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서정주
1915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하여 중앙고보와 중앙 불교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첫시집 『화사집(花蛇集)』(1941) 이후 『귀촉도(歸蜀途)』(1948),『신라초(新羅抄)』(1961),『동천(冬天)』(1969),『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산시』(1991)등 다수의 시집과 시전문 동인지『시인부락』을 간행하였다.
조선청년문학가협회·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동국대 교수를 역임하였으면 5·16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수상하였다.
----------------------------------------------------------------------------------------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미당(未堂)이다.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高敞)에서 태어나 고향의 서당에서 공부한 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6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면서 등단해 같은 해 김광균(金光均)·김달진(金達鎭)·김동인(金東仁)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하고 주간을 역임하였다. 1941년 〈화사(花蛇)〉〈자화상(自畵像)〉〈문둥이〉등 24편의 시를 묶어 첫시집 《화사집》을 출간하였는데, 이 무렵에는 악마적이고 원색적인 시풍과 토속적 분위기가 짙게 풍기는 인간의 원죄(原罪) 의식을 주로 노래하였다.
그러나 1942년 7월 《매일신보》에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창씨 명으로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친일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후 1944년까지 친일 문학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에 관여하면서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 《인보(隣保)의 정신》(1943), 《스무 살 된 벗에게》(1943)와 일본어로 쓴 시 〈항공일에〉(1943), 단편소설 《최체부의 군속 지망》(1943), 시 《헌시(獻詩)》(1943), 《오장 마쓰이 송가》(1944) 등 여러 편의 친일 작품을 발표하였다.
1948년에는 시집 《귀촉도》, 1955년에는 《서정주 시선》을 출간해 자기 성찰과 달관의 세계를 동양적이고 민족적인 정조로 노래하였고, 이후 불교 사상에 입각해 인간 구원을 시도한 《신라초》(1961), 《동천》(1969), 토속적·주술적이며 원시적 샤머니즘을 노래한 《질마재 신화》(1975)와 《떠돌이의 시》(1976) 외에 《노래》(1984), 《팔할이 바람》(1988), 《산시(山詩)》(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등을 출간하였다.
작품 활동 외에 1948년 《동아일보》 사회부장·문화부장, 문교부 예술국장을 거쳐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후 조선대학교·서라벌예술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 문리대학 교수(1959~1979)를 지낸 뒤 동국대학교 대학원 종신 명예교수가 되었다. 1971년 현대시인협회 회장, 1972년 불교문학가협회 회장,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84년 범세계 한국예술인회의 이사장, 1986년 《문학정신》 발행인 겸 편집인을 지냈고, 2000년 12월 24일 사망하였다.
저작에는 《한국의 현대시》《시문학원론》《세계민화집》(전5권) 등이 있으며, 시집에는 위의 시집 외에 《흑산호》(1953), 《국화 옆에서》(1975), 《미당 서정주 시전집》(1991)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5·16 민족상, 자유문학상 등을 받았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2년 2월 28일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자체 조사를 통해 발표한 '일제하 친일 반민족행위자 1차 명단' 708명에 문화예술계 인물에 포함되어 친일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 방언의 요술사이자 이 나라 시인 부족의 족장”(이화여대 유종호 교수), “시 쓰는 일에 있어서 백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인물”(경희대 김재홍 교수), “서정주는 하나의 정부(政府)다”(시인 고은)….
현대 한국의 대표 시인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를 표현하는 수사는 현란하다. 이밖에도 “언어의 연금술사” “신라 향가이래 최고의 시인” “시성(詩聖)” “시선(詩仙)”
“살아있는 시신(詩神)” “시인들을 신민으로 거느린 시왕국의 왕” “살아있는 한국 시사(詩史)”등 이루 헤아릴수 없다.
