元나라 至大(武宗의 연호) 3년(단기 3643, 서기 1310년),
高麗 忠宣王 2년 庚戌에 태어났는데 少年시절부터 글을 잘 지어 높은 명예가 세상을 진동하였다. 忠惠王 元年(3673,
1340) 庚辰에 南省에서 入格하였고 辛巳(충혜왕 2, 1341)에 승보시(陞補試 : 고려때 生員을 뽑아 國學에 입학시키던 시험)에
1등하였으며, 壬午(충혜왕 3, 1342)에 생진(生進) 제2등으로 바로 합격하였고 그해 늦가을에 을방(乙榜 : 2등 進士를 말함) 자격으로
병과(丙科) 제1등에 급제하여 직한림원사(直翰林院事) 판성균학록(判成均學祿)이 되었다.
忠穆王 元年(3678, 1345) 乙酉 4월 22일에
판예문검열(判藝文檢閱)이 되었으며, 丙戌(충목왕 2, 1346)에 판수찬춘추관(判修撰春秋館)이 되었고, 8월에 판예문(判藝文)이 되었으며,
丁亥(충목왕 3, 1347) 판밀직당후관(判密直堂后官)이 되었으며, 戊子(충목왕 4, 1348) 4월 1일에 승봉랑(承奉郞)
통례문지후(通禮門祗侯)가 되었고, 8월 4일에 지통주사(知通州事)가 되어 政事가 잘 수행되고 명령이 간편하니 백성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忠定王 3년(3684, 1351) 辛卯 12월 8일에
지제고(知製誥)·우정언(右正言)이 되었으며, 恭愍王 10년(3694, 1361) 辛丑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특지(特旨)로 봉선대부(奉善大夫)
중서사인(中書舍人)·지제고(知製誥)가 되어 당시의 정치가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을 목격하고 또 권귀(權貴)한 사람에게 거슬리어 마침내 三陟府의
별장(別莊)으로 은퇴하니 공민왕은 公이 동쪽으로 돌아간다고 하여 이름을 東老라고 내려주어 은총(恩寵)을 베풀었다.
그 뒤에 봉정대부(奉政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집현전
제학(集賢殿 提學)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취임하지 아니하니 恭愍王은 勅命으로 죽서루(竹西樓)에 놀게했고 또 식읍(食邑)도 봉해 주었다.
公은 날마다 술마시며 시를 읊음으로써 스스로 즐기었고 또 「동로란 이름을 내려주니 즐거움이 넘치네(東老加名樂有餘)」라는 시구(詩句)도
써 스스로 慶祝하였다. 그리고 자손들에게 타이르면서
『내가 지금 진주(眞珠)에서 거주하고 또 東老는
임금께서 내려주신 것이니 후손들은 진주로써 本貫을 삼아라』고 말하였은즉 公이 예전에는 청송(靑松)에서 거주하다가 뒤에 三陟으로 본관을 삼았던
것을 거의 추측할 수 있다.
여지승람(與地勝覽)에 의하면 진주(眞珠로써 우리 姓氏의 본관을
삼았고 그 인물편(人物編)에는 첫머리에 심 동로(沈東老)를 쓰면서 『시문(詩文)으로써 세상에 이름났었다』고 말하였다.
목은집(牧隱集)에의하면 선생(先生) 이 색(李穡)이 학사
승지(學士承旨 : 前朝의 大提學)가 되어 王에게 『심모(沈某 : 신재공(信齋公)을 지칭함)가 연세도 많고 德도 높을뿐더러 學識도 臣의 위에
솟으며 벼슬도 신보다 먼저 하였으니 신의 관직(官職)을 그에게 주소서』하고 사양하였으나 왕이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척약재집(若齋集)에 의하면 先生 김구용(金九容)이
관동안렴사(關東按廉使)가 되었을 적에 심 동로(沈東老)가 거주하는 곳을 방문하여 詩(시축(詩軸)에 있다)를 지어 주었으며 조 부령(趙副令)이
관동안렴사로 나갔을 적에도 이 구(李球)가 詩(시축에 있다)를 지어 심 동로(沈東老)에게 보냈으니 당시에 추대받았던 것이 이와
같았다.
안문간공(安文簡公) 종원(宗源) 행장(行狀)에 지정(至正 : 元
順帝의 연호) 丙戌(충목왕 2, 1346)에 公이 두 번이나 수찬(修撰) 공봉(供奉)이 되어 임기가 차 물러날 적에 『동료(同僚)인 심
동로(沈東老)가 나이는 많은데 직위가 낮음으로 공이 그에게 사양하여 먼저 전임(轉任)되도록 하였다. 그러자 문정공(文貞公)〔종원(宗源)의 아버지
축(軸)〕이 「사양하는 것은 德의 첫째이다. 내가 남에게 사양하면 남이 누가 나를 버리겠는가? 우리 집안에 인물이 있으니 아마도 더욱
번창하겠구나」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