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프로이트적 무의식에서의 주체의 전복과 욕망의 변증법

자크라캉 2007. 9. 5. 13:50
[번역] 라캉의 "주체의 전복" (1)
글쓴이 : 로카드 번호 : 595조회수 : 2162007.06.27 15:24

로이트적 무의식에서의 주체의 전복과 욕망의 변증법

 

(다음 번역은 라캉의 <에크리>에 실린 위 제목의 논문의 번역이다. 번역하는 텍스트는 브루스 핑크의 영역본이다. 알게 모르게 떠도는, 불어본을 토대로한 맹정현 씨의 초역을 참조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영역본에 충실했다. 하지만 한계가 있는 번역이다.)

 

어떤 구조가 정신분석으로 알려진 실천에 대해 구성적이다. 이 구조는 여기 모인 사람들처럼 철학적으로 조예가 깊으리라 짐작되는 청중들에게 대수롭지 않은 것일 수 없을 것이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지 못하면서 관심을 갖는 어떤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하는 논제는 흥미로운 독특성을 갖는다. 즉 그것의 적실성은 그것이 검증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철학자가 되어야만 검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의 철학적 적실성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그것은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역사에 관해 제시한 도식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런 방식으로 요약하는 것은 주체를 위치시키기에 편리한 매개물을 제공해준다는 이점을 갖는다. 즉 지식에 대한 관계를 근거로 주체를 위치시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그러한 관계의 애매성을 입증해 보여주기에도 편리하다.

 

이 동일한 애매성을 현대 세계 내에서의 과학의 효과들이 보여준다.

 

과학자 또한 하나의 주체이다. 그의 구성에서 특별히 자격이 주어진 주체. 이는 과학이 혼자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과학의 탄생은 부침이 없지 않았으며, 유산이나 조산 같은 몇 가지 실패가 먼저 있었다).

 

이제,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하는―혹은 그래야 한다고 사람들이 가정하는―이 주체는 과학의 효과들과 관련하여 사실상 이미 모든 사람에게 관심거리인 것을 알지 못한다. 혹은 현대 세계에서는 그렇게 보일 것이다. 현대 세계에서는, 이점에서의 무지가 관련된 한, 모든 사람이 과학자와 동일한 층위에 있는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 우리가 과학의 주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정당화해준다. 성공보다는 장담을 더 드러냈다고 할 수 있는 인식론이 감당해 보려고 하는 개념에 대해서.

 

그리하여―주목해 보자―나는 전적으로 교육적인 이유에서 헤겔을 참조하게 된 것이다. 분석적 훈련 목적을 위해서, 정신분석에 의해 온전히 전복된 바로서의 주체의 문제와 관련하여 상황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전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이 길을 따라 나아감에 있어 나에게 자격을 부여해주는 것은, 분명, 이 실천에서의 나의 경험이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것은―내 작업을 따르는 사람들은 증언하겠지만―이론의 실패에 더해진 이론 전수에서의 남용들 때문이다. 이는, 실천 그 자체에 아무런 위험이 안 되는 동안에도, 두 경우 모두 과학적 지위의 전적인 부재로 귀결된다. 그러한 지위를 위해 요구되는 최소 조건들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마도 부적절한 출발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오래 걸리는 길이라는 것이 판명났다.

 

여기서 나는 상이한 사회들의 관행에 대한 이의 제기와 같이 광범위한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특히나 영국과 미국에서 진정으로 정신분석적이라고 자처하는 분석적 실천의 악명 높은 탈선들에 대응하기 위해 내가 끌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결론들의 저장물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내가 특별히 규정하고자 할 무엇은 전복이다. 그리고 나는 이 모임에게, 내가 이미 그 성격을 언급한 바 있는 이 모임에게 용서를 구한다. 다른 곳에서보다 이 모임이 있는 곳에서 더 많을 것을 하지 못할 것이니까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 모임을 내 논증의 추축으로 삼지 못할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모임과 관련하여 이렇듯 자유를 부리는 것을 정당화하는 짐은 내게 있다.

 

나는 그럼에도 여러분의 친절함을 이용하여 우리가 과학이 경험주의에 조건지어질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고 가정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심리학이라는 명칭으로 과학적 꼬리표를 가지고 이미 구성되어 있는 무엇과 조우한다.

 

그것에 나는 이의를 제기한다. 이는 정확히, 내가 앞으로 보여주겠지만, 프로이트의 경험에 의해 개시된 바로서의 주체의 기능이, “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굴러가면서 그 어떤 방식으로 그 전제들을 치장한들 한낱 아카데미적 틀구조를 영속시킬 뿐인 그 무엇을 처음부터 실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의 기준은 주체의 통일성인데, 이는 이런 유형의 심리학의 전제들 중 하나이다. 이 주제가―마치 어떤 인식connaissance 주체의 회귀가 문제가 되는 것인 양, 혹은 심리적인 것이 유기체를 배가시키는 것으로서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인 양―한층 더 강조되어 따로 부각된다는 사실은 증상적이라고까지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통적인 사고의 한 몸통 전체가 “인식 상태”라는 근거가 없지 않은 용어를 승인하는 데 합심할 때 가지고 있는 관념을 예시적으로 취해야 한다. 플라톤에 의해 기술된 열광 상태이건, 불교에서 말하는 삼매경이건, 환각제의 영향 하에 있는 체험Erlebnis이건, 이와 관련해 얼마나 많은 것이 여하한 이론에 의해 인증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공본성성connaturality을 경유하여 인식이 포함하는 그 무엇의 등록소에서의 인증.

