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당선작

<현대시> 2008년 상반기 신인추천작품상 당선 /조혜은

자크라캉 2008. 5. 31. 11:25

 

 

사진<안동옥 우주삼라만상>님의 블로그에서

 

[<현대시> 2008년 상반기 신인추천작품상 당선]

 

89페이지 / 조혜은

햇살에 팔 저린 창문 가에서, 나는
그대가 벗어놓은 중절모가 되었어요.

호수와 바다가 넘실대는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 속으로, 나는
이야기가 되어 던져졌어요.

<그림책 속에서>

물감에 갇힌 사내들이 관현악을 연주할 때, 그대의 이야기는 6페이지 옆에서 처음 시작되었어요. 그녀에게 전할 장미를 물고, 바다 가운데 매달려 돛이 되어버린 사내. 그가 남겨둔 빈 의자 옆에서 모든 건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검은 점이었지만, 나는 선이 되었어요. 그를 향해 지저분하게 그어진 검은 선이 곧 나였어요.

구슬 속에 갇힌 노인이 알록달록한 추억을 향해 접힌 두 손을 뻗을 때, 넘겨진 22페이지에 와서야 알았어요. 마주보고 있어도 그대는 늘 나와 다른 쪽에 있었죠. 무채색 고양이의 미끈한 검은 등 옆에서, 빗방울이 되어 백조의 한쪽 날개를 적시고, 나는 곡선이 되었어요. 그녀의 풍만한 스커트 자락과 틀어 올린 둥근 머리가 곧 나였어요.

그림 아래로 난 펭귄의 두 다리, 혹은 그림 위로 보이는 견고한 균열이 곧 나였어요. 나는 그대의 틈새가 되고, 하얀 평면 위에 구멍을 내고, 그대에게서 훔쳐 낸 주사위에 올라 44페이지 옆으로 굴러가 버리고

낯선 사내가 홀로 있는 갑판 위, 지저분한 얼룩이 되었어요. 한 조각의 햇살. 그 햇살은 누구의 팔도 저리게 할 수 있다고, 사뭇 진지하게 말하는 텅 빈 사내의 뒤에서, 속삭이는 52페이지를 뒤로하고 나는 유희하는 그림이 되었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은빛 수도꼭지, 균열, 이미 멈춰버린 영사기 같은 것

거울 속으로 난 붉은 털실을 따라 그림 속으로, 혹은 그림 속으로. 그대와 내가 마법사의 모자에 갇힌 우주처럼 친밀하다는 착각과 어디에도 버려질 수 없다는 공상 속으로, 그림이 주인공이 되는 우울한 희극과 어느 때보다 나이든 아이들이 숨어 사는 아파트 속으로, 88페이지 옆에서야 알았어요. 내가 마차에 훔쳐 싣고 달아나는 지구 속에, 그대는 있지만 나는 없어요. 아무 페이지도 아닌 그게 나였어요.

<그림책 밖으로>

마침내 세상 모든 글자들이
나를 찾아왔어요.

89페이지를 넘어서면
그대도 한 편의 이야기처럼

비어버린 페이지 속에 나는 있지만 그대는 없어요.



* 그림책 : 크빈트 부흐홀츠, 「호수와 바다 이야기」


4분의 4박자 / 조혜은

<다장조인 1악장>
유두를 감싸고 사분음표가 생길 때마다
나는 연주하느라 애를 먹어요
출근하는 남편에게 나의 옆구리에서 나온 커피를 뽑아주고
유명한 반주자인 당신을 불러 나의 열 발가락에
사분쉼표를 하나씩 그려 넣었죠

하지만 당신들은 모두 오선지 속으로 사라져 가요
점점 여리게 혹은 아주 여리게

하루는 질 속에서 뾰족한 꼬리를 단 팔분음표들이 흘러나왔어요
가랑이 사이로, 바짓단 밑으로
나는 발걸음이 빨라졌어요
이모는 새 구두를 선물할 때마다 밑창을 열고
음표들이 없는지 확인했지만

오래된 신발장 안에서 늘어나는 발들
점점 빠르게 혹은 아주 빠르게

<2악장>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연주를 할 때
아내는 목을 늘어뜨리고 악보 끝에서 발가락을 잘랐다

