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유정유의 꽃나라>님의 카페에서
공무도하가 / 이현승
건너지 못할 것은 다 강이라는 생각,
그러므로 지천으로 널린 것이 강이다
하품하다 흘린 눈물처럼, 슬픔이란
미천한 내가
미천한 그대의 눈동자를 마주할 때
보이지 않게 흐르는 강
울컥 물비린내가 나는 강
한 사람을 오래 사랑하면서도
어쩐지 실패했다는 느낌
나는 헤어질 준비를 다 끝낸 사람처럼
자꾸 허탈하다 그러므로
최대한 밀착된 거리에서 만나고 있다는 거
그건 어쩜 그대를 볼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하여 기꺼이 나는 방종했다는 걸
거리에서 만나는 저 사내
거주지불명의 저 사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알았다
앞을 보면서 그러나 아무 것도 보지 않는
그 눈빛 앞에서 나는 변방의 곽리자고처럼
또 백수광부의 처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대로변에 앉아 소주를 마시는 사내여
소주를 마시며 행려도 벗어놓고 구걸도 벗어놓고
사내는 길 건너를 망연히 보고 있다
노상에서 노천에서
끝없이 이어진 사내의 행려가
지금 사내를 내려놓으려는듯
강심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사람처럼
가지런히 신발을 벗었다
길 건너에 있는 사내
강 건너에 있는 사내
물수제비처럼 물에 잠길 사내
그 집 앞 능소화 / 이현승
1.
이를테면 제 집 앞 뜰에 능소화를 심은 사람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여름날에, 우리는 후두둑 지는 소나기를 피해 어느집 담장 아래서 다리쉼을 하고, 모든 적막을 뚫고 한바탕의 소요가 휩쓸고 갈 때, 어사화같은 능소화 꽃 휘어져 휘몰아쳐지고 있을 때,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그 집의 좋은 향기에 가만히 코를 맡기고 잠시 즐겁다.
능소화 꽃 휘어진 줄기 흔들리면,
나는 알고 있다. 방금 내가 꿈처럼, 혹 무엇처럼 잠시 다녀온 듯도 한 세상을.
2.
말걸어 오지 않는 세상을 향한 말걸기.
언뜻언뜻 바람을 틈타고 와
확, 뿜어져 나오는 향기란
아무것도 예비할 수 없었던 도난사고처럼
툭, 어깨치며 떠난 자에게서 후발되는 것.
뒤숭숭한 꿈자리처럼
파편적으로만 나타나는 기억 속에서
징후로만 읽혀지는 것.
그러나, 감추어진 것을 향한 나의 짐작은 두렵다.
다 익었다는 것 속엔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다.
열매도 없는 화초의 지독한 향기.
급소를 중심으로 썩어가는 맹독성
혼기 지난 여인처럼
꽃은 향기 속에 늘 부패의 경고를 담는다.
모든 향기의 끝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뚱뚱한 그녀, 혹은 비둘기에게 / 이현승
물론 나는 새가 무거워서 날지 못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아. 문젠 무게가 아니라 그 무게를 들어올리려는 의지에 있어. 도도는 멸종되었고 닭은 사육되고 있어. 가령 {길버트 그레이프}라는 영화에서 물풍선처럼 부푼 엄마가 일층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것도 나에겐 작은 비행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녀의 발 밑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듯 신음하던 목조계단보다 먼저 그녀는 죽어버렸지만 그것은 그녀가 감행한 일생의 모험, 낯설고 두려운 공기 위로 사뿐히 자신의 전존재를 던지는 비행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녀를 운구하기 위해 곤도라와 인부가 동원되었지만, 애초에 외출을 그만두고 정신없이 먹어대기 시작한 것은 다 슬픔때문 아니었으까? 그녀의 운구가 빠져나온 집도 화장되지만 ……그러니까 나는 그녀도 새는 새라고 생각해. 뚱뚱한 식욕보다 무겁게 그녀를 내리 누르는 중력, 슬픔. 경동시장통 신호등 위에 앉아 지나가는 차량 위에 하릴없이 똥이나 흘려대는 비둘기들. 가학의 도시에서 나보다 먼저 시민권을 얻은 저 권태의 새, 폭력으로부터 도망치는 길 그건 타락해가는 자신을 용서하는 길 뿐이야. 숙취의 아침 슈퍼마켓에서 내가 해장으로 빵봉지를 뜯을 때, 조건반사적으로 내 쓰레빠 주변으로 딴죽거리며 모여드는 너희들에게 나는 몇 조각 빵덩어리를 던져주며 생각해. 아주 오래 전 날기를 그만 둔 나의 조상님들을, 뒷통수를 긁적거리며 연신 새로운 빵봉지를 뜯고 있을, 등에 퇴화한 날개자국이 흉칙하게 남은 내 모습을. 미친 듯 고함치는 햇볕 속에서 간신히 간신히 광기로부터 벗어나 있는, 조금씩 배가 나오려고 하는 존재.
