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지훈[趙芝熏,1920-1968]
1920년 경북 영양군에서 태어났다. 1941년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39년 『문장』에 「고풍 의상」, 「승무」, 「봉황수」
등을 발표하여 등단하였고, 박목월?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1948년 고려대 문과대 교수가 되어 1968년 사망할 때까지
재직하였으며,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지조론」을 통해 지식인의 지절(志節)을 강조했던 그는 문사철(文史哲)을 겸비한 선비이자
시인?역사학자로서, 주로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 정서를 노래했다. 저서로는 시집 『청록집』, 『풀잎 단장』, 『조지훈
시선』, 『역사 앞에서』, 『여운』, 수필집 『돌의 미학』, 『지조론』, 『창에 기대어』, 시론집 『시의 원리』, 학술서 『한국문화사서설』,
역사서 『한국민족운동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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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던 1930년대말부터 45년 까지, 이 땅의 많은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친일 부역의 강요를 받았다. 그리고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많은 우리의 대표적 예술가들과 문인들이 일제(日帝)의 정치적인 목적에 자신들의 문학적, 예술적 재능을 쓰는 것을 허용했으며,
일제의 제국주의적인 의도에 때로는 적극적으로 때로는 소극적으로 어쩔수없이 부역했었다.
많은 문인과 지식인들은 해방후 일제에
협조했던 과거로 인해, 정신적인 자괴감과 부담감을 안고있었으나, 다행히 우리 시문학에 있어 자연중심의 서정을 노래한 청록파는 권력과는 전혀
무관한 행보를 보이며, 우리 문학사의 한 시대를 풍요롭게 장식했다.
그들 청록파(=靑綠派,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는 요동치는
역사앞에서 너무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한 것이 아니냐는 약간의 비판도 받았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에 휩싸이지 않고 전통 서정시의 계통을 전승한
것과,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꾸는 서정적인 詩語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시문학의 한 장르를 마련한 것은 역시 그들의 위대한 공로일
것이다.
청록파는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들의 시와 그들의 여러가지 글들이 그들의 죽음후에도 남았다. 청록파들도 말년에는
때때로 현실에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것은 때로는 꽤 적극적인 글로도 표현되었는데, 역시 그것은 청록파가 일제에 복무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정신적인 채무감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청록파의 시인 조지훈도 이미 이세상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청록파중에서도 특히 고전적인 취향에 밝고, 한학에 조예가 깊은 조지훈은 《지조론(志操論)》으로 대표되는 다소 현실지향적인 명문을 남겼다.
주도유단도 그 중 하나인데, 현실의 취미이자 낙인 음주를 바둑의 단위와 급수(혹은 위기구품)에 비유하여 익살스럽게 그리고 다소 현학적인 상징으로
표현한 탁월한 글이다.
시인 조지훈은 결코 탁월한 바둑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바둑에 대해서 교양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옛
사대부들이 교양으로 바둑을 배웠듯이 그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문학적 재능으로 바둑과 음주를 한편의 수필로 버무렸으니, 그것이
주도유단(酒道有段)이다.
