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랭보

빅톨위고와 보들레르의 후계자 랭보와 그의 신화(Ⅰ) / 조은섭

자크라캉 2006. 8. 23. 16:14

 

톨 위고와 보들레르의 후계자 랭보와 그의 신화

조은섭


I. 종교에 대한 저항, 반항의 사춘기


"시인은 길고, 거대한 타락에 바탕을 둔 모든 감각을 통해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 ( 폴 드메니에게 1871년 5월 15일 보낸편지中에서 )

쟝-니꼴라 악튀르 랭보는 가정에 무책임한 보병 대위 프레데릭(註:아버지 프레데릭 랭보는 다섯 아이를 버리고 영원히 가정을 버림.)랭보와 무척 독선이 심하고 신앙심이 깊은 소지주의 딸 비탈리 퀴이프 사이에서 1854년 프랑스의 아르덴느 지방의 샤를르빌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는 조숙함과 문학에 천재성을 선생들로부터 인정받아중 3학년 과정을 면제받고 곧바로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도 했던 그는 라틴어에 특출함을 보여 1869년에는 중 고등교육 모니터誌에 실린 그의 세 편의 라틴어詩중 한 편이 학술 대회에서 1등 상을 받는 등 문학적인 면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으나,16세의 나이에 학업을 중단했다.

그 뒤 그는 시인의 길 :- 타락에 바탕을 둔 모든 감각을 통한 선지자( Voyant )가 되기 위해 그의 선생 이장바르의 권유로 라블레, 테오도르 드 방빌, 빅톨 위고에 심취하게 된다. 특히 위고의 징벌( Les Ch timents ), 웃는 사람 ( L'Homme qui rit )(註: 이 작품 중에 스페인의 콤프라치코스란 해적 집단이 보헤미안들에게 어린아이들을 사서 얼굴 혹은 몸을 괴기하게 흉기로 변형시켜 영국 왕실이나 부루죠아 계층에게 팔아 넘김.), 그리고 명상록 ( Les Contemplations )등에 지대한 영향을 받아, 초기에 있어서 랭보의 작품 경향은 상징주의 쪽 보다 오히려 낭만주의에 가깝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가 佛語로 쓴 첫 詩(註: 랭보의 첫佛詩 " 고아들의 신년 선물 " 은 빅톨 위고작품 " 불쌍한 사람들 " 이나 " 레미제라블 "의 많은 영향을 받은 걸로 보임.)만 보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학에 있어서 模倣說:-인간은 어떤 대상을 만나면 그것을 흉내내고 模倣, 模寫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고 또한 그렇게 한 작품에 대해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랭보의 초기 작품 속에는 빅톨 위고의 알랙 상드랭(註: 빅톨 위고가 그의 " 명상록 " 이나 " 세기의 전설 "등에서 보여준十二音節詩.)을 많이 모방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註: Henri Peyre는 그의 작품 " 상징주의 문학 " 에서 랭보는 청소년기 시절 위고의 " 명상록 "과 " 세기의 전설 "같은 완벽한 작품을 쓸것을 꿈꾸었다고 밝히고 있다. P.U.F.( Editions ), p, 27. 1976, Paris.). 물론 다른 작가와는 달리 16세의 사춘기에 벌써 수준 높은 詩作을 탐구한 그의 조숙한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心理的,藝術的 創作에 起源을 찾아야 그의 신화의 껍질을 벗기는데 용이할 것이다.

모방과 그를 억압해 오던종교적 관념에 대한 카타르시( Catharsis )(註: 카타르시스 (CATHARSIS )는 원래 위장약의 일종으로 소화불량에 특효약을 뜻함. 현대문학에선 종교적인 측면에서 그 뜻을 이용: 육체적 정신적 淨化 作用을 나타냄.)작업을 1870년 8월 29일 그의 첫 가출로 표면화하기 시작한다. 왕권의 몰락과 함께 파리에 설치한 코뮨느( Commune:프랑스 혁명정부 )에 가담하고자 모친의 허락도 없이 파리에 상경한 그는 곧바로 붙잡혀 구치소에 감금되며, 자신의 담임 선생, 이장바르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다 써 주십시오 " 란 S.O.S를 보내 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그곳에서 나온 그는그해 [ 앉아 있는 사람들, Les Assis ]이란 詩를 통해 관료주의자들을 무참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 오! 그들을(관료주의자들 ) 일어서게 하지 마시오 ! 그것은 낭패랍니다...

