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소개

정일근/ 시인

자크라캉 2006. 7. 26. 16:03

 

 

 

 

 

 

 

 

 

 

 

 

 

 

 

 

 

 

 

 

 

 

 

 

 

 

 

 

시인 정일근

 

1958년 경남 진해에서 출생, 경남대 사대 국어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 <실천문학> 5권에 「야학일기 1」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가,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된 바 있다.
2000년 한국시조작품상을 수상했으며 2001년 7차 교육과정에 따라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시가 수록됐다. '시힘' 동인이며 현재 울산에서 문화공간 '다운재'를 운영하고 있다.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교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 <처용의 도시>, <경주 남산>, <첫사랑을 덮다> 등이 있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시인 정일근



-죽음의 문턱서 만난 詩… 그와 한몸이 되련다


헬레나 노르베리가 쓴 책 ‘오래된 미래_라다크에서 배운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끝없는 경제 성장과 물질적인 번영이 정신적 사회적 빈곤, 심리적 불안정 그리고 문화적 생명력의 상실을 대가로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그 책에서의 지적처럼 나도 그런 것을 잊어버리고 살았다. 진작 알고 있었다고 해도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 詩는 우리마을 은현리의 자연이 불러주는 '받아쓰기'

-난 이곳에 '詩앗'을 뿌린다 자연과 하나가 되기위하여



시인이 되고도 나는 달려갔다. 달리는 현대성의 시간을 따라 오토바이처럼 달렸다. 그 때는 몰랐다. 달려가야 하는 것이 삶이고 시(詩)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생(生)의 가속도에는 결승점이나 도착지가 없다는 것을 1998년 내가 마흔이 되기 전까지는 몰랐다.

내게 불혹(不惑)은 특별했다. 그때서야 달리는 것만이 삶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달려가면 갈수록 자신이 도착하려는 결승점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알았다. 깨달음은 급정거를 할 때 온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급정거를 했을 때 나는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라는 질문에 먼저 대답부터 해야겠다. 1998년 이후의 나는 내가 떠나온 몸인 ‘오래된 미래’로 돌아가기 위해서 시를 쓴다. 그 이전의 내 시와 지금의 내 시는 같은 이름이지만 몸은 다르다.

1984년 10월 ‘실천문학’(5권)과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이 된 후 그 때까지의 시는 ‘발언’이라는 생각이었다. 시로써 나를 발언하고 내가 사는 시대에 대해 발언했다. 1998년 5월 이후 내게 시는 몸이다. 나는 시와 한 몸이 되고 있다. 시와 삶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은현리(銀峴里)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산골마을에 살고 있다. 농사를 짓고 사는 은현리 사람들에게 나는 국외자다. 한 평 묵정밭도 갖지 못한 나를 그들은 ‘은현리 사람’으로 쳐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함께 은현리에 살아도 그들은 ‘오래된 미래’에 살고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길 희망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들에게 편입되기 위해, 은현리에 살기 위해, 오래된 미래로 돌아가 살기 위해 시를 쓴다. 시가 내 농사이며 내 존재의 방식이다.

은현리 들판으로 가을이 당도하고 있다. 가을이 오려는 것인지, 어젯밤에는 한 발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가 은현리를 덮었다. 지독한 안개였다. 마을 들판으로 저녁산책을 나갔다가는 안개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은현리도, 은현리로 가는 길도 모두 안개 속에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안개를 피워 놓고 여름과 가을의 신이 자리를 바꿔 앉는 것일까. 나는 안개 속에서 여름이 떠나는 내음과 가을이 찾아오는 내음을 동시에 맡았다.

그 비밀스러운 의식 앞에 마을의 개 한 마리 짖지 않고 대숲에 사는 새들도 울지 않았다. 나는 밀교의 경전을 읽듯 은현리 밤 안개를 읽고 있었다. 그 짙은 안개 속에서도 나는 시를 읽고 있었다.

그렇다. 은현리는 내가 새로 읽고 있는 ‘문학 교과서’이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아이가 되어 연필에 침을 발라가며 은현리의 자연이 불러주는 대로‘받아쓰기’를 하고 있다.

그 받아쓰기가 내 시가 되고 있다. 최근 발표하는 내 시 속에 은현리란 말이 많이 들어가고 있다. 2년 전 나는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로 주민등록을 옮겼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군민이 되고, 면민이 되고, 부락 주민이 되었다.

이십대 후반과 삼십대 전부를 일간지 사회부 기자로 일했던 나는 불혹을 지나며 크게 망가지고 말았다. 대책 없이 쓰러지고 결국 머리를 여는 수술을 받았고, 죽음의 끝에서 돌아왔다. 그것은 잠시 잠깐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잠시 잠깐 사이 세상은 변했다. 돌아왔을 때 세상은 내가 살던 그 세상이 아니었다. 나는 생명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었고, 일본 비자도 나오지 않았고, 새로운 신용카드도 만들 수 없었다. 나는 이방인이었다.

의사는 스트레스가 머리 속에 시커먼 탁구공 만한 혹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그건 내가 만든 세상의 상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것에 자신만만했으므로 세상 깊숙이 칼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그 칼에 피 흘리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수술 이후 3년 간의 회복기를 거치면서 시집 한 권을 냈다. 고마웠다. 나에게 끝까지 등 돌리지 않은 것이 시였고 내 주머니 속에 남아있는 것도 시였기에 나는 시로 귀의하기로 했다. 사실 나는 시밖에 쓸 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삶이 시를 데리고 가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 때부터 시가 나를 구원했다.

그렇다고 전업시인이 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늘 깨어있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원고청탁을 받고서야 시를 쓰는, 마감일에 쫓기거나 독촉을 받으면서 시를 쓰는 그런 시인이 되지 않고 싶었다. 시가 나를 구원했으니 시에 충실하고 성실해지고 싶었다.

