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발표작

화석의 밤 / 김영래

자크라캉 2006. 10. 17. 19:22

 

                                          사진<내일의 어제>님의 블로그에서

 

석의 밤   /  김영래

1

나는 그 폐광의 깊이를
빛이 등돌린 입구에서
내가 내지른 고함을 통해 짐작할 뿐.

어둠의 식도로 통하는 검은 아가리.

순도가 높은 원석(原石)의 덩어리들
무개차에 실려 갱도 밖으로 나갔다.
채광의 금속성 사라진 길.

그믐으로 가는 내 영혼의 광구(鑛口)엔
폐석의 더미들,
끊긴 선로, 녹슨 연장,
버려진 원동기들.

밤의 내장으로 통하는 이 깜깜한 어둠의 식도.

2

그곳에 가면 불이 있다.
빛이 분별할 수 없는
영원한 밤이 응축시킨 불.
수억 년 생명이 지층 속에 생매장된
떼죽음의 밤,
화석의 밤까지 가면.

사방이 산이다.
눈의 산, 밤의 산.

탄가루를 마시고 무거워진 심장들
돌아누워 침몰하고
유산된 꿈이 탯줄째 얼어붙는다.
물개 가죽신을 신고 상아 고드름 이빨로
동토(凍土)의 하늘을 톱질하는 바람.
마을로 가는 길 어디며
어디가 마을 밖으로 가는 길인가?
사발 막소주로 씻은 눈들,
막장 속 밤의 아들들에 빛의 총명함을 전하던 눈들은
숯불에 돼지 껍질을 구우며
잘 꺼지고 자주 갈아야 하는 아궁이의 불을 생각한다.
석탄회관에 모여
탄불처럼 식어가는 생계를 생각한다.

막힌 불구멍을 터
신선한 풀무로 숯풍로를 지피며
금(金)을 제련하는 불,
꺼지지 않는 불은 어디에 있나?

그곳에 가면 불이 있다.

폐광으로 가는 길 눈에 묻히고
갱도에 눈 밝은 광부들 모두 떠나
마을 전체가 꺼져 냉돌인 밤,
대설(大雪)의 밤,
그 심장까지 가면.
어둠을 뒤져 불을 찾는다.
밤의 숯, 부싯돌 같은 빛.

존재의 일식이 비롯되는 곳은 어디인가?

내가 가진 것은 공기와 물,
부서진 악기, 재가 되어버린 꿈.

어디로 갔나?
불씨들, 삶의 토시인 빛의 깃털들.
부싯돌들, 부등깃 같은 희망들.

시를 쓰면 불을 지핀다.
끊어진 현(絃)으로 섬광을 켠다.
아주 오래 전
구덩이를 파고 묻어둔 한낮의 노래는
썩어 한 움큼의 캄캄한 화력으로 탄화되었을까?

발화성 높은 광석들은
수백 광년 저편의 별들처럼
밤의 자궁 속에 잠들어 있고
나는 인화물질이 부족한 주머니에서
어린 새 같은 언어를 키우며
밤을 통과한다.
출구가 없는 암흑의 떨림판에
내 불타는 심장을 비비며.

 

- 현대문학 1998.11 -



1963년 부산 출생
1977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제5회 『문학동네』 소설상에 『숲의 왕』당선
장편소설 <씨앗>, < 편도나무야, 나에게 신에 대해 이야기해다오>
시집 <하늘이 담긴 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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