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당선작

[2007 실천문학 신인상 당선작] 최정진 /기울어진 아이 외 2편

자크라캉 2008. 2. 12. 10:02

 

사진<정석목님의 프래닛입니다>님의  플래닛에서

 

[2007 실천문학 신인상 당선작]

울어진 아이 / 최정진

 

세탁소가 딸린 방에 살았다 방에 들여 놓은 다리미 틀에서 엄마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내 몸의 주름은 구김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다림질 밖에 몰랐다 엄마의 품에 안겨 다려지다 어느 날 삐끗 뒤틀렸는데, 세탁소 안에서 나는 구부정하게 다니는 아이라고 불렸다

 

다린다는 말은 주름을 지우는 게 아니라 더 굵은 주름을 새로 긋는 문제였다 수선된 옷들이 마지막 누운 곳은 다리미틀 위였다 뜨거운 것과 닿으면 닳은 곳부터 반짝거렸다 오래입은 옷일수록 심했다 엄마는 밤마다 어딜 가는지 브라더 미싱 앞에서 드르륵 어깨를 떨었지만 우는 게 아니었다 꿰맨다는 말은 상처를 없애는 게 아니라 얼마나 잘 가리냐의 문제였다 엄마, 엄마 가슴에 난 구멍은 얼마나 크길래 날 실통에 걸어야 했나요 나를 돌돌 풀어 가슴에 안아야 했나요

 

천장엔 옷가지가 우거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바닥에 흘려두면 주머니 속의 새들이 쪼아 먹었다 엄마, 주는 대로 먹지 않는 헨젤에 관한 동화를 읽고 싶어요 뼈다귀를 내밀기 전에 끝나는 동화 말이에요 밤의 세탁소 깜깜한 비닐의 숲을 헤치고 다가가면, 엄마는 내 바지의 밑단을 늘려 내밀었다 짧아지지 않는 바지 안에 갇혀 내 몸은 부풀고 부풀기만, 그러다 세탁소 밖으로 뻥 터져버렸는데, 그 후로는 얇은 바람에도 어깨를 떨어서 지금껏 너덜너덜한 등을 가진 아이라고 불린다

 

세탁소가 딸린 방에서 나는 밤마다 기울어졌다 엄마, 내 몸의 기울기에 맞춰 몸을 숙이지 마라 방에도 걸음걸이가 있는지 바지 단에 남은 얼굴처럼 곰팡이도 한쪽 벽에만 핀다 세제의 기울기가 달라서, 얼룩도 때로 빠지는 정도가 다르다 지구에서 잠드는 우리는 제 각기 다른 별의 중력을, 한 자루 가득 꿈 속에 담아온다

 


 

람세탁소 / 최정진

 

수면의 바람이 강변의 벚나무에게 옮겨간다

나무에 장이 서는지, 잎들이 소란스럽다

새벽의 퉁퉁 부은 눈꺼풀 속에 지난밤의 꿈을 담아왔다 천막을 팽팽하게 끌어당기면 물건을 팔거나 사러 온 사람들은 장에 가기 전에 읍내 하나뿐인 세탁소부터 들렀다 두고 간 옷가지에 묻어있던 주변 마을의 흙들은 저마다 조금씩 빛깔이 달랐다 그새 얼마나 컸냐, 대빗자루로 마당을 쓸듯 기침소리 앞세워 안개를 걷어내는 할아버지 내 고추 그만 만져요 발갛게 익어 떨어질 것 같잖아요

 

바람이 벚나무의 가지를 손보고 있다

다음 장이서면 바람은 벚꽃을 내놓을까

 

보따리를 풀어놓고 할머니들은 줄지어 앉았다 수다가 들풀로 피어난 그 밭둑 사이에서 나는 보폭을 잃고 둥둥 떠다녔다 자주 길을 잃었지만 실밥이 옷자락에 묻어 나풀댔으므로, 집을 잃지는 않았다 바싹 마른 노을이 걷히면 물건을 팔거나 산 사람들은 읍내 하나뿐인 세탁소부터 들러 집으로 갔다 장터에 남은 바람이 빨랫감을 더 달라고 외치는 목소리로 불어왔다

 

벚나무가지 바람이 수면으로 돌아온다

벚 꽃잎 신발 한 켤레 사 신고 하류를 향해 걸어간다

 


 

모습 / 최정진

 

집 안에서 어렵지만 집 밖의

옥상에 가면 그의 굽은 등과 마주볼 수 있다

산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팔이나 다리 중에 하나가 사라지고 없는,

지난 산행에서 돌아오던 그의

왼쪽 다리는 간데없고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풍란 한 촉을 절뚝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말없이 가리키는 고갯짓을 따라 먼 산에 가보면

흰 양말을 벗어둔 그의 왼쪽다리가

등산로 구석 나무그늘 아래서

까맣게 여문 발톱들을 매달고

꼼지락거리며 쉬고 있었다

 

오래 전, 두 팔을 심어 둔 산의 날씨는 사나웠다

바람이 불면 그의 두 팔은 나부낀다

! 똥 방위라고 놀리던 집주인의 목 언저리에서,

손님의 수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세탁소를 운영하는 아내 대신

그릇이나 가구들을 집 앞에 생가지처럼 부러뜨려 놓으면서,

팔 대신 뿌리내린 가녀린 화초들은 나부낀다

그때마다 지난 밤에 걷히지 못한 어둠들이

웅크린 어깨에 안개로 걸려

아침까지 펄럭인다

 

하나 남은 오른쪽 다리는 어디에 심을까

옥상 화단에 몇 안 남은 빈자리들을 살펴보는지, 그는 더 웅크린다

화단의 흙을 누군가 다져놓았다

누가 틔운 뒷모습인지 그 발자국에서도

그림자가 자라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