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WWW에 대한 욕망론적 접근 / 김 봉 섭 (경희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자크라캉 2007. 7. 25. 14:04

WWW에 대한 욕망론적 접근

- 라캉의 ‘타자의식’을 중심으로 -



김  봉  섭

(경희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1. 들어가는 말

 

2. WWW의 개념과 특성

 

3. 라캉의 타자 의식

  (1) 상상적 타자

  (2) 상징적 타자

 

4. WWW와 타자의식과의 관계

  (1) 즉시성

  (2) 매체상기성

 

5. 결론을 대신하여


1. 들어가는 말


  인터넷만큼 인류의 생활방식을 급격히 변화시킨 도구는 드물다. 불과 30여년 사이에 인터넷은 탈중앙집중화를 가속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전자민주주의의 출현을 가능케 하였으며, 공간이동을 통한 글로벌화를 가져 왔다. 또한 물질의 폐위를 가져와 기술, 경제학 그리고 민족정치에 있어서 물리적 지원 형태의 부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상실시키고 정신의 힘을 부각시켰다.1)

  인터넷으로 인해 엄청난 정보 폭발과 무한대로 사회적인 관계가 확장되면서 사회구조가 뒤바뀌고 있으며 새로운 지적 테크놀러지와 기계적 테크놀러지가 더 중요해짐으로써 경제의 중심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적인 규범과 도덕적 가치 또한 급격한 변화의 흐름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데카르트적인 이성으로서의 자아를 급격하게 해체시켜 자아의 정체성 위기를 조장하고 있으며 판티옵콘(‘감시와 처벌’에서 푸코가 길게 논의했던 감옥설계)의 모델에 의한 새로운 감시사회(surveillance society)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현실적인 설득력을 얻고 있다.2)

  그러나 여전히 인터넷에 대한 논의는 히피의 자유분방한 정신과 여피의 기업가적인 열망이 뒤죽박죽 결합된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일종의 새로운 제퍼슨식 민주주의(Jeffersonian democracy)의 창출을 꿈꾸고 있으며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기술애호광(Technophilias)들이 인터넷의 주류임에는 틀림없다.3)

  인터넷의 이러한 불같은 확산에 기름을 끼얹었다고 할만한 것이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 : 이하 WWW 혹은 웹)이다. 인터넷은 대학교나 컴퓨터 관련 종사자들의 전유물에서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보편적인 도구로 탈바꿈시킨 것이 웹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표현이 전혀 과장은 아니다4)

  한편 웹의 등장은 인터넷에 있어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텍스트만으로 구성된 서비스를 제공했던 웹에서 이용자나 사용자에게 그림이나 오디오 등을 전달할 수 있는 웹의 등장은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웹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오늘날과 같은 인터넷의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인터넷의 발전에 있어 웹의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다.5)

  이처럼 WWW에 대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업계에서뿐만 아니라 학계에서조차 지금까지 웹에 대한 연구는 웹의 기능적인 부분에 치중해온 것이 사실이다. 즉, 이재현은 WWW의 특성으로써 웹이 지니고 있는 하이퍼텍스트성으로 인해 텍스트의 비선형적 속성, 전지구적 범위, 그리고 다양한 미디어로부터 가져온 이미지들의 이용 등을 들고 있다.6)

  윤준수의 경우에는 WWW의 특성을 크게 멀티미디어적 특성과 하이퍼미디어적 특성으로 구분하고 WWW의 멀티미디어적 속성으로는 최소한 하나의 시스템으로 동시에 둘이상의 미디어를 사용하고, 상호작용성을 충족시키며 시스템을 활용하고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멀티미디어적 특성을 충족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이퍼미디어적 특성으로써 WWW은 다량의 정보를 하이퍼링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며, 멀티미디어를 지원하고, 검색시스템과 하이퍼미디어 엔진을 지원하며 적합한 저장시스템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7)

  이와 같은 논의로 볼 때 앞서 언급한 대로 지금까지 WWW에 대한 연구가 기능적인 부분에 치우쳐 있으며, 수용자의 관점이 아니라 정보제공자의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연구의 편중성은 자칫 WWW에 대한 진정한 사회적 함의를 도출하는데 편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논의와는 별도로 수용자 관점에서 새롭게 WWW를 고찰해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WWW은 지금까지 연구자들의 논의처럼 결코 일방향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웹은 수용자의 관점에서 보면 현상에 대해 형태를 부여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이러한 욕망은 부분적으로 정신분석에서 주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WWW에 대한 새로운 접근에는 정신분석학이 적합하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정신분석학은 존재의 결핍 혹은 실존적 공허에 시달리고 있는 주체, 달리 말해 분열된 주체가 타인들과 세계 속에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이상적’인지를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8) 그중 에서도 라캉의 타자 의식 특히 상상적 타자와 상징적 타자는 이용자들이 웹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 지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하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라캉의 타자 의식과, 수용자와 WWW와의 관계를 ‘은유’하여 봄으로써 WWW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도출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위해 먼저 웹의 개념과 특성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라캉의 타자 의식 즉, 상상적 타자와 상징적 타자 개념을 고찰하며, 이를 웹이 구현하고자 하는 즉시성(Immediacy), 매체상기성(Hypermediacy)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 지를 추론함으로써 웹에 대한 이용자의 욕망을 살펴 볼 것이다.