(1)
조지훈은 1920년 12월 3일 경북 영양(英陽)군 일월면 주곡동 202번지에서 부 조헌영과 모 전주이씨 사이에서 4남매중 차남으로 한양
조씨(漢陽趙氏) 일색의 작은 마을 태어났다. 조부 인석(寅錫)은 한학에 조예가 깊은 천석군의 부호였고 부친 헌영(憲泳)은 제헌 2대의 국회의원을
지낸 명문의 선비 집안이었다. 부친은 일본 동경에 유학하여 신문화를 접한 인텔리였으나 지훈은 조부의 뜻에 따라 보통학교를 3년간 다닌
것을 제외하고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조부로부터 한학을 습득하며 성장하였다. 17세에『大學』까지 마친 걸로 보아 총명도 총명이려니와 이때
이미 학문의 소양이 상당하였으리라는 건 쉽게 짐작이 간다 이처럼 선비 지사인 조부 밑에서 한학을 연마하게 된 것이 그의 인격 형성이나
학문의 향방에 큰 영향을 주었고 또한 그의 시에 동양적인 교양과 편중한 시풍을 형성하는 데 밑거름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어쩔 수 없었던지 그는 1936년 조부의 곁을 떠나 상경하여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된다 동향의 선배 시인 吳一島의 詩苑社에 머물면서 시를
습작하는 한편 보들레르 드스토에프스키 와일드 등 서구 문학에 심취하기도 하다가 1939년에 혜화전문에 입학하였다. 그는 그해에
정지용의 추천으로《문장》지를 통해 <古風衣裳>과 <僧舞> 이듬해에 3회 마지막 추천작인 <鳳凰愁> 및
<香紋>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 네편은 한결같이 회고적 에스프리를 典雅한 언어와 情調로 노래하고 있어 이때 이미
시인으로서 지훈의 이미지를 확정시켜 버린 듯하다 한 시인의 이미지가 데뷔작 몇편으로서 운위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지훈의
경우 그 작품들이 20세도 채 못된 약관의 나이로서는 뛰어난 조숙성을 보인데다 이 시편들이 우리나라 시 작품에서 손꼽히는 애송시가 되어 널리
독자에게 회자된 걸 감안한다면 수긍이 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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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지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초마끝에 곱게 감춘 운규
당규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
호접이냥 살푸시 춤을 추라 아미를
숙이고.....
<고풍의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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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추천작품에서 호장저고리와 열두 폭 긴
치마를 입고 대청에서 사뿐히 춤을 추는 우리 옛 여인의 아름답고 단아한 자태가 조탁한 언어로 표현되어 있어 도저히 19세 연소한 나이의
소작으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높은 격조를 보인다 두번째 추천 작품인 <승무> 역시 <고풍의상>의 세계를 그대로
발전시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를 심미적인 안목으로 표출하고 있다 전작이 4월호에 후작이 그해 11월호에 발표되었으니 불과 7개월의 기간을
상거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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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아서 서러워라
빈 호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앞새마다 달이
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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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의 전반부
<승무>에 와서는 유장한
흐름이 더욱 정련되어 나타난다 섬세한 묘사와 완벽한 구성 제재를 표현하는 언어의 적절한 조사 시전체에 감도는 고전적 분위기가 당시의 시 게열에선
단연 독자적이고 새로운 하나의 개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고풍의상>이 춤을 추는 한 여인의 모습을 표면적인 자태에 앵글을 맞춰
관조한 정적 작품이라면 <승무>는 승무를 추는 율동을 묘사하되 여인의 움직임과 내적인 번민을 융합하여 깊은 가을밤의 유현한 정적과
콘트라스트되어 대상에 생명을 부여하고 감동을 크게 한다 또 구성에 있어서 고풍의상은 3행에 배경을 제시하고 앞에 예시한 부분에서 대상을
묘사한 후 나머지 4행에 시인의 감흥을 덧붙이고 있는 데 비해 <승무>는 훨씬 다양한 극적 배열을 보이고 있다 첫련에서 대뜸 승무를
하는 동작을 내보이고 둘째련에서는 여승의 모습 세째련에서는 시인의 감흥, 네째련에 배경, 이렇게 연이 전개됨에 따라 입체적인 구성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두작품은 모든면에 있어서 동일선상의 패턴을 보이고 있음은 확연하다 시인의 대상에 대한 관심이나 그 대상을 표현하는 방법에서나
그리고 그 작품을 통해 희구하는 의도 또한 그러하다 <봉황수>도 기법 면에서나 작품 세계에 있어 전술한 두 작품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이 무렵을 회상하여 지훈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승무>에 대해서 선자는 언어의 다채다각과 미묘곡절로 시의 미적 수사를 위하여 찬란한 타개를 감행했다고 칭찬하면서도 여기서도
시어의 생략을 충고하였고 정신에의 경도를 권고하였다 <고풍의상>이나 <승무>는 무용을 주제로 한 것이고 그 무용의 유장하고
미묘한 흐름은 언어의 생략으로는 도저히 그 선의 미를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나는 선자의 충고에 내심으로 불복하였다 그러나
최종 추천작<봉황수>는 운문적 가락을 산문의 형태로 왜형축략한 그 조격과 에스프리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으로 선자 및 선배시인들의
과찬을 받아 흐뭇하였다.<나의 시의 편역에서>
(2)
1941년 혜화전문을 졸업한 지훈은
일제의 마수를 피해 오대산 월정사의 불교강원에 외전강사로 들어갔다 시심이 한창 무르익을 나이에 산사로 들어가 불교 서적과 노장 당시를 읽으며
자기 침잠의 세계를 갖게 된 것이 그의 시로 하여금 자연에의 서경과 선에 대한 관심과 애착을 갖게 했다.
