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권정일
199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2003년 국제사화집 <숲은 길을 열고> 발간. 시집 - 마지막 주유소 (2004년 현대시)
얼룩진 생生의 뿌리
구모룡 (문학평론가.한국해양대 교수)
한자 '生'은 나무의 형상을 본 딴 글자이다. 나무는 동서고금에 걸쳐 두루 많은 이들이 칭송해 마지 않은 자연 사물 가운데 하나인데,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자라는 모습에서 생명현상의 전범으로 그려지기에 족했을 것이다. 이러한 나무 표상에는 불안정한 인간의 시선이 투영되어 있다. 땅과 하늘 사이에서 불안하게 부대끼는 인간의 중간적 위상에서 나무의 견고한 안정을 희구하거 나 그에 의탁하는 의식과 사유를 갖게 된 것이다. 권정일의 시에서 나무가 지배적인 이미지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시에서 나무는 중요한 메타포로 등장한다. 무엇보다 그녀가 생의 근원인 뿌리를 탐색하고 있는 탓이다. 그녀의 시에서 뿌리는 자아, 기억, 무의식, 자연 등에 상응한다. 줄기와 잎들이 마르고 썩는 불모의 삶에서 뿌리 찾기는 자기 찾기이자 자기 치유의 방법이다. 그녀의 꿈은 튼튼하고 건강한 뿌리로부터 견고한 줄기와 무성한 잎들을 거느린 나무를 기르는 것이다. 이러한 꿈은 가결 다음과 같은 시에 잘 드러나 있다.
허공이 집인/제 몸이 집인/綠陰이 집인/나무는 집을 짓지 않 는다/굵고 둥근 기둥 하나/비틀리고 거칠거칠하지만/한평생 동 안 그 모든 허공에/살아 있는 집, 허공에 집을 짓는다/허공은 허공에 걸리지 않는 것/바람이 불고/가끔 상처 입는 집도 있지 만/허공을 손질하면 금방 새집이 된다/흘러나오는 푸른 이파리 의 휘파람이 지붕이다/휘파람 처마 밑으로/휠체어가 다녀가고/ 아버지들 녹색으로 물들다 가고/밤에는 보름달보다/둥근 가시내 들 수다가 모였다 가고/지붕 끝에 가끔은 늙은 한숨도 걸어 놓 는다/닫힌 구름 몇 장 마음에 걸어/해마다 방문객이 늘어나는 파란 대문의 집을 짓는다//푸른 한나절이다
-[나무는 허공에 집을 짓는다] 전문
이 시에서 나무는 넉넉한 집으로 대지적인 포용의 지표처럼 읽힌다. 몸이 집인 나무는 휠체어를 탄아이들과 병자들, 고단한 '아버지들'과 둥근 가시내들'에게 휴식과 몽상의 자리를 내어준다. 여기서 나무는 타자를 보살피고 사랑하는 어머니의 속성과 닮아 있다. 그런데 권정일의 시에서 이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은 흔치 않다. "처음부터/직립이란 없었다"([渡河歌 2])라고 단호히 진술하고 있듯이 그녀의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동하는 존재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늙은 집] 에서 시사하듯 삶의 얼룩들에 시선을 던진다. 다시 말해서 그녀의 나무는 온전하지 못하며 따라서 그 뿌리를 향한 탐색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녀의 시법詩法이 다음과 같은 구절과 연관된다 하겠다.