2. WWW의 개념과 특성


  웹은 현재 인터넷상의 정보서비스 중 가장 많이 이용되는 서비스의 하나로 기존 인터넷상의 서비스 통합이라는 면과 함께 새로운 인터넷 서비스 및 통합된 인터넷 서비스 이용 환경으로의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인터넷상의 서비스의 통합과 통합된 서비스의 이용 환경이라는 면은 웹브라우저를 통하여 아래의 <표1>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9)


<표1>웹으로 가능한 인터넷 서비스의 종류

Gopher로 제공되는 모든 service

WAIS(Wide-Area Information Servers)로 제공되는 모든 service

annonymous FTP sites에서 제공되는 모든 service

Archie(a FTP search service)의 모든 service

Veronica(a Gopher search service)의 모든 service

CSO, X.500과 whois(Internet phone book service)의 모든 service

finger(an Internet user lookup program)의 모든 service

Usernet에서 제공되는 모든 service

telnet으로 접속할 수 있는 모든 곳

hytelnet(a hypertext interface to telnet)으로 접속할 수 있는 모든 곳

techinfo나 texinfo(forms of campus-wide information services)로 접속할 수 있는 모든 곳

hyper-g(a networked hypertext system in use throughout Europe)의 모든 service

man pages의 형태로 있는 모든 것

HTML-형태의 hypertext와 hypermedia documents

  ※ 윤준수, 인터넷과 커뮤니케이션 패러다임의 대전환, 커뮤니케이션북스, 1998, p81 표 참고


  이러한 웹은 첫째, 다른 문서로 연결되는 닻들이 본문 속에 들어 있고 둘째, 그래픽, 오디오, 비디오 등 어떤 것도 들어올 수 있으며 셋째, 지구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웹을 지탱하는 세 주춧돌은 문서를 작성하는 HTML(Hypertext Markup Language), 문서를 연결시키는 시스템인 HTTP(Hypertext Transfer Protocol), 문서의 주소와 위치를 알려주는 시스템인 URL(Universal Resource Locator)이다. 이중 특히 URL은 단순히 컴퓨터와 컴퓨터를 연결하던 IP의 수준을 한 차원 넘어 서로 다른 컴퓨터들 속의 문서들을 바로 연결하는 진보를 가능하게 했다.10)

  한편 웹이 가장 혁명적인 이유는 두가지다. 하나는 개방적이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상호작용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TCP/IP를 탑재한 컴퓨터라면 어디에서나 접속이 가능하며, 모두가 정보제공자이자 이용자로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한다는 사실이 웹을 가장 혁명적으로 만든 것이다.11)

  그중 에서도 상호작용성은 송신자에 의한 일방적인 기표 설정을 방해하고, 서로간의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이질적인 기표를 교환하도록 만든다. 그 결과 어느 한 지점에 의해 일방적으로 통제당하거나 코드화되지 않으며, 스스로의 의지와 개성에 맞는 기호체계와 담론체계를 형성하게 된다.12)

  또한 웹에 동원되는 멀티미디어적 요소와 그 발전의 양상을 살펴보면 머지 않은 장래에 웹상에서도 하이퍼미디어가 지향하는 무봉합성(seamless)이 기술적으로 실현되리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웹에서 구현되는 멀티미디어적 속성이란 “텍스트를 통한 경험에 시각적, 청각적 능력을 재통합시키고, 언어적 기호에 그래픽 이미지와 사운드 동영상을 연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향은 “우리의 정신이 오감으로부터 받아들인 정보를 종합하는 과정과 유사하며, 이제는 촉각, 미각, 후각을 통합하여 하이퍼미디어 개념”을 완성하는데 있다. 결국 멀티미디어적 요소를 적극 수용하는 하이퍼미디어의 궁극적인 목적이 정보생산자의 경험으로부터 정보이용자의 경험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미디어가 개입된 이음새을 없애는데 있다면, 현재 웹상에서도 이 같은 기술이 구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13) 따라서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위계관계를 없애고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한다는 상호작용성과 무봉합성으로 인해 이용자는 WWW를 투명한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즉, 웹은 즉시성(immediacy)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를 근거로 이용자에게 WWW는 투명한 존재로써 동일시의 대상이자 욕망의 동인이 되는 상상적 타자로써 추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웹은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매체를 지속적으로 재매개하거나 차용한다. 특히 책, 그래픽, 그림 그리고 사진들과 같은 것에 대한 재매개가 가장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의 목적은 고전적인 텍스트의 순수한 구어적인 버전들을 수집하는 것이다. 이 사이트는 텍스트와 유사하게 그래픽적인 장식이 거의 없다. 웹카메라에 있어서도 1997년 화성탐사선이 웹사이트를 통해 보여준 그림은 단지 바위나 토양의 측정과 사진을 찍기 위해 분당 2피트 이내의 속도로 움직이는 행성의 표면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첫날 이 사이트에 접속하였다. 지리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대중들은 이처럼 미디어가 제공한 현실에 의해 환상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14) 여기서 이용자들은 WWW를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미디어에 의해 매개된 대상으로 인식한다. 즉 웹은 매체상기성(hypermediacy)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웹은 상징적 타자에 의해 매개된 존재로 추론할 수 있게 된다. 즉, 상징계속에서 웹은 아버지에 의해 소유된 ‘비천한 대상’15)이며, 웹을 매개하고 있는 미디어16)는 상징적 타자로써 아버지의 은유인 것이다.


<그림1> WWW에 대한 관점의 흐름

* 윤준수, 강태완의 WWW와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에 대한 정의를 기준으로 재구성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여 WWW에 대한 새로운 접근인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우선 WWW의 상호작용성을 통해 웹은 즉시성을 구현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용자들은 웹을 상상적 타자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상호텍스트성을 통해서 웹은 매체상기성을 추구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용자들은 웹을 상징적 타자에 의해 매개된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전제하였다. 이제 이 개념들에 대해 보다 자세히 고찰해 보자.



