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당선작

[200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이층에서 본 거리 / 김지혜

자크라캉 2008. 3. 18. 14:02

 

 

사진<안용일의 블로그>님의 블로그에서

 

[2001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층에서 본 거리 / 김지혜

 

1

 

  모시 반바지를 걸쳐 입은 금은방 김씨가 도로 위로 호스질을 하고 있다 아지랑이가 김씨의 장딴지를 거웃처럼 감아 오르며 일렁인다 호스의 괄약근을 밀어내며 투둑 투둑 흩뿌려지는 幻의 알약들

  아 숨이 막혀, 미칠 것만 같아

  뻐끔뻐끔 아스팔트가 더운 입김을 토하며 몸을 뒤튼다 장딴지를 감아 올린 거웃이 빳빳하게 일어서며 일제히 용두질을 시작한다 한바탕 대로와 아지랑이의 질펀한 정사가 치러진다 금은방 김씨가 잠시 호스질을 멈추고 이마에 손을 가져가 짚는다 정말 살인적이군, 살인적이야

  금은방 , 정오를 가리키는 뻐꾸기 시계의 추가 늘어져 있다

 

2

 

  난간, 볕에 앉아 졸고 있던 고양이가 가늘게 눈을 뜬다 수염을 당겨본다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한다 등을 활선처럼 구부린다 앞발을 쭈욱 뻗으며 온몸의 털을 세워본다 그늘은 어디쯤인가 幻想은 어디쯤인가 졸음에 겨운 눈을 두리번거린다 난간 아래에 굴비 두름을 줄줄이 꿴 트럭 한 대가 쉬파리를 부르며 멈춰져 있다 백미러에 반사된 햇빛이 이글거리며 눈을 쏘아댄다 하품을 멈춘 고양이, 맹수의 발톱을 안으로 구부려 넣는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선을 거두고 어슬렁, 난간 위의 시간으로 발을 뻗어본다 빛의 알갱이들이 권태의 발끝에 채여 후다닥 흩어진다 권태가 이동할 때마다 幻想도 한 걸음씩 비켜선다 이윽고 권태가 지나간 난간 위로 다시 우글거리며 모여드는 햇빛,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쩌억쩍 하품을 뿜기 시작한다

 

3

 

  건너편의 창. 적색 커튼이 휘날리고 있다. 시간이 들고난 것처럼 휑하다. 안은 보이지 않는다. 일몰 쪽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 동굴 같다. 그러나 그 동굴에도 전등 켜지던 밤이 있었다. 불 밝힌 창 아래에서 토악질하던 사내. 목구멍에 검지를 집어넣고 속을 뒤집고 있었다. 돌아가 잠들기 위해 영혼을 뒤집던 사내는 전신주처럼 깡말랐었다. 깡마른 영혼들이 분주하게 오가던 골목은 그러나 이제 텅 비워져 있다. 깨진 유리창. 찢겨 울부짖는 적색 나일론 커튼. 절벽처럼 캄캄해지고 절벽처럼 늙어가는 창. 영영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아직 닫히지 못한 창을 나는 바라보고 있다. 창도 그런 내가 끔찍할 것이다. 영원히 다물리지 않을 것만 같은 입구들이 키를 쥐고 있음을. 그 안엔 환상도 캄캄하리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창의 건너편에서 나는 매일 꼼짝 않고 있으므로.

 

[감상]

 시계추 늘어져 있는 정오, 달아오른 아스팔트에 호스로 물을 뿌리는 사내의 장딴지를 더운 김이 감고 오른다. 호스를 누르고 있는 금은방 사내의 손에 호스는 괄약근처럼 투둑 투둑 물방울을 밀어낸다. 햇빛에 빛나는 물방울은 幻의 알약들이다. 시를 읽다보면 한바탕 대로에서 벌어지 대낮의 정사와 정오의 숨막히는 더위에 덩달아 숨이 차오른다. 구체적인 질감이 느껴지는 즉물적인 묘사들이 시를 돋보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