혼자/조용히 제 속의/어둠을 터트리기까지/뿌리는/얼마나 많 은 화염을 받아 냈는지/세상 밖으로/솟구쳐 있다 - [과녁] 부분
이처럼 그녀의 시적 관심은 안팎의 '어둠'과 '화염'을 향해 있다. 그녀의 나무는 '어둠'을 터트려야 하고 '화염'을 받아내야 하는 '뿌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줄기와 잎 또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녀의 시적 관심에서 줄기와 잎에 해당하는 일상적 삶이 먼저 인가 아니면 이들의 배후가 되는 뿌리가 먼저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 기원은 뿌리이지만 이들은 빛과 그림자처럼 사물의 양면을 이룬다. 하지만 일상적 삶에 대한 자각에서 촉발되어 뿌리 탐 색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일상적 삶에 대한 그녀의 인식지평을 먼저 이해하고 다음으로 그녀의 뿌리 탐색을 따라가 읽고자 한다. 삶에 대한 권정일 시의 주요 색인들은 소통부재, 고갈, 부패, 절망, 추락, 정체 등의 의미를 내포한 이미지들로 열거된다. 그녀의 시적 자아들은 타자와의 소통 부재로 절망하거나 이와 관련한 고립으로 고갈되고 정체되는 생의 고통을 드러낸다. 시인의 꿈은 사물과의 궁극적인 '교감'이다. 그러나 그녀가 처한 삶의 정황은 이러한 꿈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누군가에게 말을 해야 했다/아무도 귀를 열지 않는/허공에 갇힌 말의 갈기/모래바람만 잉잉거렸다"([交感]). 다음의 인용시에서 "너와 나 사이, 벽은 살아간다"라는 구절과 같이 그녀의 시에서 반복되는 '벽'의 이미지가 말하듯 관계의 단자아를 응시하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아응시는 자폐적인 경향을 갖게 하며 비의적 문법을 탄생시키게 한다.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헛돌던 슬픔이 벗겨지고/닳아빠진 몇 줄의 기억까지 북북 찢 겨 나가고/뽑아 낸 못, 빈 구멍이 나를 들여다본다/방부제에 절 은 욕망 사이 종량제 비닐봉투/상처 사이 구멍/오열 사이 복통/ 부엌칼 사이 면도칼/사이/사이/사이/벌거벗은 동굴의 침묵/처절 하게 덧난 벽의 상처에 나를 바른다/은폐된 벽의 알리바이/너 와 나 사이, 벽은 살아간다 - [사이:도배] 부분
이처럼 관계는 비어 있거나 침묵하거나 은폐된다. "빈 구멍이 나를 들여다 본다" 구절의 상황처럼 타자는 공허하다. 공허한 타자가 나에게 상처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관계의 진정성이 찾아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은폐된 벽의 알리바이"가 말하듯 관계는 봉합될 따름이다. 권정일의 시는 이렇게 봉합되는 관계를 흔든다. 관습과 상식과 이데올로기는 진실을 억압한다. 진정성을 추구하는 자아는 이들을 해체하고 삶의 위악과 허위를 드러낸다.
1)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나를 감시하는 감옥/비루먹은 장 미 가시보다 악착같아서 입 안의/누추한 검은 혀, 너울거리다/ 입구마다 도사린 음모는/버림받은 그, 그녀의/헐벗은 몸뚱이를 여기저기서 칼질한다. - [검은 혀] 부분
2) 한 두 사람씩 떠나가면 헐렁해져 몸안에 거푸집을 짓는 그녀, 기억력 떠난 낡은 구두들만 산다 새 구두 한 켤레만 선반에 올려 놓는다 그 구두, 가끔 새들새들 죽어가는 희망을 가져다 준다 그녀는 그 구두를 마지막 주유소라 부른다//비는 그저 오는 게 아니다/가버린 이름과 남은 몇 개의 이름 사이로 온다// 혓바닥만 남은 욕망/파도 속에 갇힌다
-[마지막 주유소] 부분