 

헤겔적인 앎savoir은, 그것이 근거하고 있는 논리화하는 Aufhebung 속에서, 그러한 상태들을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 이는 현대 과학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현대 과학은 그런 상태들에서, 어떤 좌표들을 규정할 기회라는 의미에서의 실험의 대상을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결코 이를테면 “인식생성적”이라거나 “지성산출적”이라 할 수 있는 정신수양을 알아보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그것들에 대한 참조는 우리에게 적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여러분은 그런 상태들이 프로이트적 실천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을 만큼 충분히 프로이트적 실천에 대해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온전히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이 “심층 심리학”이라고 가정된 것은 이러한 상태들을 가령 무언가에 대한 해명을 얻기 위해 이용하려는 꿈을 꾸지 않으며, 심지어 그것이 개괄하는 행로를 따라서 그 상태들에 그 어떤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비록 강조되고 있지 않기는 하지만―프로이트는 히스테리 현상을 설명하는 게 문제일 경우조차도 최면상태를 멀리 하는 것이다. 이는 놀라운 것이다. 즉 프로이트는 최면상태보다는 히스테리증자의 담화를 선호한다. 내가 편집증적 인식을 지도그리면서 “비옥한 순간들”이라고 불렀던 그 무엇은 프로이트를 참조한 것이 아니다.

 

무의식을 내가 하듯이 심문하는 것, 즉 무의식이 일종의 강탈(ravishment)이나 굴욕이라고 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니라 “왜인지를 말하자면”이라는 대답을 제공하는 지점까지 심문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가장 믿기지 않는 비논리성에 빠져있는 서클 안에서―이해시키는 것이 쉽지는 않다.

 

내가 주체를 어딘가로 이끈다면, 해독(deciphering)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미 무의식 속에서 어떤 종류의 논리―그 안에서 예컨대 심문하는 목소리라든가 아니면 더 나아가 논증의 전개를 확인할 수 있는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고 상정하고 있는 해독으로 말이다.

 

정신분석적 전통 전체는 다음의 견해를 지지한다. 즉 분석가의 목소리는 올바른 곳에서 들어가야만 개입할 수 있으며, 만일 너무 일찍 들어간다면 문이 닫쳐버리고 만다는 견해를 말이다.

 

달리 말해서, 프로이트에 대한 충성을 통해 지탱되는 정신분석의 한 혈통은,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원형적인 경험이나 어떤 의미로건 말로 다할 수 없는 경험으로의 이행 의례로서 행세할 수 없다. 단순히 바보는 아닌 누군가가 이런 종류의 견해를 위한 발언기회를 얻는 날은 모든 한계들이 이미 폐지되어 있을 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아직 요원한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제를 끄집어낸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좀더 정확히는 프로이트가 자신의 독트린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조치로서 분절하는 그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조치가 구성되기 위해서 어떤 하나의 특권이 추방되어야 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이 경우라면, 지구를 중심에 놓았던 특권 말이다. 그 다음으로 진화라는 관념의 승리로 인해 어떤 비슷한 자리에서 인간이 내쫓기게 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이런 감각을 갖게 해준다. 즉 그러한 파직이, 그것의 지속됨(constancy)을 통해 확인되는 어떤 이득을 함축하고 있다는 감각을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이 이득이라는 것을, 혹은 진정한 진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그 결과로 다른 진리(the other truth)―만약 계시된 진리를 이렇게 불러본다면―가 심한 타격을 입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중심을 고양시킴으로써 태양중심설은 지구를 중심으로 보는 것만큼이나 현혹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지 못하는가? 식(蝕)의 존재가 필시 우리가 진리와 맺고 있는 관계의 더 자극적인 모델을―지구가 고개 숙여 동의를 보내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식이 환원되어 관심을 상당부분 잃게 되기 전에―제공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지 못하는가?

 

어떤 경우든, 인간이 피조물의 맨 윗자리를 차지한다는 믿음을 덜 갖게 된 것은 다윈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바로 그러한 믿음을 그는 인간이 확신하게 해주었으니까 말이다.

 

코페르니쿠스라는 이름의 언어적으로 암시적인 사용은, 진리에 대한 관계와 관련하여 이미 금방 나의 펜에서 흘러나온 것을 특별히 건드리는 더 깊숙이 숨겨진 자원들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더 높은 진리들이 제 이름을 얻게 되는 장소로 부적당하지 않은 타원의 출현. 혁명은 단지 “천상의 혁명들”에만 관계하는 것이라 해도 결코 덜 중요하지 않다.

