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발표작

도고 도고역 / 류외향

자크라캉 2006. 11. 3. 17:30
 

 

                               사진<민들레...땅을 빼앗어라>님의 블로그에서

고 도고역  /  류외향

거기 역이 있다 한다
지상의 끝에 있을 것 같은 역이
거기 있다 한다

열꽃이 미친 듯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더운 잠에 빠져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쳤거나 지나친 줄도 모르거나
철로의 행선지를 도무지 알 수 없거나
열차를 탄 채 제가 승객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
온몸을 뚫고 들어오는 도고 도고역
그의 魂에 이끌리듯 내려선다 한다
내려서자마자 주춤 발을 물린다 한다
前生의 새벽이 회색 바람에 묶여 와글와글 몰려오고
열차 떠난 자리엔 철로만 남아
수억만 년을 요지부동 엎드려 있었다는
완강한 자세로 철로만 남아
내릴 수는 있어도 탈 수는 없는 도고 도고역

회색 바람을 타고
서릿발 툭툭 털어내며 한 남자 걸어와
잿빛 양복을 펄럭이며 꿈결처럼 걸어와
눈자위 붉게 빛내며
천년만년 같이 살자 말을 건넨다 한다
그 말 하 심상해서
한 남자 소맷자락을 잡고 따라가
눌러 살고 싶어진다고 한다
멀리 드문드문 더운 김을 뿜어내는 산야와
뒤돌아보면 긴 꼬리를 땅 속으로 뻗으며
요지부동 엎드려 있는 시간의 무덤들
약속도 없이 저 혼자 덜컹철컹
문을 열었다 닫는다 한다

거기 역이 있다 한다
生의 기척에 무감해 천근만근 무거운
잠 속에서 장기투숙하고 있을 때
그 역에 내릴 수 있다 한다

-『실천문학』2005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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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시적화자는 내릴 수는 있어도 탈 수는 없는 “도고역”에 닿아 있습니다.
“도고역”이라는 중심 메타포를 통하여 전생을 건너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부리나케 달려가는 지상의 시간들, 그 시간에 몸을 싣고 덜컹거리며
떠나야만 하는 이승의 승객들을 손흔들며 배웅하고 있습니다.
거기 역이 있다고 하는데, 그 역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오랜 세월을 완강하게 버티고
서 있는 마음의 “도고역“, 그 역에 가면 천년만년 몸 섞고, 마음 섞으며
살자고 누군가 말을 건네올지도 모릅니다. [양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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