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발표작

구부러진 것들 / 박해람

자크라캉 2007. 9. 5. 13:06

 

 

                                        사진<추억의 복분자>님의 블로그에서

 

부러진 것들 / 박해람

 

오후가 되면 저녁이 내쪽으로 휘어져 온다

바람이 펴지듯 내게 불어오고

나무들은 빈 길을 흔들어 구부리고 있다

가령.

 

차 열쇠를 하수구에 빠트리고 주변의 구부러진 것들을 찾을 때가 있다

녹슨 철사를 들고 몸을 구부리는 일

차 열쇠를 어느 틈에 빠트리듯

한 때를 어느 틈에 끼워 놓고 찾을 때가 있다

 

휘어진 내가 다만 낭창 펴진 것분이라고

점점 구부러지는 동안

처음의 길이 곧 뒤돌아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

 

구부러진 음파를 반 듯 펴는 첨탑의 역할이 다시

구부러진 말들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어느 지점까지 따라오다

등뒤에 풍경이 되는 것들을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울음이 다 휘어져 있는 것처럼

 

어설프게 구부러진 그 끝에 아슬하게 걸려있는 날들

끝과 끝이 닳아 있는 것은 되짚는 것밖에는 달리 없다는 것.

점점 무뎌진다는 것.

 

저 먼 곳까지

위태하게 뻗어나갔다가 다시 내게 구부러져 돌아오는 생.

그 안온한 끝이 다시 처음이라는 끝과 만나서

서로 터지고야 말 접점.

마중의 날도 歸老의 날도 서로 닿는 순간 사라진다는 것.

결국 끝과 끝은 만나지 못한다는 것.

 

저 구부러진 길 위에서 구부러진 지팡이를 짚고

다 구부러진 할머니가

마지막 쓸모를 쓸쓸히 견디고 있는 중.

모든 마지막은 중간쯤이라는 것이지

 

 

2006년 <시와세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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