3. 라캉의 타자 의식


 (1) 상상적 타자


  상상계는 거울 이미지, 동일시17), 상호작용의 계이다. 이 계에서는 개인이 타자를 기쁘게 만들려고 할뿐만 아니라, 자신의 타자성을 용해시켜 동일시의 상대가 되려고 한다. 상상계 속에서는 자아를 탄생시켰던 원래의 동일시적 과정이, 사람과 사물이라는 외부 세계와 그 개인의 관계를 통해 반복되고 강화된다. 또한 상상계는 절망적이고도 망상적인 시도의 장이다. 이때 개인은 동일성, 유사성, 자기복제성의 많은 사례들을 자기에게 집중시켜 ‘자기 자신’이 되고 싶어하고 또 그 상태에 머무르려고 한다. 상상계는 나르시시즘적인 ‘이상적 자아(Idealich, moi ideal)가 탄생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여 라캉의 상상계는 내부를 향한 정신적 행위와 외부를 향한 정신적 행위 사이에 다리를 마련한다. 이것은 또 지각의 대상에게도 소속되는 계이고, 나아가 일상적인 말에 의해 그 단어(내면의 대상을 가리키는)를 보존하는 내면의 대상에 소속되는 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상상계라는 단어에는 경멸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계에서 주체는, 제멋대로이고 비난받을 만한 방식으로, 생성의 흐름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제거시키려고 한다.18)

  이러한 주체 구성의 초보적 단계인 상상적 단계의 특징은 이른바 거울단계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거울 단계는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유아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영상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아이는 동물과 달리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지각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반응한다. 이러한 환호성 반응은 어린아이가 타자, 즉 거울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자신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거울단계 이전까지는 자신의 몸이 조각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아이가 거울을 통해 자기 몸의 통일성을 확인하고 매우 기뻐하는 환호성 반응은 어린아이가 거울이라는 타자를 통해 ‘이상적 자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상적 자아’란 타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자신을 인식하는 거울단계의 주체 혹은 자아개념을 말한다.19)

  이러한 환호성 반응을 통해 출생의 첫 울음과 더불어 출현한 욕망은 구조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선취와 이상화라는 두 계기를 암시한다. 6~18개월된 어린아이는 이 계기 속에서 자신의 상뿐만 아니라, 어떠한 결핍도 없는 완전한 무엇을 본다. 대상을 투명한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자아에 대한 완벽한 재현이라고 ‘기만’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속에서는 어린아이의 운동감각기관의 미성숙도 은폐되는데, 이는 어린아이가 제3자의 ‘인정하는’ 시선을 통해 자신이 완전하다는 인상을 받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20)

  이때까지 아이는 아직 자신과의 통일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머니를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존재로 인지하지 못한다. 반복되는 상호작용을 통하여 어린아이는 차츰 어머니를 자신과 구별할 수 있으며 그녀를 자아가 아닌 타자로 경험한다. 거울단계는 이러한 결정적인 순간을 지시하고 있다.21) 따라서 거울단계는 어린아이가 인식하지 못하는 일종의 착각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린아이가 거울단계를 지나면 아이의 지각을 구조짓는 것은 언어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를 반갑게 대하는 제3자나 혹은 어머니의 목소리, 제스처 등이 어린아이의 지각을 구조짓는다. 이들 제3자나 어머니는 이렇게 자신의 욕망을 표현한다. 그들은 어린아이 속에 그들의 욕망을 체화시킨다.

  어린아이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자신이 존재하며 자기 스스로를 느끼고 있다는 확신감은 원초적으로 그를 보살펴 주는 사람, 간단히 말하면 어머니를 통해서 중재된다. 어머니의 온기, 얼굴, 목소리, 피부, 시선 등은 어린아이의 성장을 위해서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필요하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신체와 팔, 다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를 통해서 경험한다. 여기서도 어머니는 전혀 매개되지 않은 독립된 주체로써 인식되어 투명한 존재로 기능하게 된다.

  한편 정신분석학자들은 두가지 어머니를 구분한다. 상상속에서 나타나는 상징적인 어머니, 그리고 유아의 요구, 욕망, 욕구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의 어머니이다. 상징적인 어머니는 유아를 위해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타자의 정신적인 구축물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기억의 산물 혹은 유아와 어머니 사이에 주요한 관계로서의 회고의 산물이다. 반면 실재의 어머니는 완벽한 단일체이며, 유아의 요구에 만족을 제공하는 본래의 어머니인 것이다.22)

  이러한 실재의 어머니는 주체가 분열될 때 잃어버린 대상이다. 그것은 명명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대상a는 어머니의 결여를 메우기 위해 아이가 되고 싶어하는 남근이다. 그리고 대상a는 주체 자신의 결여를 상징적으로 메워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상a는 욕망의 원인이다. 대상a에 의해서 욕망이 영속화된다. 그것은 또한 요구를 통해 이 기표에서 저 기표로 욕망을 끝없이 미끄러지게 한다. a는 의미로부터 벗어난 것에 대한 상징이다. 그것은 기표의 영역에서 없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상실에 저항하는 것은 이름을 부여받은 주체이다.

  보다 근원적인 단계에서도 a는 신화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여전히 근본적인 결여의 대상이다. 태어날 때 어린아이는 어머니로부터 분리되면서 근본적인 결여를 경험하게 된다. 대상a는 또한 일반적으로 본능의 부분대상(젖꼭지, 가슴)이기도 하다. 이 부분대상에 의해서 결여의 대상이 대체된다. 그리고 본능의 부분대상이 주체 자신과 병합된다.23) 하지만 이 결여는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다.

