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랭보

빅톨위고와 보들레르의 후계자 랭보와 그의 신화(Ⅲ) /조은섭

자크라캉 2006. 8. 23. 16:20

톨 위고와 보들레르의 후계자 랭보와 그의 신화

조은섭


III.파괴와 타락의 포로 自我와의 이별


"방랑자는 너무 방랑을 한다고 나무라고, 시인은 너무 시인 스럽다고 나무라고, 개척자는 너무 개척차라 나무라며, 사업가는 너무 사업가라 나무라며, 무기 밀매 업자는 너무 밀매를 잘했다 나무란다... 랭보가 정치가가 되지 않은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그는 오늘날 광대와 같은 형상만 남은 히틀러, 스탈린, 무솔리니, 혹은 처칠, 루스벨트와 같은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앙리 밀러의 {살인자들의 시대} 中에서 )

그의 시집 [ 지옥의 한철]은 그의 감정의 몰락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친 마돈나]에서 본 것처럼 그 자신이 {나}란 내적 자기; 즉 시인으로서 자기를 잃어버리고 있음을 [지옥 같은 동반자]를 통해 들어내고있다. 문학에 대한 야망, 동성연애, 베를렌느에게 기대어 산 삶;- 이 모든 것이 둘이 살면서 느끼고 또 빼앗긴 그의 삶이란 걸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을 때는 거기에 그 자신이 이미 포로로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뿐 아니라, 그것들은 자신의 {영혼과 육체}속에 머물고 있는 그를 지배하는 주인으로 둔갑했음을[지옥의 한철]의마지막 詩 [ 아디유]에서 고백하듯 밝혔다:- 그렇다, 그는 이미 그자신의 영원한 포로가 된 것이다. 지금껏 그가 메 달려온 삶은 환상을 쫓아 헤 메였을 뿐만 아니라그 환상 속에 파묻혀 파괴되었던 삶이었던 것이다. {나}를 찾아야 한다;- 타인의 굴레에서 벗어버린 {나], 진정한{나}:- 17세에 그가 던진 명언 [ 난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고, 다른 사람이 날 생각한다고 해야 옳다 ]라고 한 말에 의혹을 스스로 던지는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이 모든 구속에서 탈피 하고자 아디유; 자신에 대한 아디유, 환상에 대한 아디유를 던지고 그 자신이 어떤 유기체로 된 파괴와 타락의 악마인지 스스로를 찾아가는 단계;- 즉 [난 나다]란 빅톨 위고의 인간의 본질을 랭보도 찾게 된다. 그런 자신을 { 농부}란 한 단어에 함축시켜 그의 고통과심연에 흐르는 그의 내면적 본질을 돌출 시키게 된다:

" 나! 난 모든 도덕으로부터 탈피한 마술사나 천사라고 생각한다,

난 험난한 현실을 찾고, 그것을 포옹하기 위해 난 지상에 내려왔다 !

농부여 ! " ( 아디유 中에서 )

[나]의 의미가 강하게 작렬하는 시임에 틀림없다;- 단순한 나가 아니라, 자신의 본질에 동일화 시킨 나;- 즉 객관적이거나 타인이 인식하는 도덕적인 나가 아닌, 외형과 내형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플라톤의 이상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주관적이며 현실을 뼈저리게 절감하는 나;- 환상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이 살고 있는 평범한 지상에 다시 서게 된[나]를 뜻하고 있다.

꿈의 세계에서 평범한 농부의 세계로 진입한 19세의 나이에 [아디유]을 끝으로 붓을 놓게 된다. 이 이별은 시인 랭보와 꿈의 세계와의 이별이자, 물질 세계로 또 다른 환상의 신기루를 쫓아가는 전환점이었다: 지금껏 물질 세계, 부르주아와 관료주의의 부패를 누구보다도 신랄하게 비판하고저주하던 그가 베를렌느와 별거를 선언한 그 해말 파리 서클 쥬디크에서 만난 제르맹 누보와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1874년 3월 영국에 같이 가게 되며 곧 그와 헤어진 랭보는 그 때부터 새로운 방랑 길을 시작한다; 작품에 대한 방랑이 아닌 삶과의 전쟁,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그의 천성적인 방랑벽이 그를 독일-스위스-밀라노 등으로 이끌었고, 아프리카에 가보고 싶은 욕망으로 1876년 5월에 19일 네덜란드 식민 통치 해군에 지원 6월 10일에 배를 탔으나 몇 주일 후 탈영 영국 상선을 타고 유럽 땅에 다시 돌아와 그해 12월 고향 샤를르빌에 도착 하기도 한다. 고향에 돌아오기가 무섭게그의 방랑벽은 정체된 과거의 꿈과 새로운 물질 세계를 추구하는 현실적 자아 사이에갈등과 번 민을 오가는 것이었다:

" 모든 기쁨과 영화보다 더 높은,

오 종려나무여 ! 다이아몬드여 !- 사랑, 힘이여 !-

어쨌든, 어디에나,- 악마, 神은 있고,

- 이런 존재의 젊음이; 나다 !(...)