은현리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은현리는 시골마을이며 산골마을이다. 울산이라는 공업도시에 있는 마을이지만 아름다운 마을이다. 내게 은현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전원의 풍경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논에다 벼를 심고 밭에다 푸성귀를 심고 소를 기르는 사람의 농사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은현리에는 앞으로는 넓고 비옥한 들판이 펼쳐져 있고 뒤로는 솥발산(鼎足山ㆍ정족산)이 솟아 있다. 솥발산에는 산지 늪으로 널리 알려진, 환경보호지구인 ‘무제치늪’이 있다. 그 덕분에 은현리 사람들은 6,000년 전에 형성됐다는 무제치늪이 걸러서 내려주는 깨끗한 산물을 받아먹고 산다.

나는 은현리에 와서 수돗물 시대를 청산했다. 흐르는 물을 받아먹고 살았던 옛날로 돌아왔다. 나는 자연이 ‘헬레나 노르베리’가 히말라야 라다크에서 찾았던 ‘오래된 미래’의 요체라는 사실에 절감했다. 그 자연이 히말라야처럼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 살아 있다는 것도 알았다.

물이 바뀌면서 나도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 몸의 70%가 물이다. 사람을 구성하는 물이 바뀌면 사람도 변하는 모양이다. 나는 마당에 나무도 심었고 개도 기르면서 삶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받아쓰는 것이라는 생각도 얻었다.

자연을 받아쓰기 위해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은현리의 나무와 꽃과 새와 벌레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었다. 부끄러웠다. 20년 가까이 이 땅의 서정 시인인 것을 자부하면서 살았지만 나에게는 자신에게 불러줄 친구들, 자연의 이름이 없었다.

자연의 이름에 대한 무지는 큰 부끄러움이 되었지만 그 이름들을 배워 불러주는 것은 더 큰 기쁨이 되었다. 우리 집 마당에 제일 먼저 피는 봄까치꽃과 은현리에서 가장 늦게 피는 용담꽃, 온 몸에 가시를 달고서도 향긋한 개두릅을 피우는 엄나무, 산길에서 마치 길을 안내해주는 것처럼 튀어 가는 비단길앞잡이, 겁이 많은 휘파람새… 나는 그 친구들을 은현리에서 처음 만났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면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그들은 내 시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은현리에서 두 번째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노란 꽃을 피운 호박은 속살이 노랗게 익어가고 하얀 꽃을 피운 박은 속살이 하얗게 익어 간다는 것을, 지난해 가을 은현리 들판에서 배웠다.

자연의 가르침은 그냥 그대로 시가 된다. 자연의 가르침 속에는 시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부처의 깨달음도, 노자의 도도, 장자의 무위자연도 다 자연 속에 있었다. 자연 속에서 모두 하나였다.

은현리에서는 꽃 색깔대로 속살이 익어 간다. 사람의 속살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땅을 푸르게 만든 사람은 속살도 푸른빛으로 빛나고, 가을 들판으로 황금빛으로 만든 사람은 속살도 금빛으로 빛나는 법이다.

은현리에서 나는 ‘시(詩)앗’을 뿌리며 살고 있다. 지난여름에 뿌려놓은 내 시(詩)앗이 이번 가을에는 어떤 꽃을 피우고 어떤 속살로 익어갈 지는 모른다. 궁금하지도 않다. 그건 자연의 뜻이다. 농사도 그렇다. 농사일에는 사람의 일이 있고 하늘의 일이 있다.

시인(詩人)이 무엇인가? 진정한 시인이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시와 한 몸이 된 사람이다. 그래서 시인인 것이다. 시와 함께 죽을 수 있어야 시와 함께 살 수 있다. 시인이 되기 위해, 시와 한 몸이 되기 위해 나는 시를 쓴다.


-2003년 9월4일자 한국일보/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 정일근 작가론


저 대책없이 뜨거운 신라의 사내, 정일근



이지엽
(경기대학교 한국·동양어문학부 교수, 시인)


나는 정일근 시인이 펴낸 시집 『紺紙(감지)의 사랑』 해설을 쓸 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정일근은 후덕한 가슴을 지닌 시인이다. 콸콸하게 내어뱉는 거침없는 언사에도 잔정이 묻어 흐른다. 내가 알고 많은 시인들 가운데 조금 쓴다는 시인들치고 겸양의 미덕을 지닌 사람을 보지 못했다. 문학이 무슨 권력이나 되는 것처럼 휘두르는 오만함과 때론 경계하는 눈초리들. 그들이 어찌 시인일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의 자괴감이 나를 괴롭히곤 하였다.

특별한 인연이 없음에도 나는 정일근 시인을 좋아한다. 그가 갖는 품 넓은 사랑과 작은 것에도 쏟아내는 열정을 보고 있노라면 흐뭇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그가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의 시집을 낸지 3년도 안되어 시집을 낸다. 이름하여 『紺紙(감지)의 사랑』이다. '경주 남산 연작 시집' 으로, 「慶州南山」을 부제로 단 23편의 작품이다.

이 시집의 원고를 받고 내리닫이 식으로 읽어 버린 후 (이것은 순전히 그의 책임이다. 그는 원고를 보내주고 받자마자 성급하게도 독촉을 해댔다. 박사가 되갖고 척 보면 모르냐고) 내게 얼른 다가오는 첫 인상은 그리움의 덩어리를 내내 버리지 못하고 애써 끌고가는 한 사내의 뒷모습이었다.

