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에 소설 『크눌프 Knulp』가 핏셔 문고판으로
발표되었다. 고독한 방랑자의 모습을 통해 자기 생에 충실할 수 있는 길을 독자들에게 제시해 주는 감동적인 소설 『크눌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실연의 상처를 입은 크눌프는 인생의 방관자가 되어 유랑생활을 한다. 가는 곳마다
아이들에게는 노래를 들려주고 어른들에게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그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는 비록 바보 취급을 받지만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숙식을 제공받는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폐병을 앓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병원에 입원시키지만 자유와 자연을 사랑하는 그는 병원을 뛰쳐나와
눈 덮인 산길을 헤매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몽롱한 가운데서 지친 다리를 이끌며 그는 신에게 "나는 일생을 잘못 걸었다."고 뉘우친다.
그러자 신은 "정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에 대한 향수를 전해주는 역할을 다했다"고 칭찬을 하면서 "너는 나의 아들이요 나의 몸의
일부이다"라고 답한다. 크눌프는 신의 음성을 듣고 자기의 생과 화해를 하고 손발 위에 눈이 쌓이는 것을 느끼면서 만족한 표정으로 눈을
감는다.
소설 『크눌프』는 헤세가 영향을 받은 독일 낭만주의 작가인 아이헨도르프
Eichendorf의 단편인 『무능력자의 생활에 Aus dem Leben eines Taugenichts, 1826』와 비슷한 점이 있다.
『크눌프』의 주인공 크눌프는 유랑자이며, 온당한 노동자 혹은 직업인으로서 규정된 질서에는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크눌프는 어린애 같은
마음을 지닌 꿈꾸는 자로서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과 유희와 만족을 주는 유쾌한 일면을 지니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독하고 고향 없는
한 인간인 제 2의 크눌프로서 언제나 떠돌아다니면서 어느 곳에서도 발을 붙이지 않고 생활한다.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그의 자유생활은 평민적인
행복과 가족 그리고 가장생활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어야만 했다. 이러한 사실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실제 이상으로 암시되는 것이고, 이 상쾌하고
장중하지 않은 이야기에서도 예술가 기질의 문제성이 다뤄지고 있다. 즉 성과를 기대하는 생산적인 효용의 세계와 표면상으로는 비효용적이고 목적성이
결여된 것 같아 보이는 작가와 예술가의 세계 사이의 긴장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 비판적인 측면이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능력자이며 방랑자인 크눌프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기 고향의 수풀 속을 헤매면서 피곤에 지친 상태로 쌓여가는 눈더미
속에 파묻히는데 그런 그에게 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라! 나는 네가 지금 있는 상태를 그대로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너는 나의
이름으로 방황하면서 정착된 사람들에게 언제나 조금이라나마 새롭게 자유를 갈망하게 하는 향수를 불어넣어 주었다. 나의 이름으로 너는 바보짓을
했으며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조소하게 했다. 너를 통해 나는 조소당했고 너를 통해 나는 또한 사랑받고 있다. 너는 나의 친구이며 너는 내
몸의 일부이다.
헤세는 제 1차 대전이 일어나기 2년 전부터 스위스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독일
국민이라는 의무감으로부터 회피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베른 영사관에 국민병으로 자원할 뜻을 밝혔다. 그의 지원은 신체검사 불합격 판정으로
거부되었지만 얼마 후에 베른에 있는 독일 대사관으로부터 전쟁 포로를 돌보는 일에 종사할 것을 요청 받음으로써 이러한 그의 뜻은 이루어졌다.
헤세는 당시 광분하고 있던 전쟁의 모든 정신병으로부터 벗어나 1914년 11월 3일에 취리히 신문에 「오! 친구여, 이 어조로서가 아니고 O!
Freunde, nicht diesw Tone」를 실었다. 그는 심적으로 큰 충격을 받고 격앙된 상태에서 국수주의적인 광란적 행위에 대항해서
인류애와 이성에 호소하면서 가장 위대했던 독일 사상가와 작가들이 몸담아 왔고 몸바쳐 왔던 그 정신을 상기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이 정신이 갖고 있는 정의, 절조, 예의와 인간에 대한 경고, 전쟁 극복론은 언제나
그랬듯이 서양 기독교적 미풍의 가장 고귀한 목적이고 최종적인 결론이었다. 인생은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서 모든 예술의 마지막 내용이고
위로이다.……분노보다 이해가 더 높은 것이고 전쟁보다 평화가 더 고귀하다는 것을 바로 지금 이 불행한 세계대전의 도가니 속에서도 우리는 과거에
느꼈던 것보다 깊이 새겨야 한다.
헤세는 세계대전에 직면해서 전반적인 가치를 지닌 정신이 무시당하고 천대받고 나아가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 분노했고 고통을 느끼면서 이에 항쟁했다. 우둔한 인간들의 몰지각한 행위로 정신을 파괴하는 제 1차 대전에
강력한 항쟁과 반기를 들게 된 그는 처음부터 편협한 애국주의와 야만적인 행동에 대해 단호히 거부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로써 그는 그의 적대자들과
심지어는 독일에서 발간되는 신문에 의해서 배반자 또는 절조가 없는 자로 배척당했고, 여러 번 재 인쇄된 「쾰른 일간신문 Kolner
Tageblatt」은 헤세를 비방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실었다.