나는 으뜸음 위에 올라 단조의 음계로 된 아내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허기를 달래고
아내의 온몸에 내가 아는 계이름을 적어 넣었다

도레미파솔라시
아내는 철로 위를 달리는 코끼리처럼
도레미파솔라시

살아 있다는 걸 무서워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연주를 할 때
아내는 위장을 열고 내가 아는 건반들을 모두 씹어 삼켰다

<사장조의 3악장>
유두를 감싸고 생긴 높은음자리표 옆에
남편만 모르는 악상기호가 여러 개 생겼어요
나는 여덟 개의 새로운 발도 가졌어요
마디마다 여덟 개의 새로운 십육분음표들을 연주하지요

내가 좋아하는 반주자인 당신이 내 골 속에 손을 넣고
메트로놈이 울릴 때마다 실을 당기면
나도 꽤 노련한 연주자인데

귓바퀴를 따라 낮은음자리표가 생겼어요
이제는 나도 꽤 노련한 연주자인데
당신들은 매일 한 옥타브씩 멀어져 가요
도레미파솔라시, 도레미파솔라시

<#이 있는 4악장>
아내가 괴상한 기호로 변해버렸다
두 개의 얼굴에 각각 두 개씩의 팔을 달고
여전히 두 개뿐인 발로는 열심히 페달을 밟는다

솔시레도미솔
아내의 흰 손은 건반 속으로
레#파라
아내의 눈동자도 건반 속으로

정말로 내가 필요한 사람은 여기 없어
꼭 감은 두 눈으로
아내는, 악보 끝에 되돌이표만 남긴 채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2악장>
침대 위에는
플랫(b)이
신발장 속에는 소리를 잃은 음표들이

피아노 선율에 감긴 시간들이 모두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늬를 가진 것들 / 조혜은


하루는 내 손등 위에
육각의 무늬를 그려 넣고,
바다거북이 되었다

그래도 헤어질 땐,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 끝에 맺힌 적갈색 상처를 찍어
발등에 바르고,
웅크려 앉은 정방형 바닥부터
봄에 내린 비가 차오르면, 나는
산란지를 잃고 떠도는 붉은 바다거북이 되고

그렇게 헤어져도, 눈꺼풀이 무거웠다

어제는 내 손바닥 안에
죽은 새끼 거북의 방패무늬 등껍질을 쥐고,
적송이 되었다

다시 만날 땐, 더 단단한 껍질을 가지려고 잇몸을 드러내고 웃었다
잇몸 끝에 드러난 송곳니로 팔뚝을 물어
붉은 가지를 만들고,
내 음부 아래로 손가락만한 당신의 노란 성기가
꽃무늬로 피어나면,
푸른 손톱으로 솔방울을 움켜쥐는 소나무가 곧 내가 되었고

당신을 다시 만날 때마다, 나는 갈라지고 갈라지고 갈라졌다

내일은 나의 볼록한 아랫배 위에
바늘로 소나무 무늬를 찔러 넣고,
호박 등이 되려 한다

눈을 뜨면, 나체로 묻고 나체로 말하고

나체로 된 슬픔을 배꼽 위로 흘려
온몸을 갈색으로 물들이고,
갈색 호박 등 안에 숨어 곡선의 춤을 추는
몸통뿐인,
여인의 무늬가 되려 한다

눈을 떴을 때
모든 건 꿈뿐인

나는, 무늬를 가진 것들

<약력>

조혜은

1982년 서울 출생. 강남대학교 특수교육학과 졸업. 주소 : 성남시 중원구 성남동

[ 選 後 感]
250여 분의 응모자들 가운데 두 차례의 예심을 거쳐 열 분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 분들 가운데 세 분은 이미 저명 시 계간지나 현상응모, 기타 신춘문예 등에 당선된 이력이 있어 심사에서 제외하였다. 전체 응모자의 수나 작품의 수준은 예년의 평년 수준을 약간 웃도는 느낌이었다. 이번 심사에서 특이한 점은 대입 때문인지 고등학교 재학생들의 응모가 10여 명 있었는데, 수준은 기성시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아무튼 본심에 오른 일곱 분은 가나다순으로 권혁찬, 배문선, 이상학, 이언지, 조창규, 조혜은, 최형심 씨들이다. 우리는 이 가운데 최형심, 조혜은, 배문선 씨의 작품을 놓고 최종 논의하였다. 우리가 보기에 이 분들의 작품이 다른 분들의 작품보다 나아보였다. 이 분들은 모두 기성으로 소개해도 충분할 만큼 우리시의 평균적인 수준에 이른 분들이다. 오랜 논의 끝에 우리는 신인의 패기와 앞으로의 성장가능성을 보아 최형심 씨와 조혜은 씨를 새로운 시인으로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합의하였다. 우리는 배문선 씨는 물론 조창규 씨도 앞으로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재목이라고 생각하였다.