그것은 마치 소가 山을 끌고가는 우직한 몸부림같은 것이었는데 그 뒷모습이 애잔하여 나를 한동안 멍멍이게 만들었다. 멍멍한 가슴을 진정하여 몇 번의 정독을 거치면서 나는 그가 진정 찾은 사랑법이 결코 만만한 사랑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의 경주 南山에 대한 사랑은 못 이룬 사랑에 대한 열원이다. 작게는 개인사적인 얽매임에서 크게는 民草들의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 사랑은 경주 남산이 그러하듯 별처럼 뿌려진 수많은 절과 기러기처럼 날아가는 탑들과 같은 깊이와 넓이의 품새를 지녔다.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함이 없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친구 하나를 만나는 것처럼 보람된 일이 어디 있으랴. 그와 나는 80년대 초· 중반에 문단에 나왔다. 문학에 열뜬 시절이었고 어디서 누가 등단했네하면 소문이 짜하게 퍼져서 어디에 누구하면 다 알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서울에 있었고 그는 지방에 있었지만 서로에 대해 벌써 통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가 시를 쓰면서도 시조를 사랑하였기에 나와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공감대가 같았다. 시도 좋지만 시조는 문제점 투성이여서 이를 개혁해보고자 했던 <80년대 시조동인>에 나는 자연스레 그를 끌어들였고 자꾸 달아날려고 하는 그에게 시조도 써보도록 했다.

내 생각은 시조에 그와 같은 인재가 꼭 필요하다는 이유에서 였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80년대 중반 이후 우리는 쉽게 의기투합이 되었다.

한번은 그가 서울에 왔을 때 대학로에서 만났다. 까무잡잡하고 다리를 저는 시인 한 사람을 소개했다. 최영철 시인이었다. 그는 어느 출판사에 취직해 술과 가난을 씹고 있을 때였는데 우리는 대낮부터 술에 흠뻑 취했다. 그때 최영철 시인은 아무 택시나 잡고 '평양 만원, 신의주 만원'하고 외쳐댔다. 객기가 발동한 셈인데 정일근 시인은 '지엽아. 서울은 얼마나 좋노. 바람피워도 표시도 안 나고' 슬슬 눙치는 얘기들이 재미가 있어 깔깔대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했고 누가 누구를 도울 입장도 되지 못했다. 단지 문학만이 우리를 달뜨게 했다. 문학 앞에서 용감해질 수 있었다.

1989년인가 그가 「바다가 보이는 교실」 연작을 쓰면서 애면글면하던 중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 살고 있을 때 얘기다. 나는 모처럼의 여름 휴가에 가족들과 부산에 갔다가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멀리서 친구가 왔다고 식사 대접을 해야한다고 난리를 피웠다. 그러나 정작 그가 우리들을 이끌고 간 곳은 그럴싸한 음식점이 아니고 그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식사를 살 돈이 없다는 걸 나는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그의 집을 가보고 싶어졌다.

산동네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걸어 올라갔는데 나는 그의 집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엉성하게 블록을 쌓아만든 연립주택이었는데 집안은 완전히 찜통이었다. 내심 그가 나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는 것 같아 고마웠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중랑천 둑방에 살 때 '이상보'라는 아주 친한 친구덕분이었다. 중학시절 서울에 처음 올라가 우리 식구는 중랑천변 썩은 내가 진동하는 판잣집 단칸방에 살았다. 그때 상보라는 친구가 우리집을 가자고 몇 번을 졸랐지만 나는 여러 핑계를 대며 우리 집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은 그가 작정을 한 듯이 나를 앞세우고 무작정 우리 집에까지 쳐들어 왔다. 나는 홍당무가 되었지만 그 뒤로 우리는 서로를 터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그런 경험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정시인이 약간 멋적어 하는 것을 일부러 게의치 않았다. 부인이 직접 자갈치 시장까지 가서 낙지를 사왔다. 정말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부인이 정성스레 만들어낸 매운 낙지를 맛있게 먹었다. 저녁을 지내고 잠도 자라고 권했지만 우리 내외는 자리를 황급히 뜰 수밖에 없었다. 서로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저간의 사정을 미루어 다 짐작하고도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난을 그는 우회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보여주었다. 그 뒤로 우리는 적어도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되었고 문단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가정사의 시시콜콜함까지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가끔 전화를 하면 아직 직장이 안정이 되지 않아 고전하고 있는 것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당당함과 싱싱함이 배어 나왔다. 그 싱싱함으로 우리는 달려나가고 있었다. 가난은 단지 조금 불편한 것일 뿐 그렇게 우리의 삼십대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 뒤 나는 광주의 신설대학으로 가고 그는 울산으로 가서 문화일보 주재기자를 하게 되어 정말 바쁘게 서로들 연락을 하지 못한 채 몇 해가 흘렀다. 그의 살림은 울산으로 옮기면서 한결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광주에서 『시와 사람』과 『열린시조』계간지를 하면서 나는 다시 그와 연락이 되었다. 자연 『시와 사람』으로도 원고 청탁을 했고 『열린시조』는 편집에도 관여하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원수 갚음을 해야한다고 울산으로 놀러오기를 권했지만 쉽게 만나지지를 않았다.

그러던 중 앞서 얘기한 시집 『紺紙(감지)의 사랑』 해설을 엉겁결에 쓰게 되었고 그가 보고 싶어 제자들을 서너 명을 데리고 울산으로 넘어갔다. 그는 바쁜 중에 모든 일을 뒤로 밀치고 이 시의 무대가 된 경주 南山을 동행하며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그가 얼마나 남산을 사랑하고 있는지 실감이 갔다. 그는 경주 남산을 '미륵의 땅을 찾아 떠나가는 한 척의 배'라고 하였다.