이같은
경의와 극찬에 가까운 찬사와 달리 폄하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접신술사” “현대시인이 아니라 전근대 시인이다” “서정주 시의 발전은 한국
현대시 50년의 실패를 가장 전형적으로 드라마화 한다”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들도 그를 우리나라 최고의
대표시인으로 꼽는데는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시력(詩歷) 7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15권의 시집과 1천편에 이르는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그의 ‘국화 옆에서’는 초등학교만 나왔어도 알 정도고 ‘푸르른 날’은 가수 송창식이 불러 널리 애창되고 있다. 또한 그는 고은,
황동규, 박재삼 등 1백명이 넘는 쟁쟁한 시인들을 등단시켰다. 가히 미당스쿨을 거쳐간 인물만으로도 한국문단은 풍성하다.
그는 벌써
몇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되었고 미국 일본 등 7개국 언어로 작품이 번역돼 읽히고 있다.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시인인 셈이다
한국적인
정서와 모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시인으로서 그가 다양하게 보여준 형성력은 20세기 한국문학의 축복이라 할수 있다. 걸출한 개성과 특유의
수사는 거칠 것이 없다. 고조선과 신라, 그리이스로 부터 미래에 까지, 그리고 고향 질마재에서 에베레스트에 까지 이르고 있다. 또 한사상과
동양고전, 불교와 기독교 사상, 오비디우스와 보들레르며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에 까지 걸쳐 있다. 민간에 떠도는 온갖 민화와 설화, 이승과
저승사이의 공간까지 아우르고 있다. 실로 광범위한 영역을 그의 시 속에 용해하고 있는 것이다.서정주는 1915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서광한(徐光漢)과 김정현(金貞賢) 사이의 3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마을 선운리 질마재는 바닷물과 민물이 서로 몸을 섞는 장수강(인천강)
너머 선운산이 있고, 드넓은 개펄로 펼쳐진 줄포만 건너 황소마냥 길게 돌아 누은 변산반도가 눈에 들어 오는 곳. 이곳에서 그는 유년기와 ‘꽃처럼
붉은 울음’을 울어댄 청년기의 일부를 보냈다.
아버지는 노름빚 때문에 풍지박산난 집안을 살리기 위해 소년 훈장 노릇을 했고 이
마을 어떤 어부 과붓댁 딸과 혼인을 했다. 이어 고창군청 측량기사를 거쳐 호남의 대지주 김기중(金性洙의 부친) 집에서 농감(農監·마름) 노릇을
했다.
서정주는 타고난 총명함과 장남이라는 위상 탓에 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물론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과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일곱살 무렵까지 동네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한뒤 줄포초등학교에 들어가 5-6학년 과정을 한해에 끝마쳤다. 부친의 극진한 성원에 힘입어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했으나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이듬해인 1930년 학내에서 데모를 일으킨 주모자 4명중 하나로 지목돼 퇴학을 당해야 했다. 다음해
편입학한 고창고보에서도 자퇴를 강요당했다.
아버지 돈 3백원을 훔쳐 쫒기듯 서울로 올라와 그해 겨울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에
이듬해 여름까지 쳐박혀 일본어로 번역된 서양문학 작품을 탐독하며 지냈다.
1933년 가을에는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서 빈민구제
활동을 벌이고 있던 일본인 하마다(濱田)의 운동에 참가, 톨스토이즘을 실현시킨다며 넝마주이로 떠돌았다. 그해 겨울 동대문밖 개운사(開運寺)
대원암에서 박한영(朴漢永)대종사 문하에 들어가 불경을 배웠으며 금강산에 구도여행을 다녀왔다.
1935년 박한영 대종사의 권유로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에 입학했으며 1936년에는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함형수 등과 함께 ‘시인부락’동인지를 펴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에 ‘벽(壁)’이라는 시가 당선(최초의 작품은 1933년 12월에 게재된 ‘그 어머니의 부탁’)된후
해인사로 내려가 순장(巡長)노릇을 하며 지냈다. 제주도에 잠깐 내려가 있다 1937년 고창 고향집으로 돌아와 지친 육신을 쉬면서 1938년,
5살 아래인 정읍의 방옥숙(方玉淑)과 결혼했다.