가련한 모습의 한 기사처럼 징병 기피자 헤르만 헤세는 이미 오래 전 그의 구두에 묻은
고향 흙의 먼지마저 떨어버린 조국 없는 떠돌이 젊은이로 유유히 걸어가고 있다.
이 같은 모욕적인 인신공격을 그는 마음 속 깊이 통감하면서 평생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인류애와 평화를 내세우는 정신의 편에 서서 이에 호소했던 그는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고 제 1차 대전중 같은 길을 가던 프랑스의 로망 롤랑
Romain Rolland과 친분관계를 맺기도 했다. 헤세는 전쟁이라는 끔찍한 현실을 통한 또다른 정신적 충격도 받았다. 희생물을 요구하는
전쟁의 제단에 동료들과 친구들이 스스로 쉽게 몸을 바치는 것을 보고 대단히 놀라기도 했다. 헤세는 세계대전중 모욕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의
동조자들로부터는 찬동과 협조를 받으면서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소신에 따라 행동했다. 그는 베른에 있는 독일 대사관으로부터 전쟁 포로를 돌보는
임무를 맡고 이 일에 전력을 다했으며 또 이 일을 자신에게 맡겨진 의무로 생각했다. 헤세는 전쟁 포로를 돌보는 공공적인 일을 1915년부터
1919년 초에 이르기까지 전쟁 포로를 위한 베른 Bern의 도서본부를 통해 운영에 나갔다. 여기서 하는 일은 프랑스 그리고 스위스에 붙잡혀
있는 독일의 전쟁 포로들에게 보낼 책들과 조그만 문고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공공업무를 위한 재정이 얼마 안 되어 바닥이 났기 때문에 도서본부의
유지는 전적으로 그의 운영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동료 친구들과 도서관장과 출판업자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써야 했다. 왜냐하면
헤세에게 있어 이 업무는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인류애적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헤세는
3년동안 매 2주마다 발간되는 잡지의 원고를 편집해서 많은 잡지를 독일 포로가 있는 프랑스, 영국, 소련과 이탈리아로 보냈다.
이처럼 헤세가 전쟁 포로를 위해 봉사하는 긴장되고 정력 소모적인 일,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한 심적인 충격, 막내아들의 위험한 병,
1916년에 아버지의 죽음, 부부생활의 위기, 그리고 자주 요양소를 드나들었던 아내의 정서적 고통의 돌발은 헤세를 심한 심적인
곤궁
으로 빠뜨렸다. 그의 이러한 외적·내적인 정신적 압박감과 좌절의 상황은 1916년에 발표한 시집
『고독자의 음악 Musik des Einsamen』의 한 시 「소외자 Der Ausgesto ene」에 잘 나타나 있다. 시집 『고독자의
음악』이 나온 해의 초반기에 그는 육체적·정신적으로 쇠약해지고, 우울증이 심해져 있었기 때문에 루채른 Luzern의 존맛트 Sonnmatt에서
심리분석 요법을 받았다. 이때에 헤세는 이 병원의 의사이자 프로이트 S. Freud의 제자였던 융 C. G. Jung의 제자로 그와 친구가 된
랑 박사 Dr. J. B. Lang의 도움으로 프로이트와 융의 저서들을 열심히 배움으로써 그를 어릴 때부터 괴롭혀 왔던 갈등을 해소하게 되고
내면적인 위기를 이겨 나가는 데 성공을 거둔다. 랑과 헤세간에 있었던 심리학적 분석 과정은 환자와 의사 사이의 단순한 치료
과정이라고 하기보다는 정신요법적인 대화였다. 1925년에 발표한 『요양객 Kurgast』에서 헤세는 환자로서 이 요양소의 의사와 대면하는 자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이들의 정신요법적인 대화는 그의 체험 영역을 최대한으로 확대시켜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그의 발전에 새로운
시발점을 열어 주었다. 헤세는 프로이트와는 간접적인 교류와 그리고 랑의 스승이었던 융과는 1919년 이후부터 서신 연락이
있었다. 헤세는 1922년에 발표한 작품 『싣타르타 Siddhartha』에 착수한 후 이 작품의 제 1부에서 제 2부로 집필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거의 1년 반 동안 내내 내면적인 위기에 처하였다. 그는 융에게 심리분석 치료를 받음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는 더욱 가까운 유대관계가 이루어진다.
융과 그의 제자 랑에게서 배운 심리분석의 결실로 『이리스』, 『어려운 길 Der schwere Weg, 1919』,
『데미안 Demian, 1919』 등의 작품을 발표한다. 『데미안』은 1916-19년 사이에 스위스 베른에서 쓰여진 작품이다.1925년에 출판된
『혼란 속으로 향한 시선 Blick ins Chaos』이라는 제목의 책 속에는 당시의 그의 자아를 소재로 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혹은 유럽의
몰락」,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보에게 부치는 생각」, 「새로운 소리에 대한 대화」 등의 세 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1919년에 『짜라투스트라의
귀래 Zarathustras Wiederkehr』, 그리고 1923년에는 『싱클레어의 노트 Sinclairs Notizbuch』가 출판되었다.
『짜라투스트라의 귀래』는 헤세가 1919년 1월의 세계대전의 움직임으로부터 받은 긴장 상태를 3일 낮과 밤 동안에 걸쳐 썼다. 내용은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경고와 호소이다.
출처 ; http://myhome.naver.com/twink98/works/a3.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