3) 아무것도아닌, 내것이아닌, 헛간처럼/살아온, 전생이기생인, 광기를 팔자라/고믿는, 정물로만서있는곺잎...//활활, 곧 꺼져 내 릴 올가미...올가미/다 타버리지 않고서는 피어날 수 없는/온 몸 에 돋는/꽃잎을 찢어야 하는/저 처형되는 불꽃
4) 아픔이 아픔을 껴안듯/썩어 문드러진 살(肉)을/물러터져 진물 이 나는 살을/속부터 문드러져 쭈글한 살을/부비고 핧으며/모락 모락 뜨거운 꽃 피워 내고 있다/상처에 상처,/상처를 끼워 맞추 면 싹이 나고 잎이 나고/저렇게 뜨거워져서/붉고 노란 독을 내뿜는 것인가/살에 살이 스미어/살에 독이 스미어/뭉클하게 썩는 냄새를/오랫동안 잊지 않을 것이다/남은 生/더 뜨거워지면/온전 한 믿음으로 돌아가는 - [살(肉)에 스민 독] 부분
1)에서 세계는 '감옥'으로 인식된다. 원형감옥처럼 감시를 피할 곳이 없다. 이러한 감시는 '그, 그녀의' 신체에 각인된다. '검은 혀'로 표상되듯이 몸 또한 감옥에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세계의 음모 에서 자학과 위반은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법이 된다. 삶의 문제는 세계라는 정황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정황을 관류하는 통시적 시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2)처럼 고갈은 일상의 정황이자 볼모로 향하는 과정이다. 이는 [봄]에서 말한, "통로도 없이 새어나가기만 하는 생"과 다르지 않다. 진정성 추구는 이러한 고갈과 불모에 저항하는 가운데 이뤄진다. 권정일은 시집의 표제가 말하듯 이러한 삶의 과정을 '마지막 주유소'라는 한계 설정으로 설명한다. 시집의 [서문]에서 그녀는 "희망이라는 病을 찾아 마지막 주유소로 가는 중"이라고 시작의 동기와 과정을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일상에 저항하는 시인의 기투는 그리 과격한 편이 아니다. 즉 완벽한 절연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어가는 희망", "혓바닥만 남은 욕망" 등이 시사하듯 고갈의 일상을 수락한 가운데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설의 양상을 보인다. 그녀는 '거푸집'같고 '헛간'같은 삶의 남루를 벗어나 '정물'같은 가화假花의 생을 꽃피게하는 길을 광기, 자학, 자기연소 등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길찾기를 [모래기둥]은 다음처럼 표현하고 있다: "치명적으로/슬픈 오로라/서서히/흰 뼈가 드러날 때까지/아아 소용돌이!/일체의 꽃장식을 떼어냈다". 그러나 3)에서 읽을 수 있는 역설적 자기 확인의 방법은 지속적이거나 근본적일 수 없다. 이것은 4)가 말하고 있듯이살에 독을 스미게 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부패와 생성이 공존하고 추락과 비상이 함께 한다: "비상하는 꿈과 짐찍처럼 떨어지는/꿈을 꾼다"([암흑시대]). 이러한 시인의 존재인식 방법은 자해를 통한 자각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녀는 "살에 스민 독"을 기억하면서 "점점 삭아 내리는 뼈아픈 시간"([6시 5분전])을 견뎌내며 생에 대한 믿음을 확인한다. 다시 말해서 볼모와 부패와 소멸을 내용으로 하는 생의 얼룩들을 껴안고서 생의 뿌리를 탐문한다. 생의 현상이 얼룩이라면 생의 뿌리는 이러한 얼룩의 배후이다. 뿌리의 욕망에 따라 얼룩 또한 변화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권정일의 시는 압도적인 일상에 파열음을 내는 방식으로 시작(始作/詩作)된다. 이러한 파열음은 때론 자학적이고 때론 공격적이다. 그녀 가 시의 뿌리이자 생의 뿌리를 탐색하는 과정은 다양하다. 