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속 詩

정육점 여주인 / 진은영

자크라캉 2007. 10. 16. 13:43

 

 

 

사진<내사랑일동면>님의 카페에서 - 옛날 도살장

 

육점 여주인  / 진은영

        
유리창 밖으로 붉은 눈발 날린다
커다란 칼을 들고 다정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수소를 힘껏 내리치던
때가 있었지, 요즘엔 아무 일도 없다
냉기로 달아오르는 난로 옆에서 그녀는 중얼거린다
천장에 오래 켜놓은 형광등이 깜박인다, 칼은 녹슬었고

오늘 밤에는 들판에 나가야겠다
풀 먹인 하얀 앞치마에 가득히 떨어지는 별을 받으러.
장미 성운에서 온 것들이 쇠 다듬는 데 최고라니까
그녀는 왼쪽 유방의 부드러운 뚜껑을 열고
하얀 재를 한 움쿰 쥐어본다

유리창 밖 풍경은 거대한 얼음 창고 안에 갇혀 있다
눈보라 속 나무들이 공중에 냉동고기처럼 검게 달려 있고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가며 그녀는 바라본다
붉은 눈송이들이 녹아 흐르며
피범벅된 송아지 같은,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물렁물렁한 세계를.
미리 갈아놓은 칼로 겨울의 탯줄을 끊어야 한다
길고 부드러운 혀로 떨고 있는 어린 것을 핥아주는 일.

여자가 성에 낀 유리창을 활짝 연다
눈이 그치고 맑은 하늘에 토막 난 붉은 구름 떠간다

 

 

진은영 시집 <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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