그는 1940년 고창군청의 임시고용원으로 서무일을 거들다 그 해 가을 만주로
건너가 만주양곡주식회사에 취직, 겨울을 났다. 1941년에는 서울로 돌아와 동대문여학교와 동광학교에서 1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해에 그동안
쓴 시를 모아 처녀시집 ‘화사집(花蛇集)’을 출간했다. 남만서고에서 나온 이 시집은 그의 신성(神性)과 육신의 내부에서 꿈틀대는 육욕이
충돌하면서 빚어낸 찬연한 생명세계를 그린 것으로 한국 현대시사의 금자탑으로 평가된다. 이어 옥루몽 등 번역일로 입에 풀칠을 하다 부친상을 당해
고창으로 내려갔다.
유산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가려고 선운사 입구 버스정류소를 향해 가던중 굴풋한 생각이 들어 주막을 찾았다.
마침 40대 여주인이 혼자 있어 잘 익은 도가니의 술로 대작을 벌이다 육자배기 가락을 청했다. 후일 이 때를 생각해 쓴 시가 지금 선운사 입구
시비에 새겨진 ‘선운사 동구(洞口)’다.
1943년과 1944년, 그는 생애에 가장 커다란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친일(親日)작품을 쓴 것이다. 그가 ‘창피한 이야기들’이라고 고백한 바 있지만 시와 수필등 10편 가까운 친일작품은 1981년 전두환 대통령후보
TV 지원연설과 함께 두고 두고 그의 발목을 잡아왔다. 당시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암흑기인데다 정치에 문외한인 그로서는 억울한 일일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 한국의 최고 시인으로서 그가 보인 행보는, 같은 시기에 총독부를 등진 집에서 시래기죽으로 연명하던 만해가 영양실조로 숨을
거두고 이육사와 윤동주가 각각 베이징과 후쿠오카의 차가운 감방에서 외롭게 최후를 맞은 것과 크게 비교되는 대목이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는 책장사로 호구를 면하다 부산에 내려가 남조선대(東亞大 전신) 전임강사로 있으면서 김좌진 장군 전기를 쓰게 된다. 이때 시집
‘귀촉도(歸蜀途)를 상재했다.
1947년 서울로 다시 올라온 그는 윤보선(전 민주당 대통령)의 권유로 이승만박사 전기를 집필한다.
그리고 1948년 동아일보에 들어가 잠깐동안 사회부장과 문화부장을 거쳐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관료생활이 체질에 맞을리 없어
11개월만에 사임해 버린다. 6·25 동란 중에는 종군문인이 되었으나 자살유혹과 극심한 실어증에 시달려야 했다. 유치환 등의 도움으로 겨우
병마에서 빠져나온 그는 전주고 교사를 거쳐 광주 조선대 교수를 역임한다. 이때 위대한 명시 ‘상리과원(上里果園)’ ‘무등을 보며’를 현대공론에
발표했다.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 설립에 참여, 그 회원이 되고 1960년부터 동국대에서 시작과 제자 기르는 일에 전념한다.
1976년에는 그의 시를 주제로 한 시화전이 서울서 제주까지 6개월에 걸쳐 열렸다. 1977년에는 한국문인협회 회장을 맡았다.
그의 시적 여정은 20대에 화사집을 통해 정신적 육체적 방황의 탐미적 아름다움을, 30대에는 귀촉도를 통해 전통적 정서와 가라앉은
톤으로 동양적 사유의 본령을 탐색했다. 또 40대에는 한의 강물과 그것을 초극하는 노래를, 50대의 동천(冬天) 무렵에는 영생적 개안과 불교적
은유의 세계를, 60대의 질마재 신화 무렵에는 고향의 원형적 설화를 펼쳐온 장대한 흐름이었다. 70대 이후에는 킬로만자로에서 태평양까지 세계를
여행하며 세계각국의 모습을 한국적인 정서로 녹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