그들은 견갑골을 천천히 펴면서,

뺨을 얻어맞은 고양이들처럼 투덜거리며 일어선답니다. 오 격분!

굵은 허리춤까지 올라온 그들의 바지(...) "

몽테뉴가 그의 작품 [수상록] 에서 관료주의자에게 아무리 높은 의자에 앉아 있더라도 그들이 앉은자리는 그들 자신들의 엉덩이 밑에 깔려 있음을 시사한 내용을 떠오르게 하는 작품이다. 랭보의 Sarcasme (冷笑 )은 소크라테스나 몽테뉴의逆說的 아이러니가 아닌 그가 직접적으로 피부로 느끼고 있는 사회적 병폐, 모친의 지나친 간섭(註: 카톨릭 신앙으로 자식을 교육하려던 정신적 지배 간섭을 뜻함.), 그가 살고 있는 샤를르빌의 知的 空間의 협소함에서 비롯된 現實認識에 대한 感覺的 反動이라 해도 과언을 아닐 것이다. 그는 집에 돌아온 즉시또다시 가출 할 것을 계획하고, 10월 7일 집을 뛰쳐나가 샤를르로와-브뤽셀-두에 등을 걸쳐 다시 집에 돌아와 자신이 지니고 있는 個性的 文學 着色을 認知하고자샤를르빌 市立圖書館을 빈번하게 출입하며 사회주의 작가들: 프르동, 바뵈프, 루이블랑, 쌩 시몽등과 역사 학자 미쉴레의 작품을 탐구 본격적으로 反 부르주아적인 自身의 內的 感情을 外化시키게 되며; 다음해 2월 25일 다시금 파리를 향해 무단 가출을 하게 되지만 수도의 거리를 2주일 정도 거닐다가 돈이 떨어지자 고향까지 도보로 되돌아오는 슬픔도 맞이한다. 귀가 후 충실한 體驗의 自己 意識을 그려낸 詩가 바로 [ 파리 전쟁의 찬가]( Chant de guerre parisien ), [ 다시 인구가 증가하는 파리, Paris se repeuple ], [쟌 마리의 손, Les Mains de Jeanne-Marie ] 그리고[일 곱살 난 詩人들, Les Po tes de sept ans ] 등으로서 이들 詩를 통해 반항과 저항의 自我 世界를 위선의 탈을 벗고 과감하게 표출 象徵 世界로 한 걸음 다가서게 된다:

"...,어머니는 必書 ( 성경 )을 덮으면서,(...)

추함을 쫓는 아들의 영혼은 못 본 채,

자랑스럽고 만족한 듯 자리를 떴다.

매일같이 그는 (랭보 ) 명령에 복종하는 라 애썼다; 아주

총명스럽게; 그렇지만, 얼굴을 찡그리는 나쁜 습관은,

그 자신 속에 내재하는 신랄한 위선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 Les Po tes de sept ans 中에서 )

" 매독 환자들, 미친놈들, 王들, 꼭두각시들아, (...)

당신네들의 영혼, 육체, 毒 그리고 당신네들의 누더기 옷이

빌어먹을 파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 ( ...)

詩人은 너( 파리 )에게 말한다: { 너의 美貌는 황홀하구나 !"

( Paris se repeuple 中에서 )

첫 詩에서 랭보는 자신의 二中的自我: 부모에게 순종하는 맹목적 외적 자아와 위선에서 탈피하려는 내적 자아를 구체화하고 있다. 두 번째 詩는 보불전쟁뒤 파리를 쥐고 흔들려는 부패한 집정자들을 질책하며, 다른 한편으로 파리에 대한 랭보 자신의 愛情그려, 파리는 그 당시 그의 끝없는 정신적 지주이자 갈등의 장소임을 잘 들어내고 있다(註: 랭보의 잦은 무단 가출의 장소가 파리였음을 상기.). 또한 가장 원초적인 언어 구사( 신랄한 위선, 매독, 미친, 빌어먹을..., )를 통해 종교와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저항, 반항적인 그의 과도기적 사춘기를 感性과 不條理한 혼돈의 世界에서 자신의 環界( 시인으로서 볼 수 있는 세계 )로 끌어내려는 안갖 힘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