별처럼 뿌려진 절과 기러기처럼 날아가는 塔을 (寺寺成長 塔塔雁行) 싣고 떠가는 서라벌의 거대한 배. 바람에 솜털같이 하얀 이삭을 모두 날려버리고 추운 겨울을 견디고 있는 산정 억새처럼 가벼운, 그렇지만 처처에 놓인 석불과 돌탑과 절터들… 그 천년의 흔적들 그래서 오를 수록 높고 무거운 山. 그가 달밤 산행의 멋과 맛에 취해 왜 '늑대 산악회'를 조직하여 보름달만 뜨면 남산을 찾아가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우리는 울산 현대 호텔에 묵었다. '야 일근아. 니 그 부산 그 찜통집 생각나나?' 씩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갔다온 뒤 얼마가 지났을까. 그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를 통화하게 되었다.
"지엽아, 니 목소리 들었으니 이제 죽어도 괜찮다" 다 죽어가는 소리였다. 나는 그때 대학에서 교무처장을 하고 있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였다. 다음날 잡힌 회의 일정을 다 취소하고 새벽같이 자동차를 몰고 울산으로 넘어갔다. 위험한 한 고비는 넘기고 있었다. 안도가 되긴 했지만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아 매고도 웃는 그를 보고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요행 그는 건강을 기적같이 회복했다. 다음해 광주에서 영호남 문학인 대회가 열렸을 때 우리는 당시 김미승 시인이 운영하는 까페 '편한 자리'에서 고재종, 안도현, 그외 몇몇 시인들과 밤을 꼬박 새우며 얘기꽃을 피웠다. 그날 그는 좌중을 휘어잡고 새벽까지 연신 배꼽을 잡게 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계속되는 그의 이야기는 조금도 지루하지가 않았다.

그 뒤 그는 시인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넘어와 특강을 요청하기도 했고 다산초당 촬영이 있다고 넘어오기도 했다. 강진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강진을 팔아먹고 살고 있다고 먼저 선수를 쳤다. 그의 데뷔작「유배지에서 온 정약용의 편지」가 유명세를 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해마다 그는 연말이면 부부 동반 모임을 해서 경상도에서 꼭 전라도를 다녀가곤 했다.

내가 식사를 한 번 사려고 해도 한 번도 허용을 하려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남을 줘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막무가내식 사랑을 가지고 있 다. 그는 내 강권(?)에 못 이겨 시조를 간헐적으로 썼는데 2000년에는 시조단의 중진에 주어지는 상당히 인정되는 한국시조작품상을 받기도 했다.

마흔 해 손 한 번 씻겨 드리지 못했는데
아들의 등을 미는 어머니 우리 어머니
병에서 삶으로 돌아온 내 등 밀며 우신다
벌거벗고 제 어미를 울리는 불혹의 불효,
뼈까지 드러난 몸에 살과 피가 다시 살아
어머니 목욕 손길에 웃는 아이가 되고 싶다
까르르 까르르 웃는 아이가 되고 싶다
어머니의 욕조에 담긴 어머니의 사랑이 되어
회귀의 강으로 돌아가는 살찐 새끼가 되고 싶다


쓰러지고 난 뒤 아픈 심경이 절절하게 와 닿는 작품이었다. 시상식이 있는 날 최영철 시인은 <백석 문학상>을 받아 나는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다.
돌 속에 숨은 천년 사랑의 비원을 안고 걸어가는 신라 사내. 시인 정일근. 상처 받아 찢기고 아픈 가슴들, 마치 경주 남산의 저 억새들처럼 여윈 등대고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에게 사랑을 한 고봉씩 퍼주고도 무엇이 좋아 웃는 저 사내. 그리움의 마음으로 길을 만들고, 늑대의 울음 같은 보름달 아니라도 니르나바의 촛불 한 자루로라도 넉넉하게 불 밝혀주는 진정한 시인 중의 시인. 이 대책 없이 뜨거운 사내.

그가 이제 소월 문학상을 받는다. 나는 내가 받은 것보다 정말 기분이 좋고 설렌다. 아직 바쁜 세월 탓에 마음놓고 술을 못했지만 이제 만나면 세월의 머리를 돌려놓고 서너 날 그냥 그대로 대취를 하고싶다.

(문학사상5월호)




▒ 정일근의 습작 노트 ▒

1. 슬픔이 시인을 만든다



나를 시인으로 만든 것은 "슬픔"이었다.그 슬픔에 힘입어 처음 "시인이 돼야겠다"는 꿈을 가진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그 전 해 4월,벚꽃의 도시 진해에서 나는 "아비 없는 자식"이 되었다.아버지가 없는 빈자리에 제일 먼저 슬픔이 찾아왔다.아버지의 생몰 연대는 길 위에서 끝이 났다.그날 아버지는 당신의 오토바이에 어머니를 태워 마산에 있는 친척 댁에 다녀오시는 길이었는데,길 위에서 택시가 아버지의 생을 덮치고 뺑소니쳐 버렸다.

의식불명이 되어 안방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고통스럽게 숨을 쉬고 계셨지만,군의관이었던 아버지 친구는 단호하게 사망진단을 내렸다. 사인은 뇌진탕.마산에서 진해로 출발하며 아버지는 자신의 헬멧을 어머니에게 씌어주셨다.그 헬멧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운명은 바뀌었다.두 분 다 허공으로 솟구쳤다 도로 위로 내동댕이쳐졌지만 아버지의 헬멧이 어머니를 구했다.그것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베푼 마지막 사랑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만이 나를 슬프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아버지가 떠난 자리에 가난도 찾아왔다."빚 갚으러 오는 사람 보다 빚 받으러 오는 사람이 많아" 아버지의 재산은 소위 "빚잔치"로 순식간에 사라졌다.TV도 사라지고 집도 사라지고 할아버지의 논과 밭도 사라졌다.할아버지와 할머니,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고모는 남루한 일곱 평 반 홉의 양철지붕 아래로 숨어들었고,어머니는 연탄 부뚜막에 나와 여동생을 재우며 밤늦게까지 술을 팔았다.

