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세월붕어>님의 블로그에서
흰 종이라는 유령 / 유홍준
흰 종이를 만드는 제지공들은
눈이 쉬
나빠진다, 시력이 쉬 간다
흰것- 유령처럼 흰 것을 너무 많이 보고 살았기 때문
그러므로 무색무미무취
제지공들의
삶은
무늬가 없다, 그림자가 없다, 화면도 자막도 없는 스크린이다
묻는다, 누가 홀로 극장도 아닌 공장에 앉아
날이면 날마다
여덟 시간씩
화면도 자막도 소리도 없는 무無의 스크린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겠는가
그대가 만약
온통 흰 빛 뿐인 세상을 흰 열차를 타고 지나가게 된다면?
무료하고 지겨워라, 이내 눈을 감고 잠이나 청하겠지
그러나 밥은 무서운 것이기에,
오늘도 제지공들은 지친 몸을 일으켜 출근을 한다, 종이를 만든다
이렇게 점점 더
근시가 되어 가는데도
두 눈에 백태 낀 제지공들은 흰 것만 바라보고 산다, 흰 유령만 바라보고 산다
- 『현대시』 2005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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