  한편 상상계 속에서의 주체는 보기만 하는 존재로 착각한다. 보기만 하는 시선은 평면시각이다. 주체는 시선을 통해 실체와 일치시킬 수 있다고 욕망한다. 어거스틴의 책에는 아이가 느끼는 부러움이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서 부러움이란 단어는 본다(videre)에서 유래되었다. 어거스틴의 책을 보면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행복하게 젖을 빨고 있는 동생을 형은 갈기갈기 찢을 것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어머니의 젖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동생의 행복을 부러워한다. 자신의 결핍을 떠올리게 하는 완벽한 이미지 앞에서 아이는 창백하고 떨리는 눈으로 동생을 보고 있는 것이다.24) 시선의 개념을 그림으로 옮겨 보면 <그림2>와 같다.

  결국 주체는 최초의 거울단계를 통해서 상상적 타자를 투명한 대상으로 착각한다. 거울단계 이후에는 거울 다음의 상상적 타자인 어머니를 완벽한 단일체로 착각함으로써 투명한 존재로 기만25)한다. 따라서 주체는 상상적 타자와의 동일시와 합일을 시선으로 욕망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림 2> 상상계에서의 시선

        a

 

 

결핍의 주체

 $→$◇a

 

            

 

            

 

 

 

           ※권택영편, 욕망이론, 문예출판사, 1993, p33 그림 참조



 (2) 상징적 타자


  상징계는 고정보다는 유동, 유사성보다는 상이성을 강조하는 움직임의 영역이다. 언어의 영역, 무의식의 영역, 타자로 남아 있는 타자성의 영역이기도 하다. 또한 상징계는 자아와는 다른 주체가 탄생하는 곳이고, 또 그렇게 탄생한 주체가 늘 분리되고 중단되는 존재의 양태를 획득하는 곳이다. 상징계에서는 부재라고 추정되는 바탕 위에서만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으며,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한다. 결여는 충만 못지 않은 의미화의 위력을 갖고 있으며, 양자(결여와 충만)는 상대방의 도움이 없으면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상상계에 머무는 사람이 타자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그 타자를 동결시키고, 축소시키고 또 흡수하기 위한 것이지만, 상징계는 상호주체적이고 또 사회적이다. 상징계는 공적인 것(res publica)으로서, 그 구성원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되려는 것, 그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것, 자신의 이미지 속에서 자신의 너머에 있는 것을 재창조하려는 것을 금지시킨다.26)

  대략 말한다면 라캉에게 있어서 상징계란 언어, 개념체계, 그리고 이것들 속에 용해되어 있는 문화적 규율을 뜻한다. 사람은 항상 언어와 규율의 세계 속으로 태어난다. 상징적 질서는 각 개인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라캉은 상징적인 것을 단순히 현실 또는 물질의 반영이 아니라 자체로 어떤 물질성을 가지는 것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좁은 의미의) 물질만이 물질이 아니다. 이념이나 규율도 ‘구체적인 사회 제도’ 속에서 인간의 행위를 유발시키는 사실적 힘을 갖고 있다. 이 사회 제도들을 성립시키고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이라는 의미에서 상징적인 것이 ‘물질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어떤 체계 또는 질서를 구성하는 각 항목들이 서로 간의 차이에 근거해 성립될 때 우리는 이를 상징계라고 부른다. 상징계를 구성하는 각 항목의 의미 또는 동일성은 다른 항목들과의 차이, 이들의 부재를 통해 주어진다. 즉, 각 항목은 서로 상대방을 경유함으로써만 자기 자신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이 이루는 전체는 조화로운 전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순환적으로 서로에 의존하는, 요동하는 전체 즉 비전체 이다. 상징계를 구성하는 각 항목들은 상대방을 통해(상대방을 지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결핍을 채우려-또는 의미를 고정하려- 하지만 자신의 존재 결핍을 채워줄 상대방 역시 존재 결핍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상징계에서 각 항목은 상대방이 겪고 있는 존재 결핍을 체현하고 있을 뿐이며, 따라서 그것은 상대방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결핍을 돌려받는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단어나 상징-기호-의 의미는 다른 단어나 상징과의 차이를 통해 주어진다는 것이다. 기호들 간의 차이가 개별적 기호 내지는 완결된 의미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한다. 그러므로 차이(자체)를 표현하는 상징(기호)은 존재하지 않는다.27)

  한편 라캉이 상징계에서 강조하는 것은 매개기능이다. 상징계의 매개를 통하지 않은 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상과 같은 관계를 타자와 맺게 되면 그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한다. 이 상징계는 ‘진리’와 ‘거짓’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라캉은 생각했다. 라캉은 여기서 대타자(das Andere)와 상상계적 소타자(das imaginar andere)를 구분하는 이론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대수학에서 이를 A와 a로 표현한다. 대타자는 기표, 믿음, 진리의 장소를 만든다. 그것은 무의식과 욕망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대타자 안에 기표들의 기표인 팔루스적 기표가 영향을 행사한다. 이 팔루스적 기표는 상상의 여로를 통과하여 의미에 도달한다. 순수히 시각적인 것에만 묶여 있던 상상계는 기표의 잠재력과 만남으로써 승화한다.28)

  한편 자기 자신과 타자, 특히 자기 자신과 어머니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상적 동일시가 거울단계의 특징이었다면, 상징계는 언어의 습득 및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함께 상상계의 2자적 관계에 아버지가 출현한다. 아버지의 출현은 어머니와의 상상적 관계에 빠져 있던 환상을 파괴하면서 아이를 상징적 질서에 편입시킨다. 상상적 단계의 아이에게는 어머니가 가장 중요한 동일시의 대상이요, 최초의 욕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상징계에 진입하면서 아버지가 핵심적 욕망의 대상이 된다.