 

이 시점부터는 그것에 머물면서 숙고하는 것이 더 이상 종교적 전통에서 유래하는 어떤 천치 같은 관념을―다들 알다시피, 그렇다고 그 전통을 위해 더 나쁘지는 않은 관념을―단순히 파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앎의 체제와 진리의 체제를 보다 밀접하게 묶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만일 코페르니쿠스의 작업이 다른 이들이 나에 앞서 지적했듯이 생각만큼 코페르니쿠스적이지는 않다면, 이는 이중 진리의 독트린이 어떤 앎에게 피난처를 계속 제공하기 때문이다. 즉 당시까지 그 피난처에 상당히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던 어떤 앎에게 말이다.

 

따라서 바로 여기서 우리는 진리와 앎 사이의 감지가능한(sensible) 경계에 있게 된다. 그리고 얼핏 보면 우리 과학은 경계를 폐쇄하는 해결책을 다시 취한 것처럼 보인다고 결국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경계에서 무언가가 그 당시에 변동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을 만큼 과학 탄생의 역사가 아직도 충분히 뜨거운 물음이라면, 아마도 바로 여기서 정신분석은 거기서 발생한 새로운 지진(seism)을 대표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헤겔의 현상학으로부터 우리가 기대하는 봉사를 재검토해보자. 이상적 해결책을 표시하는 현상학. 이상적 해결책이란 말하자면 영구적 수정주의를 내포한 해결책인데, 여기서 진리에게 있는 성가신 그 무엇은 끊임없이 재흡수되며, 그 자체에서의 진리는 앎의 실현에서 결여된 그 무엇일 뿐이다. 스콜라 전통이 기본적인(principial) 것으로 정립했던 이율배반은, 여기서, 상상적인 것이 되어 해소된다고 간주된다. 앎은 자신의 무지가 작동하도록 함으로써만 자신이 진리를 알고 있음을 터득할 수 있는바, 진리는 바로 그런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실재적 위기인데, 내 자신의 범주들을 사용하자면 상상적인 것은 새로운 상징적 형식을 산출하는 가운데 제거된다. 이 변증법은 절대지라고 규정되는 국면으로 수렴되며 나아간다. 역연될 수 있는바, 이 국면은 상징적인 것이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는 어떤 실재와 결합되는 국면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자신-동일성 속에서 완성된 주체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로부터 우리는 이 주체가 여기서 이미 완전한 것이며, 과정 전체의 근본적인 가정(hypothesis)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주체는 실제로 이 과정의 기체(substratum)로서 명명된다. 그는 Selbstwewusstsein이라고 불린다. 즉 자기를 전적으로 의식하는 의식의 존재.

 

그렇게 되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과학의 역사 자체는―여기서 과학이란, 그것의 첫 탄생을 그리스 수학에위치시키는 것으로 상정해서, 그것이 개시된 이래로의 우리의 과학을 말한다―그런 내재주의(immanentism)에 별로 부합하지 않는 우회들의 형태를 보인다. 그리고 과학적 이론들은―특수상대성이론이 일반이론으로 어떤 식으로건 흡수된다는 것에 의해 여기서 오도되지는 말아야 한다―결코 정-반-합의 변증법에 따라 합치하지 않는다.

 

사실, 물리학에서의 몇몇 주요 변화들에 책임이 있는 위대한 정신들 속에서 혼란스럽게 들려오는 몇 가지 균열음을 통해 우리는 앎의 다른 장들에서처럼 이 장에서도 진리의 순간은 어떤 다른 곳에서 울려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과학이 정신분석적 과장 광고를 향해 보여주는 놀라운 탐닉이 정신분석이 제공하는 이론적 희망―단지 만연된 혼란의 결과만은 아닌 희망―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왜 보지 못하겠는가?

 

물론 나는 그 놀라운 측전이(lateral tranference), 그러니까 사회적 착취라는 자신의 저열한 목적을 북돋기 위해 심리학이 자신의 범주들을 정신분석 안에 다시 들여놓을 때 이용한 그 전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이유를 진술했지만, 나는 심리학의 운명이 구제불가능하게 봉인되었다고 간주한다.

 

여하간 헤겔의 절대적 주체와 과학의 폐지된 주체에 대한 나의 이중의 참조는 프로이트의 극주의(dramatism)를 정확히 정식화하는 데 필요한 빛을 던져준다. 즉 진리가 과학의 실천의 장에서 부상하는 것과 동시에 과학의 장으로 회귀한다. 억압되었다가 그것은 거기서 재출현한다.

 

의식의 불행―그것은, 아무리 헤겔 안에 깊이 새겨져 있다 하더라도, 단지 앎의 유예에 불과하다고 여전히 말할 수 있다―을 프로이트가 말한 문명의 불만과 분리시키는 거리를 누가 못 볼 수 있는가? 읽어보면 주체를 성(sex)과 분리시키는 삐딱한(영어로는 “skew”라고 할 수 있을) 관계로 밖에 분절될 수 없는 그 무엇을 프로이트가 단지 부인되는 듯한 문장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가리켜주고는 있지만 말이다

 

 

비평고원(Critical Plateaux) 카페에서 공개한 게시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