위반과 탈주가 추구되는가 하면 기억을 되새기거나 무의식의 대지를 헤집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듯 서로 다른 양상들은 하나의 지향으로 집약된다. 그것은 의식의 근원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이다. 여기에서 권정일 시의 강점이 찾아진다. 그녀가 궁극적인 지향을 다각적인 방법으로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5) 벽을 사이에 두고/고양이는 한밤중 발톱을 안으로 감추고 운다/어둠의 진한 냄새가 몸서리치도록 역겨워/숨겨진 관능의 불길을 주체할 수 없어/벌거벗은 바람의 속살을 핥으며 운다// 붉은 울음은 위태하다 - [고양이] 부분
6) 마음 다친 자들아/마음의 끝/육신의 끝에 서서 보라/살아 있 어서,/끝이 있어서,/노래할 수 있지 않느냐 - [땅끝에 서서]부분
7) 노을을 듣는다//밖을 내다본 적 없는 내 창을 보고 말았다/ 나, 진다/내 몸 속에 이미 지고 없는 별을 찾아/영원히 잠들지 못하는 저 물고기가 허공을/헤험쳐 다닐 동안/나를 깨워 나를 바라본다 - [노을을 듣다] 부분
5)에서 시인은 근원적인 욕망의 소리를 드는다.일상에서의 소통 부재가 낳은 날카로운 감각의 결과이다. 자폐적 감각의 산물이기에 때론 비의적 경사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붉은 울음은 위태하다"라는 구절에서 애써 현실과 균형을 이루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균형의지는 경우에 따라 죄의식과 거세 콤플렉스를 수반한다. 가령 [겨울 산] 의 "한 올 남은 변명마저 삭박을 마치고 있었다/그 많은 수식어들 육탈하며 죄,죄,죄,/터진 살갗과 소지로 가장 깊은 추위를/안으로 불러들여 뿌리는 펄펄 끓고 있었다"라는 구절이나[서랍 뒤지기]의 "실뱀들이 우글거리고 그 정제된 죄/싸구려 옷 한 벌의 허물 속에서 쓰러져 잠든/사랑의 붉은 심장/하얀 스치로폴 박스 안에서/자꾸/자꾸/자꾸/아팠네"의 구절들에서 죄의식과 자학적 거세 콤플렉스를 읽을 수 있다. 생이 곧 죄라는 의식은 살아 있음을 원초적으로 느끼는 데서 비롯한다. 그래서 죄의식은 곧 생의식이고 생의 의지이다. 이러한 생의 의지가 가장 극명해지는 대목은 말할 것도 없이 죽음에 대한 인식에서 나타난다. 6)이 제시하고 있는 극단의 상상은 존재를 쇄신하는 방법이자 시적 발상의 토대이다. 몸과 마음의 끝에 서서 삶을 보는 시점은 시의 본질적인 기원과 연결된다. 이러한 시점에서 자아와 사물이 제대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극단의 상상은 늘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없다. 이는 시쓰기의 기저를 형성하는 발상의 뿌리일 따름이다. 자아와 사물의 정체 탐구는 7)처럼 수련에 다를 바 없다. "노을을 듣는다"라는 공감각도 압권이지만 이 시에서 더욱 주목받는 바는 "밖을 내다본 적 없는 내 창을 보고 말았다"라는 선언에 이어지는 자기 탐구의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이 있기에 여성시인으로서 권정일의 시가 보이는 탈주나 출구 찾기가 의미있는 것이다. 기억은 가장 중요한 자기 탐구의 방법이다. 권정일의 시에서 기억의 대상인 가족사는 의미심장한 바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가족사에 대한 시인의 고백은 억압을 전제한다. 엄밀히 말해서 이는 서사 의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그녀의 시에서 가족사는 은유로 변용되면서 시적 인식의 지평을 형성한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시인의 자기 정체성 탐색과 맞물려 있다.