  아이는 원래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기를 원한다. 어머니의 욕망을 원하는 것이다.29) 한편 어머니가 자식을 상징적 질서 속으로 이끈 다는 것은 직접적인 육체적 존재로부터 자식을 떼어놓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의 구조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타자로 향하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며, 초기단계에서 이것은 어머니로부터 돌아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가 이것을 견딜 수 있거나 혹은 그녀의 욕망이 제3자를 향하게 됨으로써 더 이상 자녀를 소유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녀는 자식이 타자로 향하는 것을 오히려 장려할 수 있다. 이 제3자의 이름으로 그녀는 자식을 자기 품에서 떠나보내는 것이다. 라캉에서 이 분리작용을 은유적으로 체현하는 제3자는 아버지이다. 여기서의 아버지는 따라서 생물학적 기능을 하는 아버지가 아니다. 어린아이는 아버지의 육체속에서 이러한 개념이 체화되어 있음을 본다. 제3자로서 아버지는 어머니와 자식이라는 둘만의 관계를 깬다.

  즉, 어머니는 자신에게 없는 남근을 욕망하고, 남근을 아버지와 연관시키기 때문에 아버지를 욕망한다. 따라서 어머니를 향한 아이의 욕망은 이제 어머니가 욕망하는 아버지를 욕망하기에 이르고, 그래서 욕망의 대상이 어머니에서 아버지로 치환한다. 결국 아버지가 주체 구성의 과정에 결정적 기표로 군림하게 되고, 따라서 라캉의 주체구성 이론에서는 언어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항상 함께 작용한다.

  이러한 상징적 단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위협이 상징하는 인정의 박탈위협을 통해 아이로 하여금 상징하는 초자아를 형성케 하여 사회문화적 질서에 순응하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억압된 욕망이 무의식을 형성하게 되므로 욕망은 우리가 상징적 질서에 머무는 한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30)

  한편 상징계는 어린아이가 일단 어머니로부터 받은 하나의 선물이므로, 어머니는 타자라는 것의 최초의 대표자가 된다. 처음부터 어머니는 타자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이러한 의미 부여를 어린아이에게서 실현한다.31)

  그리고 상징계의 차원에 위치해 있는 주체는 거울단계 이후로, 역시 상상계의 차원에 놓여 있는 대상a 속에서 자신의 근거를 찾는다. 주체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 있고 다른 사람을 요구한다는 사실 속에서, 그리고 특히 남김없이 완벽히 충족되는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속에서 자신의 결핍을 경험한다. 그는 또한 타자 속에서 타자의 결핍과 다시 만나게 된다. 이것이 모든 인간관계의 드라마가 지닌 구조이다.32)

  한편 상징계에서는 보기만 하는 시선이 아니라 보여짐을 강조함으로써 욕망하는 주체를 말한다. 보여짐을 강조하는 ‘응시’는 우리가 시야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신비로운 우연의 형태로 갑작스레 접하게 되는 경험이다. 응시는 거세공포에 의해 주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들어서듯 바라보기만 하던 것에서 보여짐을 아는 순간 일어난다. 그래서 실재라고 믿었던 대상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함을 깨닫고 다시 욕망의 회로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동인이다. 이를 표현하면 <그림 2>와 같다.33)

  이러한 상징적인 작용을 통해 주체는 그동안 투명한 존재로 인식했던 상상적 타자는 결코 투명한 존재가 아닌 매개된 존재로써 자신의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상징계에서는 새로운 욕망의 대상으로 상상적 타자를 매개하는 '상상적 타자의 타자'와 동일시를 욕망하게 되는 것이 상징적 타자의 주요 내용이다. 그러나 주체의 상징적 타자와의 동일시 욕망 역시 결코 완벽히 충족될 수 없으며 다만 ‘대리’할 뿐이다.


<그림 2> 상징계에서의 응시

응시

(빛의 점)

 

 

재현의 주체

 $

 

             이미지

 

             스크린

 

 

 

 

           ※ 권택영편, 욕망이론, 문예출판사, 1993, p33 그림 참조



4. WWW와 타자 관계이론


 (1) 즉시성(Immediacy)


  지금까지 우리는 거울단계에서 어린아이의 환호성반응은 어린아이가 타자, 즉, 거울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자신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보았다. 그의 자아는 외부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지각하는 주체와 그의 상을 구별할 줄 아는 관찰자에게만 적용된다. 어린아이는 처음에 이런 구별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거울에 비친 모습에 반하게 된다. 어린아이는 일종의 자기망각 속에서 이를 경험한다. 이 거울의 상이 거울을 바라보는 사람을 복사한 모습이라는 사실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드러난다. 그러고 나면 주체는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지 않고서도 자신 또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육체를 갖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된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자신의 모습을 머리 속에서 그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자신의 모사체에 대한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서 그는 신체를 움직여보고 얼굴도 찡그려 본다. 이로써 그는 거울의 상이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 다는 것을 확인한다.34)

  또한 우리는 거울단계에서 주체가 시선을 통해 대상을 본다는 것을 알았다. 즉, 바라보기를 통해 자아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Jay David Bolter와 Richard Grusin이 그들의 최근 저서 Remediation : Understanding new media(1999)에서 제시한 즉시성(Immediacy)과 동일한 논리이다.

