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발표작

오동꽃 피기 전 / 김다비

자크라캉 2006. 10. 16. 16:14

 

사진<음유 시인>님의 플래닛에서

 

 

 

동꽃 피기 전  / 김다비



오동나무 가지 위 싸늘해진 몸을 뉘기 위해
태양이 크고 불편한 둥지를 트는 시간

(어머니는 말이 없다)

파고다 공원에서 한 연인을 보았지
여자는 오동잎 같은 발자국을 남긴 채
먼저 돌아서서 가고
남자는 제 몸만큼 앙상한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어떤 시련도 와라 우리는 너무도 젊다
낡은 테잎을 파는, 리어카에서 흘러나오는 건 차라리 절규

(어머니는 괜찮다 했다)

무엇 하나 침묵하지 않은 저 무심한 풍경 속
몸 안을 가득 채우는 담배 연기로
속 빈 오동나무가 되는 줄 모르고
남자들이 담배를 많이 피우는 건
더 외롭기 때문이다 폐가 다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속 깊이 세상을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곧 죽을 것처럼 걸어가는 저 여자
뒤에 겨울 파고다 공원을 통째로
가슴에 집어넣은 남자가 덩그라니 남아 있다

(어머니는 괜찮다, 괜찮다 했다)

우리들 가슴은 뜨겁다고 리어카는 노래하지만
술을 먹고, 섹스를 마시고, 시를 토악질해내도
세상 모든 연인들은 집에 돌아가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찬 겨울바람 소리를 들으리라
그럼에도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외로움을 덜 타는 건
죽어서도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으며 묻힐 수 있는
두 개의 젖가슴이 있기 때문이다
오동꽃 피기 전, 그렇게 한 연인이 서둘러 어두워졌다

(오동나무 가지 위 태양을 헐어내시는 어머니)

 

2003년 <현대시학> 12월호

 


김다비
2003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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