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미디어 다음>에서
활과 리라 / 옥타비오 파스
무심無心의 언저리를 건드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무심의 경험은 방심자, 은둔자 그리고 심약자까지도 인간의
원형으로 제시하려는 서구 문명의 지배적인 경향에 반대된다. 무심한 사람은 근대 세계를 부정한다. 근대 세계를 부정할 때, 그는 전체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전체를 건다. 지적인 면에서, 그의 결단은 생의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자살을 하는 사람의 결단과 다르지
않다. 무심한 사람은 이성과 소극적 안일함의 다른 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심이란 이 세상의 반대편에 대한 매혹이다. 의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바꿀 뿐이다. 즉, 의지는 분석적 힘에 봉사하는 대신에, 분석적 힘이 자신의 목표를 위하여 정신적 에너지를
억압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서구 언어의 심리학적이고 철학적인 빈곤함은 시적 표현과 이미지의 풍성함과 대조가 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침묵의 음악' 혹은 노자老子의 '텅 빈 충만'이라는 말을 기억해보자. 수동적인 상태는 침묵과 빔의 경험일 뿐만 아니라 능동적이고
충만한 순간의 경험이기도 하다. 즉, 존재의 핵심으로부터 이미지가 샘솟는 것이다. '나의 가슴은 한밤중에 꽃들을 피운다'라고 아즈텍인의 시는
말한다. 자발적인 마비는 정신의 다른 부분을 상승시킨다. 한 영역의 수동성은 다른 영역의 능동성을 야기하며 분석적이고 담론적이며 혹은 추론적인
경향성에 맞서 상상력의 승리를 가능케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창조적 의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창조적 의지가 없으면, 실재와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문들은 완고하게 닫혀있게 된다.'
***
자신 너머의 저곳으로 발사되어 날아가는, 끊임없이 대기를 가르며, 항상 앞을 향하여 날아가는 화살인 인간은 쉼없이 전진하고 추락한다. 그 순간 순간 그는 '타인'이며, 자기 자신이다. '타자성'은 인간 안에 있다. 그치지 않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하나의 통일성이 '타자성' 속에서 용해되어 다시 새로운 통일성으로 재탄생한다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비로소 어쩌면 '다른 목소리'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지 모른다.
여기 한 시인이 종이 앞에 앉아 있다. 그가 사전 계획을 가지고 있건 없건, 그가 앞으로 쓸 것에 대해 길게 사색을 했건 안 했건, 번갈아가며 그를 유혹하고 거부하는 순결한 백지처럼 그의 의식이 비어 있건 아니건 상관없다. 글을 쓰는 행위는 먼저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마치 허공으로 던져지는 것 같은 이탈을 요구한다. 이제 시인은 혼자 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를 신경 쓰게 만들었던 모든 일상 세계가 사라진다. 만일 시인이, 단지 의례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글쓰기를 원한다면, 그의 행위는 그를 세상과 단절시키고 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괄호 속에 집어넣는다. 그때 두가지 가능성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증발하고 희미해져서 중력을 잃고 떠다니다가 결국 녹아 없어지거나, 혹은 모두가 스스로를 닫아걸어 의미의 빛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물질인 무의미체가 되고 만다. 세계는 스스로를 연다. 그것은 하나의 심연, 거대한 하품이다. 책상, 벽, 컵, 기억나는 얼굴 등 세계는 스스로를 닫아걸고 균열없는 담으로 변한다. 두 경우 모두 시인은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가 된다. 다시 세계를 창조하여, 저 위협적인 외부의 텅 빔을 하나 하나 이름붙여야 한다. 책상, 나무, 입술, 별, 그리고 무까지도. 하지만 낱말 역시 증발하여, 도망가고 만다. 말 이전의 침묵이 우리를 감싼다. 같은 침묵의 또 다른 얼굴인 무분별하고 말로 옮길 수 없는 중얼거림,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분노the sound and the fury', 수다, 아무 의미 없는 소음 등이. 세계가 사라질 때, 시인에겐 말 역시 사라진다. 어쩌면 이 순간 그는 뒷걸음질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말을 기억하려하고, 학습했던 모든 것, 즉 조금 전만 해도 그에게 외부로의 길을 열어주고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 같던 그 아름다운 말들을 내부에서 끄집어내려 애쓴다. 그러나 뒤에, 혹은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팽팽하고 긴장되게, 앞을 향해 던져진 시인은 문자 그대로 그를 벗어나 있다. 시인처럼, 말들도 저 너머, 언제나 저 너머에서, 스치기만 해도 바스러질 듯이. 자신 밖으로 던져진 그는 결코 말과, 세계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될수 없다. 시인도 말도 '항상 저 너머이다'. 말들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주어진 상태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마치 매일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창조하듯이, 그것들을 창조하고 발명해 내야 한다. 어떻게 말들을 창조하는가? 무에서는 무만 나온다. 만일 시인이 무에서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 해도, '언어를 발명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언어란, 당연히, 대화이다. 언어는 사회적인 것이고, 언제나 최소한 말하는 자와 듣는 자 두명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시인이 발명하는 말은--그 말은 모든 순간을 포함하는 한 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침투할 수 없는 물건으로 변한다--매일 매일의 일상의 말이다. 시인은 자신에게서 그 말을 꺼내지 않는다. 외부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우리 앞에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실상 안도 밖도 없다. 우리가 존재한 순간부터, 우리는 세계 안에 있고, 세계는 우리 존재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이다. 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안이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이다. 그것들이 바로 우리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낯선, 다른 사람들의 것이다. 즉, 그것들은 우리를 구성하는 '타자성'의 여러 형태 중의 하나이다. 시인이 스스로를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존재로 느끼고, 언어를 포함한 모든 것이 그로부터 떠나고 해체될 때, 그 자신도 떠나고 사라진다. 그 다음 순간 침묵이나 알아듣지 못할 혼돈과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하고 더듬더듬 언어를 창조하려고 시도할 때, 그 자신이 새로 창조되고 치명적 도약을 통해 재탄생해서 다른 사람이 된다.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이 되어야 한다. 그의 언어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타인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 된다. 그것을 진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미지와 형용사와 리듬에, 즉 그것을 타자화하는 모든 것에 의지하게 된다. 이렇게 그의 말은 그의 것이면서 또한 아니다. 시인이 어떤 이상한 목소리를 듣는게 아니다.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말이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목소리와 말인데 단지 그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그의 말과 목소리만 이상한 게 아니다. 그 자신, 그의 존재 전부가 끊임없이 낯선 것, 항상 타자로 변하는 무엇이다. 시어는 우리의 원초적 존재 조건의 계시이다. 왜냐하면 시어를 통하여 시인은 타인으로 불리며, 이렇게 그는 동시에 이것이며 저것이고, 그 자신이면서 타인이 되기 때문이다.
-활과 리라, 中에서
'옥타비오 파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바람과 물과 바위 - 옥타비오 파스 (0) | 2006.05.31 |
---|---|
시인의 운명 / 옥타비오 파스 (0) | 2006.05.19 |
대화 옥타비오 파스 (0) | 2006.05.19 |
짝수와 홀수 (0) | 2006.05.19 |
태양의 돌 / 옥타비오파스 (0) | 2006.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