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라캉이 본 詩와 詩人 그리고 언어 /누리문화연대 카페

자크라캉 2007. 7. 25. 13:59

 

 

캉이 본 詩와 詩人 그리고 언어 /누리문화연대 카페

 

 

언어 이전의 경험 같은 것이 있다.
유아는 그런 경험을 통해 온통 무질서로 가득한 가운데서도 '실재(의식과 독립된 물질 세계)'에 다가갈 수 있다.
아이에게 실재란 고통과 기쁨으로 경험되지만 아이는 언어에 접근함으로써 점차 실재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유기체적 욕구(프로이트는 본능적인 욕구라고 불렀다.)는 본래적인 결핍으로 경험된다.
유기체적 욕구가 언어로 번역되면서 그것은 욕망이 되고, 본래적인 결핍의 경험은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때문에 인간은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욕망의 근저에는 근본적인 존재의 결핍이 있다.
그러나 욕망은 언어의 제약을 받으므로 그 결핍에 직접 접근할 수 없다.

무의식 속에 억압된 것은 생물학적 본능이 아니다.
생물학적 본능은 이미 언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의식에 위임된 것은 언어(기표)이다.
"무의식은 기표들의 연쇄이다."
의식적인 언어와 사유에서는 기의의 객관성(즉, 의미의 객관성)이 중시된다.
이는, 곧 기표(단어)의 창조성을 위장한다.
그로 인해 기표가 손쉽게 정상적인 경계선을 통과하여 그 기표 자체와 기의들 사이의 전혀 새로운 관계를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이 모호해지고 심지어 부인되기에 이른다.
무의식적인 언어와 사유는 그러한 진실을 알고 있지만 의식적인 사유와 언어(이성의 담론)는 조직적인 억압을 통해 그 엄청난 깨달음을 무시해버린다.

* 기표는 창조적 가능성이 높은 부분이고 기의는 정의된 부분이다.
* 기표는 소리이고 기의는 뜻이다. 소리와 뜻을 서로 연관해주는 약속의 체계가 필요하다. 언어학은 그 체계를 검토한다. 기호학은 언어학을 바탕으로 성립되지만 언어학조차 기호학의 일부이다. 기호학에서는 인간의 관습, 의식, 행위를 모두 기호(기표와 기의의 결합)로 간주하고 연구한다.

의식적인 언어는 고정된 의미를 지니는 종래의 기호들을 사용한다.
사실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의식은 그런 공식적인 이해의 필요성에서 벗어나 있다.
따라서 무의식은 기표(단어)의 현실적인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기표와 자유로이 어울릴 수 있다.
그 결과, 무의식은 자신만의 은밀한 '의미들'을 낳게 된다.
하지만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에는 가교가 있다.
그 다리는 바로 시다.
시적 언어는 무의식적인 언어의 형태와 아주 가깝다.
따라서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대화를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시인은 공적인 '겉'과 사적인 '안' 사이의 지점에서 떠돈다.
라캉에 따르면 환자와 시인의 차이는 단지 환자의 시적 표현이 기표들 사이의 관계를 엄격하게 사적인 범위 안으로 국한되어 있는 것뿐이라고 한다.
영화에 나오는 어느 정신병 환자는 프랑스 구어에서 자전거를 탄 경찰관을 '제비'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새를 두려워한다.
이때 그는 순수하게 사적인 시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말로 전달할 수 없는 고통스런 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의 정신을 얽매고 있는 기표들의 그물을 따라 그 경험을 추적해 보면 무의식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조용한 바다 위를 매끄럽게 스쳐가는 한 쌍의 거친 발톱이 되었어야 했다.]
- T. S. Eliot

라캉은 유아의 세계(일부 정신병 환자의 세계)를 가상계라고 표현한다.
여기서는 주체가 자기 자신의 가상, 공상 속에 파묻혀 있다.
가상의 '상'(이미지)은 경험이 언어로 되기 이전의 체험을 반영한다.
그 가상의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언어의 충족성 속으로, 즉 '상징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대상의 이름을 짓는 것으로써 주체는 그 대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즉, 대상을 명명할 때 주체는 자신이 그 대상과 같지 않다고 부인하는 것이다.
상징에 접근함으로써 정신은 단단하게 고착되며, 가상의 무차별적인 유입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로써 정신은 자아와 자아, 자아와 대상을 중재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자신을 상징에 등록할 수 없다면", 개별성이 나타날 가능성은 없어진다.
개별성은 바로 차별성을 필요하기 때문이다.

라캉은 상징 질서 속에 들어가는 것을 결코 좋게 여기지 않는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개별성을 가능하게 하며, 인간을 자연에 비해 우위에 있도록 해준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자기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자신의 원래 자아를 억압하는 무의식을 창조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점점 인위적으로 되어가고, 자신의 원래 존재의 진실로부터 멀어지고, 엄격한 결정론의 체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인간은 상징계에 접근하면서 그 자체의 규칙과 구조를 지닌 기존의 체계 속으로 들어간다.
자아는 기존의 관계망에 동화된다.
그 안에서 자아는 결코 원인이 될 수 없고 오직 결과만 될 수 있다.
주체는 언어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다.
기호들 사이의 관계라는 논리가 실재의 체험을 대체한다.
개인은 기호들의 자율적인 질서에 사로잡힌 포로가 되는 것이다.
말하는 것은 주체가 아니라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