  여기서 즉시성이란 그림을 그리는 캔버스, 사진, 영화, 등과 같은 매체의 현재성(presence)을 보는 사람이 잊도록 만드는 시각적 표현을 의미한다.35) 즉, 대상을 매개되지 않은 투명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즉시성은 디지털 미디어 특히 컴퓨터 게임의 경우에서처럼 미디어는 사용자의 의식에서 매체가 사라지고 사용자가 가상현실 속으로 몰입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미디어 경험을 마치 현실 자체의 경험인 것처럼 ‘생생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미디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실성을 더욱 더 강화한다. 이는 유아가 거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마치 자신이 완벽한 존재임을 착각하게 되는 경우와 매우 유사하다.

  한편 웹도 이러한 즉시성을 추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WWW은 몇단계를 거쳐 진화해 왔으며 각각의 단계는 초기의 미디어들을 재개조하였다. 오늘날 웹은 전기적이고 총괄적이며 그리고 우리가 이미 시각적이고 구어적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매체를 지속적으로 재매개하고 차용한다. 웹의 이러한 목적은 네트워크화된 상황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생생함과 유연성을 통한 즉시성의 추구에 있다.36)

  가령 인터넷 신문의 경우 그동안 인쇄신문이 정보제공자의 입장에서 일방향적이었다면 이를 매개한 인터넷 신문은 이용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더욱 생생한 현실을 창조해 나간다. 또한 이국적인 새의 목소리나 이국적인 풍경 등을 들려주거나 보여줌으로써 장소의 이동을 통하지 않고도 웹상의 현실로 이동할 수 있어 이용자에게 새로운 현실감을 제공하고 있다. 즉, 웹은 다양한 자연적 환경 가령, 인디애나폴리스의 새정원 에서부터 록키산맥의 전경에 이르기까지 자연적인 환경 속에 우리를 위치시킨다. 즉시성에 대한 이러한 논리는 미디어 자체는 사라지고 표현되어지는 곳으로 우리를 남겨놓도록 헌신하는 것이다.37)

  웹카메라의 경우도 TV의 재매개자로써 뿐만 아니라 웹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사회의 구석구석, 심지어 새장속의 햄스터, 고속도로의 교통상황 등에까지 웹카메라는 텔레비전과 비디오의 감시기능을 수행한다. 현재 웹과 인터넷 관련 서비스는 이러한 감시역할에서 TV와 경쟁하고 있으며 또한 대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제 전보다 더 가깝게 매일 일어나는 사건을 모니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TV방송에서는 불가능했던 상호작용성을 이용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 어떤 웹사이트에서는 이용자들이 스스로 카메라 각도를 조절할 수도 있다.38)

  이러한 웹의 상호작용에 대해 스톤은 WWW의 가상공간에서 사이보그의 열망은 육체의 재개념화를 수반하고, 이 육체는 매트릭스로 합쳐질 수 있는 육체라고 주장한다. 또한 클라우디아 스피링거는 인간-기계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것은 단순히 여성을 향한 갈망이 아니라 특별한 여성 즉, 어머니에 대한 갈망이라고 주장한다. 그녀에게서 매트릭스라는 말은 어머니와 자궁을 의미하는 mater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언어학적으로 스톤의 시각을 지지한다.39)

  이러한 매트릭스는 새롭게 어머니적인 육체로서 구조지워진다. 또한 매트릭스는 결핍을 생산하는 상징적인 것을 통하여 성적인 완전함으로 전제하는 정도에 따른 남근적인 법에 따라 작동한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을 획득하기 위해 물질은 이용자의 육체처럼 완전히 지워져야 한다.40) 결국 웹은 매트릭스로써 완전한 투명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2) 매체상기성(Hypermediacy)

  

  우리는 지금까지 거울단계를 벗어난 유아가 이제 욕망의 원인이었던 어머니가 아버지에 의해 소유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고찰하였다. 아버지는 사실 대타자의 타자이다. 즉, 상징적 타자인 것이다. 타자는 결국 명령하고 결과적으로 대타자를 소유한다. 그리고 그녀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이처럼 아버지는 성적으로 완전한 대상 즉, 지젝이 아버지의 향유라고 불렀던 것처럼 존재하는 것을 표상한다. 향유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법 즉, 팔루스적인 법에 굴복해야만 선물을 준다. 향유의 아버지는 또한 상징적인 질서를 통하여 성적인 완전함을 소유하는 실체임을 알았다.

  한편 부친살해 신화에서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향유는 최소한 하나의 주체(원초적인 아버지는 모든 여자를 소유하는) 즉, 완전히 향유할 수 있는 주체가 존재한다는 환상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향유는 상징체계 내에서 성적인 완전함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아버지는 상징체계의 타자이며 오히려 대타자인 것이다.41) 결국 라캉이 지적한 것처럼 상징계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유아와의 관계에서 다양한 매개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상징계에서의 주체는 보기만 하는 시선이 아니라 보여짐을 응시한 다는 것도 알았다. 즉, 주체는 매개된 시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고 이는 Bolter와 Grusin의 매체상기성과 매우 유사한 개념임을 보여주고 있다.