추천작에서
보여준 동일적 정서는 이무렵에 연마된 불교적 관조와 선의 경지는 지훈 초기시의 중요한 바탕을 이루는 양대 지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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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사립에/ 꽃잎이 떨리노니//
구름에 싸인 집이/ 물소리도
스미노라>
----- 의 <산방>에서는 자연 그대로의 서경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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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어를 두드리다/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아이도/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웃으시는데//
서역 만리길//
눈부신 노을아래/모란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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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 1>에서는 불교적 적막과 생명의 덧없음이 부처와 모란의 대비를 통해
엿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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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구름에 싸인들/새소리야 막힐 줄이//
안개 잦아진 골에/ 꽃잎도
떨렸다고//
소나기 잔주름 스쳐간 뒤/ 벼랑 끝 풀잎에 이슬이 진다>
----- 의 <산>에서는
선적 취향의 세계가 나타난다
데뷔시의 추천사에서 정지용이 언어를 절약할 것을 지적한 바 있었지만 앞에 열거한
시편들에선 수식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행간도 짧게 단락을 지었으며 서술형 대신에 운율을 중시하는 단시형을 지향하고 있다 이 작품들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의 한시에서 받은 영향이 여기에 튼튼한 밑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월정사에 기거하는 동안
지훈은 일제의 발악에 통분하여 통음한 결과로 건강을 크게 상해 서울로 옮겨왔다 일년 반 남짓 머물면서 조선어학회의『큰 사전』편찬위원으로
종사하다가 일병의 감시와 세태의 절망으로 향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신체적 병약과 이런 여러가지 여건들이 덧쌓여 그랬던지 그 후의
작인<落花>에서는 심약한 정조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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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
주럼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머언 산이
다가서다.
-중략-
묻혀서 사는 이의/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울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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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의 초기 시편 중에서 선에 경도되었던 전기한 수편외에는 거의가 애조를
조금씩은 띠어 왔던게 사실이지만 이 낙화 처럼 울음이 밖으로 나타난 것을 드물게 보는 일이다. 이 작품에서도 선비적 체취나 지사적 풍모가 끝에서
두세째 련에 안보이는 바는 아니지만 한결 섬약한 정서를 표현하고 있음을 특히 주목되어진다 이런 면에서 그는 예술 취향의 시인이기보다는
인생파적 시인이요 그의 시세계를 인간적인 측면과 삶의 역정을 병행하여 고찰해 봄이 유용하다는 데 한 근거를 얻게
된다
(3)
지훈의 시는 <청록집> <지훈시선>으로서 한 획이 그어진다 한국 시사에
있어서 그는 이것만으로도 그의 사명을 완수했다고 보아 부족함이 없다 할 것이다 만일 그가 말년까지 시에만 집착하여 왔다면 시문학사에 훨씬
달리 기술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의 국학에 대한 박식과 여타 그가 포용한 학문적 깊이로 인해 그를 시에만 묶어 있도록 두지
않았다. 또 그 자신으로도 시에만 전념하기에는 처했던 조국 현실이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민족문화에 대한 정열을 시 한가지 만으로는
완결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6.25 동란을 맞았을 때 그의 나이는 30세에 불과했다.그럼에도 전란을 맞아서는 <문총구국대>를 조직