연못을 내 몸에 들였다//내가 연못에 들앉았다//나는 출타 중이고 까치소리 들린다//까치는 노래하는데 나는 울음으로만 듣는다//내 몸과 영혼의 무게, 연못을 흐르는 구름에 매달아 놓고 어머니를 매단다 술집에 매달아 놓은 아버지,녹물이 흐른다 녹 물을 뿌리며 껍질을 벗는다 뼈를 벗고 어머니를 벗고 아버지를 벗고 남은 것 모두 벗고//다시, 연못을 본다/ 헝클어진 매듭의 허물,//새털구름 연못으로 들어간다 - [다시, 연못을 본다]
이 시에서 '연못'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기억의 저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삼촌이 죽은 '저수지'([저수지])와도 연관될 수 있다. 여하튼 시 속의 주인공이 '연못'을 매개로 '아버 지'와 '어머니'를 만나고 그들과 헤어진다. 그리고 '연못'에 들 때와 나올 때 서로 다른 자아의 위치를 확보한다. 인용시가 시사하듯 시속의 주인공은 부모의 엇갈리는 삶으로 고통을 받았음에 분명하 다. "술집에 매달아 놓은 아버지"는 [위대한 상속]이나 [붉은 항아리]에서 알 수 있듯 부유하는 삶을 산다. 인용시와 [저수지]를 겹쳐 읽으면 이러한 아버지의 선택이 삼촌의 죽음과 연관성이 있 을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삼촌과 아버지는 모두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들이다. 이러한 가운데 어머니와 '나'의 삶 또한 슬픔으로 채색된다. [장녀]가 말하듯 "이복의 아픈 무늬"를 견뎌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인용시는 상처를 기억함으로써 치유하는 과정을 보인다.
오금을 펴지 못하는 함석쪼가리다 제 이름도 모르고 붉은 꽃 전신에 매달고 상처를 따라//물길러 가던/물길어 오던//꽃 잎을 자꾸 떨어뜨린다 그 꽃잎, 초경 치른 가시내의 부끄러움이던 아버지 대금 가락에서 피는 달빛이던 어머니 눈물의 어리굴젖 켜켜이 삭아 누그러진//탈모증 같은/탈모증 같은//아도 빠지고 있는 한 쪽 눈썹 붉디붉은 눈물을 부스럼처럼 달고, 찌그러져 있다 한때 통통 요란한 소리를 냈던 그 소리들도 찌그러져 다 퍼내고 없는 저 共鳴. 가장 안 쪽에 숨어 있던 어둠도 편안하게 찌그러져, 온전할 수 없기에 살아온 만큼의 죄 돌아보면 어디에도 없는//문둥이 같은/문둥이 같은 - [양동이] 전문
이처럼 권정일은 기억의 '연못'에서 물을 기른다. 이는 상처에 직면하는 것이자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를 "깊다는 것, 상처가 고요해진다는 것이다"([저수지]), "더 깊이 파헤칠수록 상처가 치유되지"([이건 믿음이야])라고 말한다. 그녀의 시쓰기는 이처럼 뿌리를 탐색하는 과정에 있다. "대물림인지/내림굿인지/마지막 한 잔은 누구를 위해서라도 뿌리지 않는다/끝까지 다마셔야 일어선다/남해바다까지 떠내려온 나는 또,/다시 권주가로 떠돈다/관절 마디마디 아버지의 투명한 노래로 반짝이며"([위대한 상속])라는 구절이 시사하듯 '아버지'는 그녀에게 시쓰기의 기에 해당한다. 그녀는 이러한 가족사의 '아버지'를 기원으로 삼으면서"아버지,/아버지, 아버지들이 줄고 있다/아버지들이 지하도 벽화를 이룬다"([포스트모던, 신문읽기])라는 표현에 이르러 부유하는 세상을 비판적으로 읽는 좌표로 변용되기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달고기] 등의 시에서 근원적인 모성성으로 심상한다. [달고기]에서 '어머니'는 순환하는 여성의 생명현상을 표상한다. '아버지'로부터 상처 받는 고유명사의 여성이 아니라 사랑과 보살핌의 대명사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근원으로서의 여성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 잘 나타난다.
