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씨실

沈門<심문>의 뿌리

자크라캉 2006. 6. 26. 17:12

1. 심씨의 유래

   ‘성균관(成均館)'에서 간행한  「대동방씨족원류사(大東方氏族原流史) 」에 따르면, 고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주(周) 왕조의 성왕(成王)이 문왕(文王)의 아들인 담계재(聃季載)를 심국(沈國)에 봉(封)함으로써 그의 자손들이 沈氏 성을 갖게 된 것, 그리고 초장왕(楚莊王)이 공자(公子) 정(貞)을 沈(하남의 沈丘)에 봉함으로써 沈氏 성을 갖게 된 것이 역사적 기록이 뒷받침하는 沈氏 성의 시작입니다.

   공식 기록이 전하는 고려 시대 최초의 沈氏 성을 가진 인물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으며  「몽계필담(夢溪筆談)」의 저술자로 알려진 심괄(沈括 : 1031-1095)이라고 여겨집니다.

  1903년에서 1908년 사이에 칙명(勅命)에 의해 편찬 간행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각각 63개 혹은 70개의 심씨 본관(本貫)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각 지파(支派)들이 거주하는 지명(地名)들의 숫자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명실상부한 본관으로 널리 인정받아온 것은 청송(靑松), 풍산(豊山), 삼척(三陟), 부유(富有), 의령(宜寧), 전주(全州) 등의 여섯 본(本)입니다. 그중에서도 단연 두드러진 대본(大本)들인 청송(靑松), 풍산(豊山), 삼척(三陟)의 세 본관이 옛부터 심씨의 주류를 이루어 왔습니다.

  심씨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이른바 ‘서인(西人)'의 중심인물들을 배출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서, 또한 왕실의 유력한 외척(外戚) 세력으로서 강력한 권력을 누린 명문집안입니다. 실제로 조선중기의 권문해(權文海)가 편찬한 일종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은 심씨를 조선왕조 20대 명족(名族)의 하나로 꼽고 있습니다. 종인(宗人)의 숫자로 보면 한낱 소성(小姓)에 불과한 심씨 가문이 엄청난 종인(宗人) 수를 자랑하는 다른 명문 대성(大姓)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며 오랫동안 대성(大姓)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삼척 심씨의 유래

  강원도 동남부의 해안을 끼고 있는 삼척은 원래 실직국(悉直國)의 영토였는데 신라의 파사왕(婆娑王) 때 신라에 편입된 후 경덕왕(景德王)때 군(郡)으로 바뀌면서 ‘삼척(三陟)'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곳입니다. 고려 성종(成宗) 때 ‘척주단련사(陟州團練使)'가 되었으며, 우왕(禑王) 때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었습니다.

  삼척 심씨는 고려조의 심동로(沈東老)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습니다.

  본명이 심한(沈漢), 호가 ‘신재(信齋)'(그래서 그를 ‘신재공(信齋公)'이라고 별칭하기도 합니다.)인 시조(始祖) 심동로는 고려 충선왕조에서 공민왕조에 걸쳐 활동한 분입니다. 1342년(충혜왕 2년)에 생진(生進) 2등에 합격하고 같은 해 가을에 병과(丙科) 1등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직한원사(直翰院事)를 필두로 판예문검열(判藝文檢閱), 판 수찬 춘추관(判 修撰 春秋館), 판 예문 수찬(判 藝文 修撰), 판밀직당후관(判密直堂後官), 승봉랑통예문지후(承奉郞通禮門祗侯), 봉선대부 중서사인 지제고(奉善大夫 中書舍人 知制誥), 예의판서(禮儀判書), 집현전 제학(集賢殿 提學)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통주지사(通州知事)에 임명되어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경륜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권신(權臣)들의 전횡(專橫)을 보다 못해 이윽고 벼슬을 버리고 삼척부(三陟府)로 물러났습니다. ‘동로(東老)'는 은퇴하는 이 원로 대신을 ‘진주군(眞珠君)' -‘眞珠'는 삼척의 옛이름입니다 - 으로 봉하면서 공민왕이 직접 지어내려준 애정어린 이름(사명(賜名))입니다.

  삼척에 은퇴한 동로공(東老公)은 ‘해암정(海岩亭)'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며 노년을 보냈습니다 (‘해암정'은 지방 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의 유훈(遺訓)에 따라 삼척으로 창본(創本)하여 후손들이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으니, 삼척 심씨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동로공의 아들인 심공무(沈公懋)는 서운관부정(書雲觀副正)을 지냈으며, 첫째 손자인 심원복(沈原福)은 현감(縣監)을, 둘째 손자인 심원충(沈原忠)은 학사(學士)를, 셋째 손자인 심원달(沈原達)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넷째 손자인 심원연(沈原連)은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을, 다섯째 손자인 심원린(沈原麟)은 호장(戶長)을, 여섯째 손자인 심원룡(沈原龍)은 별장(別將)을, 일곱째 손자인 심원립(沈原立)은 사인(士人)으로 지냈습니다. 이들중 심원복(沈原福)은 훗날 ‘현감공파(縣監公派)'라 불리게 될 지파(支派)의 파조(派祖)가 되었으며, 심원달(沈原達)과 심원연(沈原連), 심원린(沈原麟)은 각각 ‘절제공파(節制公使派)'와 ‘검교공파(檢校公漢派)' 그리고 ‘호장공파(戶長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습니다.  그 후손들은 현재 강릉시의 회산동(淮山洞)과 운정동(雲亭洞), 삼척시의 미로면(未老面)과 울진군 울진읍에 집성촌(集成村)을 이루고 있으며, 나머지는 서울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여러 도시에 흩어져 있습니다.

3. 역대 주요인물

  삼척 심씨 가문은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빼어난 인재들을 줄줄이 배출하였습니다.  「司馬傍目」의 [三陟沈氏] 항목에는 1447년(세종 29년)에서부터 1859년(철종 10년) 사이에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로 합격한 14인의 이름이 올라있습니다. 조선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등과한 인물들은 심산보(沈山甫), 심가보(沈家甫), 심희전(沈希佺), 심준(沈濬), 심언경(沈彦慶), 심언광(沈彦光), 심보영(沈普永) 등 7인이며 관직에 나아간 종인(宗人)은 총 57명입니다(중앙일보사,  「성씨(姓氏)의 고향(故鄕)」). 그중에서도 삼척 심씨 가문을 빛낸 가장 대표적인 인물들은 단연 심준(沈濬)과 심언경(沈彦慶), 심언광(沈彦光) 삼부자(三父子)일 것입니다.

  심준(沈濬)은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고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으로 추증(追贈)되었습니다. 심언경(沈彦慶)은 중종(中宗) 때 급제하여 내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예조판서(禮曹判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등을 거쳐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에 이르렀습니다. 댕대 최고의 문장가로 불린 심언광(沈彦光)은 중종 때 급제하여 오랫동안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 봉직하며 거침없는 직언(直言)으로 이름을 드날렸습니다. 그의 [十漸疏]는 그러한 기질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상소문(上疏文)입니다. 그후 이조참의(吏曹參議),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대사간(大司諫), 이조참판(吏曹參判),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가 남긴 문집인 [어촌집(漁村集)]은 대문장가로서의 그의 진면목을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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