문단의 힘을 규합하는데 앞장섰다. 이듬해 <종군문인단>의 부단장으로 전선을 따라 종횡했으니 작품을 떠나 한 문단인으로서의
지도력과 상황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 의식을 십분 찾아볼 수가 있다 전란을 맞아 기존 질서는 파괴되고 문학의 효능도 달라져서 지훈의 시에도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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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진실로 내 지난날 생각하던 것처럼 그렇게 가벼운 것은
아니었노라
총알이 옆구리를 꿰뚫어도 총알이 가슴에 박혀도 불타는 생명의 고집 그 오묘한 세포 속 구석 구석이 자리한 영혼을
샅샅이 명중하기 전에는 오직 적진으로 적진으로 달리는 부르짖음이 있을 뿐
아 죽음을 홍모에다 비긴 자에게만 이 생명은
이렇게도 악착한 것이었노라
<전선의 서> 전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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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강건하고
굵은 육성을 보이고 있다 이때는 이미 회고적 에프스리를 빚어내던 지훈도 아니요 동양적 자연의 법열을 노래한 지훈도 아니다 오직 이 땅을유린하는
적을 분쇄하기 위해 포효하며 적진을 향해 나아가는 당당한 의기와 신념만이 넘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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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붕괴와 회진의 마을을/ 내 오늘 소연히 지나가노니//
하늘이 은혜하여 와전을 이룬 자는/ 오직 낡은 장독이 있을 뿐//아 나의
목숨도 이렇게 질그릇처럼/오늘에 남아 있음을 다시금 깨우쳐 준다>
----- 고 읊은 <도리원에서>나
<다부동에서>등 전쟁시편을 통해 전쟁의 상처와 그 파괴력이 미치는 인간의 정황을 직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처럼 6.25를
체험하면서 고조된 그의 참여정신은 이후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사회적 부조리를 맞으면서 투철한 역사 의식을 내포한 사회 참여시로 확대되어 그
시대에 있어 가장 용감하고 저항적인 시혼을 발휘한다. 모든 지식인이 굴복하고 타협할 때「詩」를「道」로 해석했던 동양적 선비 전통에 단련된 지훈의
진가가 유감없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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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하지 말아아
이대로 바윗속에 끼여 화석이
될지라도
1960년대의 포악한 정치를
네가 역사 앞에 증거하리라
권력의
구둣발이 네 머리를 짓밟을지라도
잔인한 총알이 네 등어리를 꿰뚫을지라도
절망하지 말아라 절망하지
말아라
민주주의여!
<터져오르는 함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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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을 타매하고 정의와
자유를 사수함에 그 자세가 도저하고 호흡이 줄기차며 호령이 서릿발 같았다 그의 후기 시편 중에는 이러한 사자후가 많이 보인다 더구나 앞서
일신의 안일을 위해 불의와 야합하며 변절하는 당시의 위정자와 지식인으 작태를 대성 일갈한 논설<지조론>으로 지훈은 초기시로 강하게
인상 지어진 시인의 이미지와 더불어 지조와 절개를 강변한 지사의 이미지를 이 땅에 자랑스럽게 남겨 놓았던 것이다 시 이외에 학문적 공적은
차치하고라도 향년 48세의 아까운 나이로 유명을 달리 하지 않았던들 후학들은 그에게서 또 얼마나 더 많은 교훈과 영향을 받을 수 있었으라 시인
김종길은 그의 인간됨을 다음 한 귀절로 요약했다 『지훈은 한국의 선비의 전통을 이 시대에 빛낸 거의 마지막 사람이었다』라고 지훈을 얘기하는
한마디 말로 이처럼 더 적절한 표현도 없을 것 같다.
1968년 5월 17일 메디칼 센터에 입원중 侍病으로
운명하였다. 같은달 21일 경기도 양주군 마석리 송라산 기슭에 안장되었다 1972년 서울 남산에 조지훈 시비가 건립되었다
◆주요 작품
1. 청록집
봉황수/ 고풍의상/ 낙화/ 피리를 불면/ 고사 1.2./ 완화삼/
산방/ 파초우/ 승무
2. 풀잎단장
산길/ 그리움/ 절정/ 달밤/ 도라지꽃/ 가야금
3.
조지훈시선
길/ 종소리/ 학/ 낙화/ 매화송/ 대금
4. 역사 앞에서
꽃 그늘에서/ 기다림/ 산상의
노래/ 마음의 태양/ 전선의 서/ 도리원에서/ 죽령전선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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