최형심 씨를 추천한다. 최형심 씨의 시는 한마디로 말해 오늘을 사는 캐리어 우먼의 디지털적인 도시서정이라 할 수 있다. 과거 한국시의 디지털적 상상력이 소재 차원에 머물렀다면, 최형심 씨의 시는 디지털적 상상력이 육화되어 자연스럽게 시 속에 드러난다. 새로운 도시문명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냉장고의 효능」에서 보듯이 잔소리쟁이 남편을 냉장고에 넣어버리고, 전자레인지로 해동시키고, 다시 랩으로 싸 냉동고에 넣어버리는 지겨운 일상(?)이 ‘땡’하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메뉴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요술쟁이 아내와 같이 한편의 시를 능숙하게 요리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능력은, 다소 거친 부문도 있지만, 최형심 씨 시 전반에 드러나는 좋은 덕목이자 재능이다. 어떻게든 한편의 시를 만들어내는 이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최형심 씨를 안심하고 시단에 소개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 솜씨는 전반적으로 보아 섬세하고 매끄러우며 새로운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다만 가능성이다. 새로운 도시서정을 온 몸으로 사는 이 젊은 여성 시인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선배 시인들이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즉물적인 오늘의 일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노래할 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최형심 씨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부탁하고 싶다. 최형심 씨의 시 속에는 비유가 없거나 빈약하다. 비유는 운율과 함께 시의 중심이 되는 두 축 중의 하나로 시에 입체감을 더해 줄 뿐 아니라 비유를 통해 시인은 이른바 자신의 철학적 사유와 시적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디지털적인 도시서정이 즉물적으로 드러나기보다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훌륭한 비유로 거듭난다면 최형심 씨의 시는 지금보다 더욱 깊어지고 풍부해질 것이며, 그를 시단에 소개한 우리는 매우 행복할 것이다. 정진을 바란다.

조혜은 씨를 추천한다. 조혜은 씨의 시는 한국시의 새로운 징후를 젊은 시인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서태지의 등장 이후 한국의 가요가 서태지 이전의 가요와 서태지 이후의 가요로 갈렸듯이, 한국시의 새로운 징후는 한국시를 미래파 이전의 시와 미래파 이후의 시로 나누어 놓았다. 세대가 다르니 소통이 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 새로운 징후를 한마디로 압축해 말한다면 우리 시단에 이른바 래퍼들이 등장한 것이다. 과거의 시가 노래였다면 새로운 시는 랩과 노래의 혼합인 것이다. 이것은 판소리가 아니리와 창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다. 노래만으로는 복잡다단한 오늘의 삶을 제대로 담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랩 속에는 새로운 세대의 서사와 진술이 환상적으로 혼합되어있다. 어떤 시인은 창을 모르는 삼류 아니리 광대처럼 죽어라 아니리만 불러대고, 어떤 시인은 훌륭한 광대처럼 창과 아니리를 모두 노래한다. 크게 보아 한국시는 지금 성장통을 앓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조혜은 씨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 시의 새로운 징후를 몸으로 체득하는 안테나와 새로운 환경을 개척해 나가는 시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미 익숙한 것이지만, 감각의 새로움을 느끼고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조혜은 씨에게 부탁하고 싶은 바가 있다면, 요설과 현란한 수사와 이미지 과잉이 넘치는 시단에 소통되지 않는 언어로 시를 쓰는 일군의 시인들 이후의 시를 써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설익고 거친 아니리 광대 이후의 시인을 기대해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무리한 부탁인가? 정진을 바란다.

늘 드리는 상투적인 말씀이지만, 본지에 응모해 주신 모든 응모자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당선자들에겐 축하의 말씀을 그렇지 못하신 분들껜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심사위원 : 강인한, 노향림, 원구식(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