  Bolter와 Grusin이 제시한 매체상기성(Hypermediacy)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매체를 상기하거나 인식하도록 만드는 시각적 표현 스타일을 뜻한다.42) 이러한 매체상기성은 즉시성과 함께 서구의 시각적 표현을 지배해 온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즉시성이 매체 사용자의 존재를 지워버리거나 표현 행동을 자동적으로 만든다면, 매체 상기성은 표현 행동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가시적으로 만든다. 즉시성이 통일된 하나의 시각적 공간을 제공한다면, 매체 상기성은 다양한 이질적 공간들을 제공한다. 매체 상기성이 공간에서 보여주는 표현 방식은 다른 공간의 표현들이나 혹은 다른 미디어를 향해서도 열려 있는 창과 같이 기능한다. Bolter와 Grusin은 이것을 윈도화한 방식(windowed style)이라고 일컫는다. 이 방식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발달했다. 오늘날 매체 상기성은 WWW, 데스크톱 인터페이스, 멀티미디어 프로그램, 비디오 게임 등과 같은 디지털 미디어에서 윈도화나 시각적 표현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데스크톱 인터페이스의 경우 숙련된 사용자는 열 개 이상의 중복된 윈도를 한번에 여는 것은 보통이다. 윈도 안에서 텍스트, 그래픽, 비디오 등 다중적 표현은 다양한 이질적 공간을 창조한다.

  또한 매체 상기성은 매개(mediation) 기호들을 활용하여 인간의 풍부한 감각 기관을 재생시키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면 데스크톱 인터페이스의 다양한 아이콘, 막대, 버튼, 메뉴 등은 우리가 이것들을 클릭함으로써 우리에게 시각적 혹은 언어적으로 의미가 다양한 새로운 공간과 표현들을 펼쳐 보인다. 이처럼 매체 상기성은 때로는 미묘하게, 때로는 분명하게 미디엄 혹은 미디어를 의식하도록 만들고, 또한 즉시성에 대한 인간의 욕망도 상기시켜 준다.43)

  한편 웹은 여전히 초기의 미디어를 재매개하면서 매체상기성을 추구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자 문화적인 상징으로써 인터넷은 전신을 재매개한다. 비록 인터넷이 지표, 통신망, 초음파, 그리고 위성망을 통과하는 선들을 포함한 데이터의 다양한 연결을 포함하고 있지만 여전히 전신이 처음으로 19세기에 행했던 것처럼 산업사회를 뒤덮고 있는 전기적 선들의 직사각형으로써 우리는 인터넷을 인식하고 있다.

  현재 미국 의회 도서관의 기억 보전 프로젝트를 위한 웹사이트를 보면 문서, 인쇄물, 초기 사진, 또한 초기 필름, 그리고 녹취물 등을 포함하고 있다. 디지털화된 이미지의 샘플을 제공하며 그 자체만으로도 빌딩의 물리적인 공간을 반영하여 일정한 배열을 두는 화랑과 그리고 많은 가상 도서관들도 있다. 비록 인터넷이 애니메이션 뿐만 아니라 디지털 비디오 그리고 오디오 등을 전달할 수 있게 되고, 상호작용적이 되었지만 여전히 편지, 책 그리고 잡지 등을 재개조하고 있다. 또한 CD-ROM, DVD, 라디오, 영화, 그리고 TV 등을 재개조하며 재개혁하고 있다.

  한편 웹카메라도 투명성의 논리아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 또한 매체상기성을 인식시킨다. 각각의 웹카메라는 인터넷에서 물리적인 세계의 어떤 부분을 투명하게 만들기 위해 편집되지 않는 이미지의 흐름을 제공한다. 많은 카메라는 매일의 빛의 변화나 기후 등에서 나타나는 계절적인 변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변화가 없는 산이나 해변같은 자연적인 광경에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자연을 모니터하는데 있어서 카메라의 기능은 외국적이고 먼 곳에 대한 그리고 지난 백년동안 사진이나 필름에 의해 수행되어 왔던 서비스에 대한 접촉의 느낌을 이용자에게 두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maui에 있는 일련의 로봇 카메라는 60분의 간격을 두고 파라다이스에 대한 상황을 보여준다. 반면 다른 카메라는 이용자들에게 Antarctica에 얼어붙은 Mawson 역을 보여준다.44)

  웹카메라는 다시 미디어로 우리의 환상을 드러낸다. 디자이너는 그녀 자신에게 그리고 인터넷의 감시 기능을 우리들에게 단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웹 카메라가 물리적인 세계의 부분을 유용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들은 또한 그것을 사이버스페이스 속으로 가져옴에 의해 물리적인 세계의 구석구석을 또한 매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Maui, Antarctica, 그리고 달을 인터넷의 노드로 만든다. 많은 이러한 사이트들은 하나의 페이지에 카메라의 이미지들은 다양하게 배치함으로써 미학적인 매체상기성을 실험한다. 그들은 시간을 두고 동일한 카메라에 의해 획득한 몇 개의 이미지들을 보여줄 수 있다. 그들은 가깝게 배열된 카메라의 이미지로부터 파노라마를 세울 수도 있다. 혹은 글의 내용과 전혀 관계없는 이미지들을 보여줄 수 도 있다. 하나의 웹사이트 브라우저에 연달아 세 대의 카메라를 둠으로써 웹 주크박스 형태로 만들 수도 있다. 이러한 기술들은 우리들에게 매개하는 기술로써 각각의 웹 카메라에 대한 의식을 만든다.

