? 정진을 바란다.

늘 드리는 상투적인 말씀이지만, 본지에 응모해 주신 모든 응모자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당선자들에겐 축하의 말씀을 그렇지 못하신 분들껜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심사위원 : 강인한, 노향림, 원구식(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