우포늪에 와서야/소리 하나를/숨죽이며 내통하는 은밀한 소리를/제 깊이만큼 움직이는 침묵의 소리를/얻었다//왁자한 세속의 소리를 걸러 내느라/오래도록 저물지 못하고/깊은 속내로 들끓는 넉넉한 품을/얻었다//서로를 끌어당기지 못하고 우리는/갈라지곤 했는데/우둘투둘한 상처 만들곤 했는데//연초록 풀 위로 눕는 바람의 불손을/내 눈빛에 놀란 재두루미 선회하는 공포까지도/조용조용 서둘지 않는, 늪은/중심으로 중심으로 끌어 모으고 있었다/끌어 모아 연신 하나의 소리로 지켜 내고 있었다/한 어미의 자궁에서 맨발의/어린것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우포늪에 와서야/제각각 소리들이/중심으로 모이면 한 뿌리를 내 린다는 것을/얻었다 - [소리 하나를 얻었다] 전문
말할 것도 없이 이 시를 가족사의 '어머니'의 발전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지만 "소리 하나를 얻었다"라는 선언이 말하듯 시인이 발견한 시적 중심이 모성에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시에서 모성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이는 "한 어미의 자궁에서 맨발의/어린것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제각각 소리들이/중심으로 모이면 한 뿌리를 내린다"라는 표현에 잘 드러나 있다.그리고 이러한 모성성은 "이렇게 자꾸 몸 불면 어느 순간/세상이 모두 달이 되는 거다야/다시 저며 낼 어머니가 있어 나는 든든하지만 /달고기가 될 어머니/바다 속 깊이 자매질할 어머니/달고기처럼 허물어질 것이다"([달고기])라고 표현되는 기억 속의 '어머니'가 지닌 품성과 거리가 없다. 이러한 점에서 모성성은 권정일 시의 가장 든든한 뿌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뿌리는 인용시에서 '우포늪'이 라는 구체적 사물과 만나 전경화된다. 모성성과 더불어 생명의 근원적인 자발성은 시인을 이끄는 시적 욕망의 뿌리이다. 가령 [떨림]이 말하고 있는 '나비'와 '감나무'의 교신처럼 완벽한 만남은 그녀의 시적 목표이자 시쓰기의 계기이 다. 일상과 현실은 자연과 인간이 내포한 근원적인 자발성을 가로막는 '벽'이다. 시인이 대면한 시적 정황은 실제 '벽'으로 상징되는 소통 불능일 가능성이 높다. 앞서 '우포늪'은 흔치 않는 발견의 기회일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권정일의 '벽'이 정황을 만드는 구체에 충실한 시쓰기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 점을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시적뿌리나 생의 뿌리는 어디까지나 궁극적 탐구의 대상일 뿐 미리 주어지는 전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것의 존재가 시작의 계속성을 보증한다는데 있다.
천상과 지상의 경계에 섰다/흐린 하늘이 보였다/모든 얼굴들을 감싸 쥐고/풍미하던 한 시대의 기막힌 낙하/저 잎들의 침묵 은 결핍이 아니다/결국 제 몸 곁이다/수북이 겹쳐 뿌리를 데우고 있었다/다 비움이다 하지 말자/다시 오기 위해/새 몸을 얻기 위해/왜 고통이 없겠는가//듣고 있다/잎들의 난분분한 고백// 날마다 그들을 덮어 주러 갔다 - [겨울 잎들]
이 시처럼 권정일 시인의 시적 위치는 경계의 구체성을 견지한다. 따라서 섣부른 화해와 초월을 지향하지 않는다. 여전히 얼룩진 삶의 곁에서 역설의 문법을 깊게 한다. 그녀는 "꿈꾸는 길은 깊은 수렁"([길은 꿈꾼다])이라고 말한다. 그녀에게 이러한 '수렁'은 연못'이 되고 '바다'가 되고 생명의 기원이 된다. 그러나 성급하게 기원으로 회귀하지 않는다. 과정의 진실은 권정일의 시적 전도를 밝게 한다. 그녀는 기꺼이 '결핍'과 '비움'과 '고통'을 감내한다. 그럴 때 새 몸을 얻는 낙엽처럼 풍요와 채움과 환희가 함께 한다:"마음의 모공에서 부패가 진행되고 있을 때,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끌려 숲을 찾아간다 내 발 밑에 뿌리를 내리고 섰는 숲"([숲]). 얼 룩진 생의 뿌리, 권정일의 시가 던지는 의미이다. 그녀가 얼룩의 구체성을 놓치지 않으면서 뿌리 찾기의 진지성을 견지하고 있는 데서 새로운 시적 전망의 '숲'을 키워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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