  이와 함께 많은 웹 카메라는 자연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도시, 고속도로, 대학 기숙사, 그리고 도우넛 가게 등 인공적인 환경에서 훈련되어 진다. 이러한 사이트는 우리의 사회적 공간을 재매개할 뿐만 아니라 투명성과 매체상기성 사이에서 그들 나름의 그들의 아젠다(Agenda)를 갖고 있는 것이다.45) 이를 통해 웹은 현실을 매개된 공간으로 새롭게 재창조하며, 기존의 미디어에 대한 수용자의 욕망을 근거로 웹의 환경을 창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5. 결론을 대신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웹에 대한 색다른 분석을 시도해 보았다. 웹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가 정보제공자의 입장에서 논의해 왔다면 이번 연구를 통해서는 수용자의 관점에서 웹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기존의 미디어적인 관점에서 웹의 분석을 출발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웹은 기능적으로 크게 상호작용성과 상호텍스트성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먼저 상호작용성은 주어진 정보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용자 측에서 원하는 정보를 직접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46)으로 이는 웹이 추구하는 무봉합성을 통해 가능해진다. 특히 무봉합성은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정보미디어들이 ‘이음새’없이 완벽하게 전달하는 미디어 기술을 의미하는 것으로 수용자의 입장에서 인지하고 있는 현실과 미디어 현실 사이의 구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무봉합성의 궁극적인 목표는 지시대상과 지시기호 사이의 완벽한 동일시로 인해 미디어의 개입 흔적 자체를 지우는 투명성의 구현에 있는 것이다.47) 결국 웹의 상호작용성은 무봉합성을 통해 즉시성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를 수용자적 관점에서 보면 라캉의 제시한 주체 인식의 단계 즉,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중에서 먼저 웹은 상상계에 존재하는 타자이다. 이는 거울단계에서 유아가 환호성 반응을 통해 타자, 즉, 거울이라는 매체에 의해 자아를 경험한다는 것이며 여기는 자아는 완벽한 주체로써 자신을 기만하게 되는 것이다. 즉, 수용자는 유아가 거울이라는 상상적 타자를 투명한 존재로써 인식하듯이 웹을 투명한 대상으로 ‘시선’함으로써 웹과의 동일시를 욕망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거울단계를 지난 유아는 어머니의 결핍을 확인하고 자신이 결핍의 기표가 되기 위해 ‘합일’을 욕망하는 것처럼 수용자도 웹과의 합일을 욕망하게 된다. 결국 수용자는 웹을 투명한 존재로써 욕망의 대상이자 욕망의 동인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수용자는 웹이 제공하는 내용은 투명한 현실이며 웹 또한 현실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림4> 수용자와 WWW과의 관계(상상적 타자=즉시성)

WWW

(상호작용성=무봉합성)

 

 

수용자

 

             즉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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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흐름)


  다음으로 상호텍스트성은 여러 미디어에 걸쳐서 상호 링크 및 주석 등을 생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 비순차적인 정보 접근 방법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정보의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48) 이러한 웹의 상호텍스트성은 매체가 매개되어 있음으로 인해 매체상기성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수용자의 관점에서 보면 웹은 상징계에 있어서의 대타자이다. 즉, 타자에 의해 매개된 대타자의 존재이면서 크레스티바의 주장처럼 ‘천시되어야 하는 대상’이면서 소타자로 인식된다. 따라서 그동안 욕망의 대상이었던 투명한 주체가 오이디푸스 단계를 통해 아버지라는 타자에 의해 소유된 존재로 인식됨으로써 결코 육체적 합일은 불가능하게 됨을 알게 된다. 결국 주체는 대타자가 타자에 의해 매개되었음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거세공포에 의해 대타자를 버리고 다시 상징적 타자와의 동일시를 꾀하듯이 수용자는 웹을 다양한 미디어에 의해 매개된 존재로 인식하고 궁극적으로는 미디어 자체를 욕망하게 된다. 따라서 웹은 신문, TV, 라디오 등 기존의 미디어를 웹상에서 재매개함으로써 수용자의 기존 미디어에 대한 욕망을 매개하려 한다.

  또한 상징적인 차원에서도 대타자인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름 즉 법이나 도덕 등에 의해 매개된 존재임으로 수용자는 웹을 사회적인 제도나 규율의 범위 내에서만  욕망하게 된다.49) 따라서 수용자는 결코 웹을 투명한 존재로 인식할 수 없으며 미디어에 의해 혹은 사회적인 제도나 규율에 의해 매개됨으로써 매체상기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대타자의 타자와의 동일시를 꾀하는 주체처럼 수용자는 웹을 매개하는 미디어를 욕망하게 된다.


<그림 5> 수용자와 WWW과의 관계(상징적 타자=매체상기성)

WWW

(상호텍스트성)

 

 

수용자

 

         매체상기성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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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

욕망의 흐름

  이상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수용자가 웹을 투명한 존재로써 인식하여 욕망할 수 도 있고, 타자에 의해 매개된 존재로 여김으로써 다시 상징적 타자 즉 매개의 주체를 욕망한다는 것도 알았다. 결국 수용자에게 있어서 웹은 욕망의 대상이자 결국 욕망하는 그 자체임을 알 수 있었다.

  욕망은 사실 웹의 발전을 이끌어왔다. 예를 들어 가상현실실험에서 발전된 데이터글로브 같은 착용장치는 비디오게임산업에서 먼저 상업적인 수단으로 이용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는 비디오게임산업계가 웹을 수용자의 욕망의 대상이자 욕망 그 자체라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까지 웹의 놀라운 발전도 웹이 지니고 있는 미디어적 특성 때문만이 아니라 동일시를 꾀하는 수용자의 욕망때문인 것이다.

  앞으로도 웹은 이러한 수용자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더욱 더 충실한 현실을 재현하는 즉시성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완벽한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해 매체상기성을 추구할 것이다. 웹의  발전을 위한 동인으로써 수용자의 욕망은 지속적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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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ang1475.com.n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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