바다와 싫증나는 공기를 가로질러 상처투성이로;

살인적인 공기와 잔잔한 물결을 가로지르는 형벌로;

그들의 고요한 엄청난 파고 속에서 고문을 비웃으며,

떠돌아다니련다. " ( 詩 번뇌 中에서 )

[번뇌는 과거의 비운과 현재의 비운 사이에 위치한 또 다른 고문 방법의 가장된 소망이다 (...)].(註:참조) 피에르 브뤼넬: {악투르 랭보}, 샹 발롱, 1978, 파리, p.210.)랭보의 비운의 과거는 그의 주변 환경에개인적인 요소가 가미된 비운으로 분석할 수 있다: 지속적인 야망에 대한 좌절, 어머니에 대한 피해 의식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그의 운명이다. 이 시에서 보는 것처럼 [종려나무]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 행복했던 시절 을 뜻하고 있으며, [다이아몬드]는 새로운 그의 야망 내지는 신세대의 富의 象徵; 그 자신조차 억제하지 못하고 거기에 매료되어 가고 있는 물질 세계에 대한 동경이기도 하다. 한편 [기쁨과 영화]는 사랑과 힘에 대한 기쁨이며, 무참히 파멸된 자신의 야망에 대한 허황 된 榮華로 밖에 볼 수 없다. 이런 삼박자의 비운을 몸에 지닌 젊음; 이 젊음 자체를 강한 감탄형의 문장으로 재인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거의 비운의 삼박자는; [상처투성이, 형벌, 비웃음, 살인적 공기] 등공격적인 랭보의 현실 감각에 가세하고 있다:- 이것은 또 다른 우주의 惡에 몸을 던진 랭보의 靈을 잘 표현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잔인해지는 우주의 혹독함을 점진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상처에서 살인적인 형벌로,형벌이 고문과 비웃음으로; 끝내는 침묵 속에 묻혀 엄청난 파고로 일루미나시옹 (환상)의 탈을 쓰고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랭보는갈망에 대한 굶주림, 불멸에 대한 굶주림으로 얽매인 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방랑을 한 것이다:

"난 꿈같은 오페라를 상상했다. (...)

내 두뇌에 응집해 있는 주술 같은 마법을 달래기 위해서

난 여행을 해야 했다. 바다 위에 있으면, 바다가 나의

더렵혀진 몸을 씻어 주는 것처럼 좋았고,

난 위안의 십자가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

행복은 나의 운명이었다(...): 내 인생은 힘이나

아름다움에 받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것일 것이다."

( 詩 "굶주림" 中에서 )

결국 그의 방랑은 단순히 창작 세계를 져 버리려는 행동만이 아닌, 부패된 자신을 정화해서 내재된 자아의 본질을 되찾고자 하는 의도였으며, 또한 현실도피를 바탕으로 한 행복;-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비운과 갈등으로 얼룩진 랭보 본인에게 있어서는 너무 거대 해 보이기만한 [행복];- [꿈 같은 오페라]로 상상되던 마법에 고삐를 잡힌 행복;- 이런 행복에 대한 굶주림이 광활한 바다에서면 자신의 더러운 과거를 용서해 줄 것 같은 [위안의 십자가]가 됨을 누구보다도 랭보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롯된 하나의 불가항력으로써 자신의 수치스런 과거뿐만 아니라 그 주위 사람들에 대한 경멸이 그의 끝없는 방황 세계에드러남을알 수 있다:

"내가 경멸했던 것들은합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난 탈출하기 때문이다 !

난 탈출한다 ! (...)

하늘이여 ! 지상에 저주받은 사람이 충분하지 않소 !

나, 난 오래 전에 그들 그룹에 속해 있다 !

난 그들 모두를 알고 있다. 우리들끼리는 항상 잘 알고 있다;우리는 서로간에 혐오감을 느낀다.

자비란 우리에겐 멀게만 느껴진다...}

(...정신은 독선 그 자체다, 정신은 내가 西洋에 있길 바란다. 내가하고픈 대로하기 위해 그의 입을 막아야 한다 (...); 난 영원하며 원천적인 지식이 있는 東洋으로 돌아가련다."

( 詩 "불가능" 中에서 )

그의 끝없는 탈출은 꿈 같은 오페라가 들릴 것 같고, 지식의 원천인 東洋으로 향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꿈은 랭보에서만 드러나는 특색은아니었다. 동양은 19 세기의 낭만파 작가들( 빅톨 위고, 스탕달, 브레이크,바이런, 보들레르, 테오도르 드 방빌, 네르발 등 )의공통적인 과제이자 이 시대의 문학적 유행으로 한번쯤 들먹이던 주제들이기도 했다.

오토데스트뤽시옹 (Autodestruction: 자기 파괴 작업)으로 시작한 17세의 사춘은 자신의 삶의 터전인 서양; 꿈과 또 다른 우주;- 자신을 방탕과 타락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는 영적 세계, 동양에 대한 갈망으로 부푼 모습을 이 시에서 볼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저주받은 부류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 랭보, 그러면서도 그 뿌리를 져 버리지 못하고 물을 떠난 물고기가 며칠을 살지 못하는 것처럼 항상 방랑 끝엔 고향인 샤를르빌이나 어머니의 고향인 로쉬에 되 돌아와야 했던 랭보:- 파괴와 타락으로 이어지는 자아와의 이별을 무수히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현하지 못한 채 [바람 구두를 신은 사람]이란 베를렌느의 말처럼, 바람을 벗삼아 19세에 붓을 꺾고 37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방랑의 포로로 진흙길을 걸어야 했다.

이전(Previous) | 위로(Top) | 다음(Next)


이 문서의 저작권은 필자 조은섭에게 있습니다. 필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로도 재사용할 수 없습니다.

문학리뷰 1999년 10월호
webmaster@literature.co.kr
문학리뷰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