친구들이 TV를 보는 시간 나는 술을 날랐다.친구들이 고급 양장의 동화책을 읽던 시간 나는 안주를 날랐다.우리 반 고 계집애가 피아노를 치던 시간 나는 손님들이 술자리에서 부르던 이미자,배 호,나훈아의 슬픈 유행가나 군인들의 군가를 배웠다.

아버지가 없다는 슬픔이 나를 눈물 많은 아이로 만들었고,그 눈물이 나를 세상에 대해 조숙하게 처신하게 만들었다.그 시절 내가 친구들보다 뛰어난 것은 도박과 교과서에 나오는 시나 시조 외우기였다. 두 장의 화투 "끗발"로 승자로 가리는 도박으로 친구들의 돈을 따면 만화방에 하루종일 처박혀 있거나 중국집에서 자장면이나 야키만두를 사먹기도 했다.그리고 나는 시나 시조를 잘 외운다는 이유 하나로 담임 선생님에 의해 문예반으로 보내졌다.문예반 지도 선생님은 나에게 시조를 가르쳤다.

뜻밖에도 경남도 대회에 참가할 진해시 대표를 뽑는 백일장에서 나는 장원을 했다."산"이란 제목이었다.고백하자면,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개근상 외에 처음 "상"이라는 것을 받은 것이다.어려운 형편에 월부로 안데르센 동화전집까지 사주시며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시인이 되어 서른 초반에 홀로 되어 남매를 키우는 슬픈 어머니의 삶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나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미워했다.아버지의 부재로 우리 가족이 해체됐기 때문이었다.나는 아버지가 내 시 속에 등장하는 것을 금기했다.아버지는 그 때 내 손등에 났던 사마귀처럼 감추고 싶은 상처였다.시인이 되어서도 그 상처가 시의 소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도 아버지가 되고,아버지의 나이가 되어서 내 시가 아버지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내가 미워한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너무 일찍 길 위에서 끝나버린 아버지의 생이었다.나는 시로써 아버지와 화해를 시도하며 "아버지의 달걀 속에서 내가 태어나고/내 달걀 속에서 아버지가 태어난다"고 썼다.아버지란 큰 슬픔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2. 사랑도 시인을 만든다



그대,4월의 진해를 기억하는가.눈이 귀한 남쪽의 부동항 진해에는 4월이면 눈이 내렸다.그 작은 도시의 인구수와 비슷한 벚나무들은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4월이 오면 일시에 꽃을 피우고 바람이 불면 꽃잎을 눈처럼 뿌려주었다. 꽃이 피어서 질 때까지,그 기간 동안 "군항제"란 잔치가 열렸다.그랬다.그것은 축제라는 현대성을 띤 이름보다 잔치였다.

내가 5학년 1학기까지 다녔던 도천초등학교 주변에 만들어 진 벚나무 숲.어른들이 "사쿠라 마찌"라 부르던 그 곳이 벚꽃 잔치의 장이었다. 잔치의 하객은 후줄근한 양복에 중절모를 쓴 남자들과 한복과 고무신을 신은 여자들.그들은 장구와 꽹과리로도 최신 유행가의 가락을 맞추고 잔치의 끝은 언제나 술과 노래였다.그리고 잔치가 끝나면 그 파장 위로 자주 봄비가 내렸다.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새로운 봄이 찾아올 때마다 도시의 증가하는 인구처럼 늘어나는 벚나무들은 더욱 화사한 설국을 만들고 잔치는 축제로 변했다.분수탑 로터리에서 해군 군악대 연주와 의장대의 시범이 열리고 그 모습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축제의 밤이 찾아와 도심의 벚나무에 걸린 축등에 불이 켜지고,밤하늘에는 현란한 폭죽이 터졌다. 흑백TV도 귀했던 시절,4월이면 밤하늘에 상영되는 총천연색의 불꽃놀이를 보면서 유년을 보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생의 축복.그 4월에 나는 첫사랑을 했다.

중3이 되었다.나는 "눈물이 많던 아이"에서 "시를 쓰는 소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아버지를 잃은 나는 사람들이 꽃이 피는 축제의 기쁨만 알 뿐,꽃이 지는 축제 뒤의 슬픔은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나는 축제의 즐거움 보다 축제가 끝난 뒤의 비 내리는 파장을 좋아했다. 축제의 항구도시를 찾아 밀물처럼 몰려온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만들어 놓는 또 다른 바다에서 나는 작고 외로운 섬이 되어 홀로 있는 것을 좋아했다. 바람에,혹은 비에 떨어진 꽃잎을 밟으며 슬픔의 시를 쓰는 소년으로 변해버려,문예반 선생님은 나이보다 조숙한 눈물의 시를 쓰는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시곤 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진해남중은 바다가 보이는 산중턱에 자리한 하얀 건물이었다.나는 교실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것이 좋았다.남쪽으로 열린 창문을 통해 빛나던 푸른 바다와 작은 섬들.무시로 찾아오던 건강한 소금 바람.봄이면 운동장 아래 보리가 누렇게 익고,가을이면 등교길이 되던 코스모스 꽃길.그 시절 내가 한 첫사랑은 나에게 기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S.영문 이니셜로 호명할 수 밖에 없는 그녀.그 때까지 내 감정의 전부였던 슬픔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기쁨을 채워주었던 소녀.

우리는 4월,벚나무 아래에서 처음 만났다.진해역 옆 청산학원 앞에 서있던 벚나무였다.(불행하게도 그 나무는 지금은 베어지고 없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우리는 단숨에 가까워졌다. 나는 시를 쓰듯 사랑의 편지를 보냈다.그 동안 내가 썼던 어느 글보다 아름다운 글을 소녀의 주소로 보냈다.그 편지들은 내 최초의 사랑시편들이었고 소녀는 최초며,유일한 독자였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멀리 떨어져 있었던 우리는 그 때 아름다운 약속 하나를 했다.아침마다 라디오에서 알리는 7시 시보 소리에 맞춰 서로를 그리워하는 성냥불을 켜기로 했다.성냥불을 밝히며 나는 그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그러나 모든 첫사랑이 그러하듯 나의 첫사랑도 이별로 끝나버렸다.기쁨이 자리했던 가슴에 다시 슬픔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 슬픔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의 슬픔처럼 나를 눈물 많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다.눈물대신 나는 시를 택했다.사랑이,첫사랑이 내 시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 주었다.