훌라후프를 돌리는 여자 / 이현승
당신은 훌라후프를 돌리네
당신은 유연한 허리를 가졌어
허리춤에서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당신은 여유만만하게 훌라후프를 돌리네
잡지를 보면서 TV를 보면서
당신의 훌라후프 솜씨는 뛰어나서
허리춤에 훌라후프를 매달고 내게 말을 거네
당신은 훌라춤을 추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신상품을 광고하는 나레이터 모델 같기도 하네
원래 그 자리에서 돌고있는 행성처럼
당신의 훌라후프는 변함없이 돈다네 그럴때면 나는
훌라후프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해보네
내가 당신의 원안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어 훌라후프를 돌린다면
이건 좀 변태적이지 훌라후프는
쉬지않고 당신의 허리춤을 도네
당신의 허리는 참으로 유연하다네
유연한 당신의 허리
유연한 당신의 훌라후프
당신은 TV를 보며 깔깔거리다
그렇지않아? 말을 건네네
유연함이 바로 당신의 무기라네
유연한 허리를 위하여
당신은 훌라후프를 돌리고 나는 그것을 보네
밝은 방* / 이현승
아버지가 나를 낳은 것은 36살 때이다. 아버지의 가장 오래된 사진은 제대 기념사진이다. 지금은 이미 백발이 된 아버지가 군모를 삐딱하게 착용한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우들과 카메라 앞에 선 육군하사 이 하사는 웃고 있다. 웃는 군인의 윗입술이 Ⅴ자 모양으로 패여 있다. 굶주림의 흔적만이 시간을 가로지르고 있다. 어디선가 구멍이 뚫린다. 밝은 빛이 쏟아진다.
배고픈 시절이었다. 젊은 군인의 아내는 고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결혼 직후 입대한 젊은 군인은 그의 아내에게 삼 년 동안 거의 일주일 간격으로 쉬지 않고 편지를 썼다. 쉼없는 연서 때문에 아내는 시어머니로부터 눈총을 샀고, 또 너무 바빠서 답장조차 쓸 수 없었지만, 새벽부터 밤까지 고된 일로 허리가 녹을 젊은 아내의 눈매를 그리며 편지를 썼다. 그들이 함께 아이를 낳아 키우고, 누에를 치고, 논을 갈고, 그리고 함께 배가 고픈, 노랗게 바랜 시간들
아무도 부모의 어린 시절을 만날 수는 없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 26살의 젊은 군인이 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 도대체 이 밝은 빛은 어디서 뿜어져 나오는 것인가.
* {카메라 루시다} : 롤랑 바르트의 사진에 관한 노트
仲秋 부근 / 이현승
양계장집 사내는 대머리
벌어진 어깨 근육이 잘 발달된 사내는
60가까운 나이가 무색할만큼 건장하다
사내는 양계장 옆에 개를 키울 생각이다
충성스러운 동물들은 밤마다 컹컹 짖어댈 것이다
인부들과 함께 새로 들여온 자재를 옮기다
우리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뛰어오는
사내의 얼굴과 몸이 땀에 젖었다
스물 넷인가 그쯤
사내의 아들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렸었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일요일 오후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사내와 사내의 아내는
거적을 둘러쓴 하얀 맨발을 보았고 지나쳤을 뿐
검은 제복을 입은 불안이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
사내는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었다
젊은 경찰관이 찾아왔을 때 그제서야 사내는
현관에 놓여있는 아들의 신발을 보았다
이미 차갑게 얼어붙은 아들이
이제 제 그림자를 어둠 속으로 풀어놓기 시작하는 나무 곁에서
떨어졌을 때의 모습 그대로 놓여있었다
사내도 사내의 아들도 외아들이었다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키워서 죽이기 위해
사내는 닭을 키우고 다시 개를 키울 것이다
작업중인 사내의 대머리에서 연신 땀방울이 샘솟는다
고인 땀들이 사내의 눈고랑을 파고드는지
약간 찡그린 웃음으로 사내는 악수를 받았다
조카는 서울에서 공부한다면서?
그래 건강이 최고다 잘 지내라
이거 어제 걷은 건데 신선할거야
건네진 달걀들은 오와 열을 잘 맞추어진 채 가지런하다
중추절이 가까운 가을의 햇살은 눈부시고 따갑고
사내의 머리에선 연신 땀이 솟고
사내는 눈가를 자꾸 훔친다
돌아서는 사내의 뒷통수가 계란과 닮았다
'문예지당선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20회 [열린시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지문 -임미리 (0) | 2008.09.29 |
---|---|
2008년 <시와시학> 포엠토피아 신인상 당선작_조영민 (0) | 2008.09.16 |
북청(北靑) 물장수 / 김동환 (0) | 2008.07.24 |
김연아 / <현대시학> 제17회 신인작품공모 당선작 (0) | 2008.07.14 |
<현대시> 2008년 상반기 신인추천작품상 당선 _ 최형심,조혜은 (0) | 2008.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