3. 분노도 시인을 만든다



지난 91년 도서출판 빛남에서 묶은 내 두 번째 시집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에 수록된 시편들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 숨막히는 더위/고물 선풍기가 뿜어주는 더운 바람 앞에서/나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적의로 괴로워했다/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미성숙의 벽에는 우울한 시대의 푸른 곰팡이가 피고/숨어서 김지하의 시들을 몰래 읽으며/늘 혁명 전야처럼 살고 싶었다"

적의,우울한 시대,김지하,혁명 전야,.그런 말들과 함께 나의 성년식이 시작됐다.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담임선생님이 권유하셨던 K은행 입행 대신 대학진학을 선택했다.가장인 어머니의 가계는 여전히 가난했지만 아들의 장래가 걱정되셨는지 대학진학을 허락하셨다.

대학에 입학하고 내가 맨 처음 눈을 뜬 것은 시와 역사의 현주소였다.나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만이 시의 전부라고 알고 있었다.문예부장까지 지냈던 상고시절 진해에서 마산까지 버스 통학길이 지루해 가끔 박인환의 시들을 외웠고,내가 가지고 있던 시집은 김소월 시집과 백일장에서 부상으로 받은 윤동주 시집, 단 두 권뿐이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창작과 비평사에서 나오던 시집들을 읽고 쇠망치로 머리를 때리는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세상에 이런 시도 있으며,시는 이렇게도 쓰는구나.나는 비로소 작은 우물 밖을 나온 개구리였다.그 개구리에게 시의 세상은 참으로 넓고 험했다.그리고 그 때까지 내가 받은 문학교육이 편협됐다는 사실을 알았으며,그런 현실에 절망하기 시작했다.판금된 김지하 시집 필사본을 숨어서 읽으며 내가 살고 있던 시대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눈을 떠보니 교과서의 문학교육만 편협된 것이 아니었다.역사는 왜곡되고 있었다.어린 시절 시월의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삼국통일 되듯이 남북통일 되지요 라고 신나게 불렀던 유신의 실체는 남북통일을 막는 최대 장애였으며,유신 시대는 그 때도 계속되고 있었다.

진해에 있던 대통령 별장 덕에 어린 시절 대통령 행차 길에 나가 고사리 같은 환영의 손을 흔들며 좋아했던,중절모를 쓴 박정희는 일본 육사출신의 독재자였다.절망은 분노를 낳는다.그 분노 앞에서 나는 시와 역사에 복무할 것을 선서했다.

대학 1학년 나는 야학 선생이 되었다.고등학교 과정이었다.나보다도 나이가 많은,대부분 현장 노동자였던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들에게서 나는 더 많은 것을 배웠다.대학 강의실보다 야학에서 배운 것이 더 많았다.야학의 동료교사들 중에는 해군에 근무하는 학.석사장교들이 많았다.그들에게서도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문학평론가 정과리 형도 야학에서 만났다.그는 대학원을 마치고 해군사관학교 교수로 군복무를 했는데 야학에 동참했다.마산 양덕에 있던 그의 아파트 서재는 내 문학수업의 바다였다.사면을 빼곡이 채운 그의 이론서들이 나를 가르쳤으며 그와 밤을 새워 마시던 술이 나를 성숙시켰다.

그 시절 나는 자주 분노했다.그리고 분노는 혁명의 꿈으로 이어졌다.혁명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그러나 꿈은 꿈일 뿐,내가 택할 수 있는 혁명의 방법은 시일 수밖에 없었다.돌아보면 뒤틀린 현실과 바르게 흘러가지 않는 역사에 대한 분노가 시를 쓰게 만들었다.시로써 현실에,역사에 대해 혁명하고 싶었다.야학 7년을 보내고 나는 야학일기 란 연작시로 당시 무크지였던 "실천문학"을 통해 분노의 시인이 되었다.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분노도 없는 법.조국과 역사에 대한 사랑이 분노를 낳고 그 분노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그대,분노가 일면 터트려라.분노도 시인을 만들기 때문이다


4. 펜혹이 시인을 만든다



펜혹이란 말이 있다.컴퓨터 세대에게는 생소한 말일 것이다.펜이나 연필로 글을 쓰는 사람의 손에는 반듯이 펜혹이 남아 있다.오래 글을 쓰다보면 펜을 받치는 가운데 손가락에 혹 같은 굳은 살이 박힌다.그것이 펜혹이다.펜혹은 글쓰기의 상처다.그러나 그 상처는 시인을 만들어 주는 통과의례와 같다.나는 펜혹이 없는 시인의 손은 신뢰하지 않는다.펜혹은 시인에게만 남는 상처가 아니다.무릇 필업을 사는 사람들은 펜혹의 두께가 문학과 정신의 두께를 말해 준다.

대학시절 나는 내 손에 생기는 그 굳은 살의 이름을 몰랐다.단지 보기 싫고,불편했을 뿐이다.어느 날 스승을 뵈러갔다 놀라운 모습과 조우하고 말았다.스승은 칼로 펜혹을 깎아내고 계셨다.사면이 책으로 둘러 싸인 스승의 방에는 작은 판 하나가 놓여져 있고 그 위에 2백자 원고지가 펼쳐져 있었다.무더운 여름이었고,스승은 그 때 "한국문학사"를 집필하고 계셨다.푸른 칼날을 가진 연필깎이 칼로 가운데 손가락의 굳은 살을 베어내며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평생 펜으로 글을 쓰다보니 장지에 펜혹이 생겼어.자주 깎아내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어."

스승의 글쓰기는 그 펜혹이 대변해주었으며 스승은 펜혹으로 글쓰기가 불편해지면 칼로 굳은살을 깎아내고 다시 글을 쓰셨다.한 편의 논문이 완성되기까지,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스승은 얼마나 많은 당신의 살을 깎아내셨을까.나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느꼈다.스승의 펜혹은 산과 같은 모습이었고,내 펜혹은 흔적에 지나지 않았다.스승의 펜혹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글쓰기는 자신의 살을 깎아내는 고통이며,그 고통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그 이후 펜혹은 내 습작시대의 화두였다.나도 펜혹이 생기도록 시를 썼고,펜혹을 깎아내며 시를 썼다.진해시 여좌동 3가 844번지."옛집 진해"에서 습작시대를 보냈다.나는 대학생이었으며,아내와 두 아이를 둔 가장이었다.시대는 질곡의 80년대 초였다.역사는 표류하고 있었고,미래는 불투명하고 불안했다.취하지 않는 밤이면 연습장 위에,노트 위에 시를 적었다.모나미 볼펜을 꼭 잡은 손가락에 펜혹이 자라고 새벽이면 머리 위에 파지가 무더기로 쌓였다.

그 시절 모든 문학도의 꿈이 그러했듯이 나도 신문사로부터 노란색 신춘문예 당선전보를 받고 싶었다.그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였고 그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한 글쓰기가 내 삶의 전부였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학년말 시험을 포기하고 원고지 위에 피 같은 시를 써 투고를 했다.그리고 오래 동안 집에서 당선 전보를 배달해 줄 우체부의 오토바이 소리를 기다렸다.우체부는 찾아오지 않았다.새해 첫날이면 진해의 6개 중앙일간지 신문지국을 돌며 1월1일자 신문을 빠짐없이 구해 당선자 명단을 확인하며 절망했다.그 당시 유행했던 대학생 현상문예에서 함께 활동했던 하재봉 안재찬(류시화) 안도현 등이 신춘문예를 통해 화려하게 시인으로 등단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더욱 절망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시를 쓸 수밖에 없었다.시를 쓰는 일이 나에게는 전부였다.습작시대였던 대학시절,나는 시만 썼다.강의실에서도 고개 숙여 시를 썼으며 자면서도 시를 생각했다.펜혹은 점점 커졌으며 그 상처를 자주 깎아냈다.그리고 펜혹 덕분에 대학 4학년 겨울,나는 신춘문예 당선 전화를 받았다.

문예창작과 첫 강의에서 나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책을 손으로 읽어라"고 가르친다.펜으로 문학작품을 옮겨 적으며 손가락에 펜혹이 생기도록 문학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컴퓨터 시대라해도 누구도 펜혹이라는 상처가 없이 시인을 꿈꿀 수 없기에.


5. 부끄러움이 시인을 만든다



습작시절 누구에게나 병이 생긴다.이름하여 "신춘문예 병".그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손에 아름다운 상처 "펜혹"이 생기듯,이 병도 아름다운 병이다. 신춘문예.굳이 말뜻을 풀이하자면 "새봄의 문학예술"이다.그러나 신춘문예는 풀이하는 말이 아니라 그 자체로 뜻을 갖는 말이다.문학을 지망하는 사람이라면 습작시절이라는 통과의례가 있고,신춘문예는 그 통과의례 중 가장 치열한 과정의 다름 아니다.그 치열함의 끝에 당도하는 사람만이 누리는 영광의 다름 아니다.

신춘문예 병은 신문사마다 1면에 신춘문예 현상공모 사고를 내는 11월초쯤 발병한다.신춘문예라는 활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가슴이 뛴다.혈관 속에서 문학의 피가 끓는 소리가 들린다.문제는 그런 흥분된 상태가 응모 마감일 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계절은 언제나 가을이 끝나가고 겨울이 서서히 찾아오는 때쯤이다.심장과 피는 더워지지만 몸은 추워지고 등은 불안감으로 굽어진다.말수도 줄어들고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진다.가끔씩 왜 그렇게 긴 한숨이 터져 나오던지.

그 시절을 겪은 나의 대학성적표는 감추고 싶은 흉터와 같은 것이다.그것은 신춘문예 병이 준 후유증이었다.고백하자면 아슬아슬하게 낙제를 면한 점수다.졸업학점이 1백60학점이었던 시절,신춘문예 병 때문에 펑크난 학점을 맞춘다고 4학년 2학기에도 21학점을 신청해야만 했었다.

신춘문예의 마감과 학년말 시험기간은 늘 일치했다.나는 그 두 길 앞에서 늘 미련도 없이 신춘문예의 길을 택했다.친구들이 도서관에서 학년말 시험준비로 밤을 새울 때 나는 신춘문예 응모작품을 준비한다고 밤을 새웠다.유신 시대,군사독재 시대에서 학점을 얻기보다 신춘문예 당선시인 이란 이름을 얻고 싶었다.언젠가 가지게 될 내 첫 시집의 약력에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빛나는 한 줄을 남기고 싶었다.사범대학을 졸업하면 누구에게나 나오는 2급 정교사 자격증보다 먼저 시인이 되고 싶었다.

아직 그 시험답안지들이 남아있을까.시험문제와는 무관한 글들만 써놓거나 백지로 제출했던 답안지들.월영동 449번지,나의 사랑 나의 대학.사범대학으로 오르던 돌계단,지칠 때마다 바라보던 푸른 합포만.내 기억 속의 풍경들의 계절은 언제나 그 겨울이다.사범대학 빈 강의실 한 구석에서 웅크리고 시를 쓰던 동면 직전의 곰 같았던 내 모습.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리며 우편함을 찾아가면 복도 쪽으로 눕던 긴 그림자.환청처럼 갈가마귀 울음소리 들리던 시절.

더워졌던 피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는 기다림의 시간이 찾아오는 것도 신춘문예 병 후유증이다.마감도 끝나고 시험도 끝나면 할 수 있는 일이란 낮에는 당선통지를 기다리는 일과 밤이면 술을 마시는 일 뿐이었다. 우체국에서 작품을 보내고 돌아와서부터 당선연락이 올 때까지의 그 막연한 기다림.폭음과 함께 했던 확신과 장담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고 불안해지고 마침내 허탈해진다.크리스마스 이브까지 당선 연락이 오지 않으면 더 이상 기다리지 말라는 동병상련 하는 도반들의 충고에도 혹시,혹시 하며 기다리다 절망하다 받아보는 1월 1일자 신문.그 신문에 실린 그 해 당선자들의 얼굴사진과 빛나는 작품들. 당선 시들을 읽은 뒤에는 지금까지의 기다림 보다 더 큰 부끄러움이 엄습했다.

그렇다.그 부끄러움이 나를 성숙시켰다.현재의 내 시가 어떤 자리쯤에 서있는지를 확인시켜주었던 부끄러움이 내 시의 뺨을 후려쳤다.그리고 혹독한 추위의 겨울이 시작되고 뛰어난 그해 당선 시들을 읽으며 언젠가는 찾아올 내 문학의 봄인 신춘 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대,그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문학을 꿈꾼다면 그 꿈은 욕심에 불과한 것이니,다시는 신춘을 기다리지 마라.



그 마지막엔 시만이 시인을 만든다. 신문사는 새로 입사하는 수습기자에게 기사 작성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종이밥을 먹던 신문기자 시절,어느 누구도 나에게 기사 쓰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이 들어 입사한 신문사라 후배를 선배로 모시고 경찰기자 생활이 시작됐다.1진은 서울 중부경찰서 기자실 소파에 앉아있고,나는 남대문,용산경찰서를 들개처럼 싸돌아다녔다. 내가 근무하는 신문사가 석간신문을 제작하고 있어 새벽같이 종합병원 영안실과 경찰서 형사계,유치장을 돌고 1진에게 간밤의 사건과 사고를 전화로 보고한다.그러면 1진은 뉴스가 될만한 것을 기사로 만들어 즉시 전화로 부르라고 한다.

교과서에서 배운 6하원칙을 적용하여 기사를 작성해 전화송고를 하면 욕설이 쏟아진다.새벽부터 나이 어린 신문사 선배에게 듣는 욕은 사람을 참담하게 만들어준다.남쪽에 두고 온 가족생각이 나고,같이 욕설을 퍼붓고 때려치워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1진의 지적은 정확했다.내가 놓친 부분을 보지도 않고서 정확하게 찾아냈다.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다.

1진은 그렇게 욕설로 지적을 할 뿐 3개월의 그 지독한 수습기간에 신문기사를 어떻게 쓰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문화부 기자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강원도 백담사에 유배돼 있던 전두환 전대통령이 법회를 연다고 해서 취재지원을 나간 적이 있었다. 경쟁사의 기자들과 함께 취재를 하고 나는 끙끙대며 2백자 원고지 5장 정도 분량의 스케치 기사를 작성해 팩스로 보냈다.그런데 경쟁사 모 선배기자는 기사를 작성하지도 않고 메모만 보고,그것도 전화기를 들고 짧은 시간에 25장 분량의 기사를 송고하는 것을 보고 나는 놀라고 말았다.그리고 과연 나는 신문기자의 자질이 있는 가하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다행히 내 그런 좌절을 안 한 선배가 "신문기자의 교과서는 신문이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그 때서야 나는 신문을 통해 신문기사 쓰는 법을 새롭게 배우기 시작했다.매일 매일 쏟아지는 신문을 펴놓고 좋은 기사는 옮겨 적어보고,사건과 사고의 유형별로 좋은 기사들을 스크랩해 참고서를 만들었다.신문 속에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이 숨어있었다.

시를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시 창작의 최고의 교과서는 시고,시집이다.그것도 좋은 시고 시집이어야 한다.앞의 연재에서도 잠깐 언급한 적이 있지만,나는 시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좋은 시집을 권하고 무조건 필사할 것을 숙제로 내준다.눈으로 읽는 리듬과 손으로 쓰며 배우는 리듬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나도 신춘문예 당선 전까지 참으로 많은 선배시인들의 시를 옮겨 쓰며 시 쓰는 법을 배웠다.시인이 되려는 제일 마지막 관문은 선배들의 좋은 시와 시집이 나에게 시가 무엇이며,시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내 친구 최영철 시인은 내 시집 발문에 나를 "타고난 시인"이라고 쓴 적이 있다.너무 일찍 배운 슬픔으로 감성은 타고 났을지 몰라도 나 역시 "만들어진 시인"임을 고백한다.손에 펜혹이 생기도록 좋은 시를 옮겨 적는 연습을 통해 시를 배웠다. 시인이 되는 교과서는시인들의 시에 있고,시집에 모여 있다.시인은 시험을 통해 자격증을 받는것이 아니다.선배 시인들의 인정을 통해 시인이 되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아주멀리서혹은엉뚱한 곳에서 시인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이다.

나는 앞에서 많은 것들이 시인을 만들어 준다고 했다.그런 것들 중 제일 마지막에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 준 것은 시다.시인이 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후배라 할지라도 좋은 시를 발표하면 한 번 옮겨 적어보며 그 시의 비밀을 찾으려고 한다.

시인을 꿈꾸거나,시인인 그대여.시를 읽자.시집을 읽자.그것이 시인을 만들고,시인의 깊이를 더욱 깊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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