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나무숲파도>님의 블로그에서
우리집에 왜 왔니 / 이시하
어둠을 파고 시궁쥐 눈깔 같은 봉숭아 씨앗을 심을래요 모르는 집 창문에 애절히 피워나 모르는 그들을 울게 할래요 봉숭앗빛 뺨을 가진 어린 손톱에 고운 핏물을 묻힐래요.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서둘러야 해요 나를 통과해 가는 그대의 눈을 볼래요 너무 오래 견딘 상처는 아물지 않아요 몹시 처량해진
나는 모르는 집 창문 밑에서 울 거예요 당신을 부르며 울 때 사람들은 어두워져요
문이 닫혀요
이렇게 부질없는 이야기는 처음 해봐요 나는 늘 술래이고 아직 아무도 찾지 못해요 가위바위보가 문제에요 나는 주먹만 쥐고 있거든요 아무도 내게 악수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아요 당신도 곧잘 숨는다는 걸 알아요 이제는 내가 숨을래요 꽃 피지 않는 계절에 오래도록 갇혀있을 거예요
우리 집에 왜왔니 왜왔니 왜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봉숭아꽃이 만발했어요 보세요 정말 내가 모르는 집이에요 창문 밑에 피어난 저 붉은 봉숭아! 무슨 꽃은 봉숭아꽃이어야 해요 당신은 봉숭아꽃을 찾으러 온 거예요 나는, 나는 꽃 피지 않을 거예요.
[심사평]
예년과 같이 많은 작품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심지어 해외에서까지 날아 들었다. 응모한 253명이 보여준 1604편의 작품을 읽었다. 대개 상당한 습작기를 거쳐 일정 수준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만큼 고르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엇비슷한 언어구사와 소재 처리가 두드러져 규격화된 유행이 퍼져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개성적인 소재 처리와 말솜씨가 뚜렷한 작품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개성을 드러내려고 작위적으로 ‘튀는’것은 눈에 거스르는 일이요 하나의 취약점이다. 또 산문과 시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길어지고 장황해지는 경향도 소망스러운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기다운 시선과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여러 응모자들의 자성과 배가되는 노력을 요청한다. ‘집 나간 비둘기를 찾습니다’(최종길)는 순진한 발상이고 어사 선택도 아주 소박하다. 그래서 허를 찌르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상투성에 물들지 않은 것이 큰 장점이다. 그러나 나머지 작품들이 허약해 새 얼굴로 나서기에는 미흡하였다. ‘인사’, ‘꽃잎’,‘문래동 4가 8번지’(안경숙) 등 다섯 편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보여주고 있다. 산문화 성향을 억제하고 소재의 경제적인 처리를 지향하고 있는 것도 아주 든든하게 생각된다. 또 다루고 있는 소재도 다채로운 편이어서 믿음직스럽다. 그러나 대체로 소품이어서 매우 아쉽지만 이번엔 더 정련할 시간을 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에 왜 왔니?’‘꽃놀이 꽃놀이’등 다섯 편을 보여준 이향미 씨의 작품들은 섬세하면서도 경묘하고 신선하다. 그리고 소재처리나 언어 수사의 상투성을 피하고 있음도 잘 드러나고 있다. 또 시와 산문의 차이라는 것도 잘 분간하고 있어 믿음직스럽다. 작품에 여백을 두고 여운을 남겨주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집에 왜 왔니’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 자기 목소리가 더욱 뚜렷한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ㅡ심사: 신경림 시인, 유종호 평론가
【지용문학상 당선자 이향미씨】 “담담하게 아스러지는 물처럼 시 쓰고 싶어
“정지용 선생님 시의 이미지와 제 시의 이미지가 많이 달라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기쁜 소식을 듣다니…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요.” 12회 지용신인문학상 당선자 이향미씨(39·경기도 의정부시 신곡2동 극동아파트 104동 103호·☏031-827-1085·사진)는 자못 상기된 모습이었다. 시 공부를 시작한지 3년만에 큰 상을 받게 된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당선작 ‘우리 집에 왜 왔니’는 유년 시절의 놀이에서 모티브를 얻은 시로 아련한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 집에 왜 왔니’는 아이들이 두 패로 나뉘어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상대편의 아이 한 명씩을 선택해 데려가는 놀이. “상대편이 다른 편의 아이를 지적 할 때 긴장하는 아이들. 불운이 나를 피해 남에게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 자신의 둥지를 떠나 다른 둥지로 가야만 하는 안타까움 등이 노래 속에 숨어 있는 것 같아 슬펐다”고 말하는 이 씨에게서 유년시절의 작은 놀이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는 시인의 섬세함이 묻어난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경묘하면서도 신선하며 작품에 여백을 두어 여운을 남겨주고 있다고 호평했다. 이 씨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3년 전부터였다. 주부로서의 삶에 대한 회의와 자아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게 했고 그것이 글을 쓰는 계기가 됐다. 이 씨는 고등학교도 갈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다. 산업체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몸이 아파 중도에 학교를 그만뒀고 우여곡절 끝에 남들보다 2년 늦게 인문계인 철원여고에 들어가게 됐다. 그 시절에는 그저 감수성 풍부한 여고생들이 흔히 그러하듯 시를 끄적여 보았을 뿐 시인이란 직업은 감히 꿈꿔볼 수 없는 머나먼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려웠던 시절 농촌은 동생, 어머니, 아버지를 잇달아 여읜 이 씨의 아픔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대지였다. 아직도 이 씨는 슬픔이나 가난 따위를 잊었던 젊은 날의 기억들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고 한다. 이 씨가 본격적으로 시공부를 시작하자 처음에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번 붙들기 시작한 시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이제는 누구보다도 남편 박병희 씨(44·한식조리사)와 초등학교 5학년과 2학년에 재학중인 아들, 딸이 가장 큰 지지자가 돼 주고 있다. 이 씨는 이번 상에 자만하지 않고 앞으로 문학공부를 더 열심히 할 예정이라고 한다. “인생의 깊이가 녹아있는 시, 문학적 향기가 배어있는 시를 쓰기 위해 시적 자산들을 축적하겠다”며 시작에 대한 강한 열정을 내비친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이 씨가 지은 자신의 필명은 ‘시하(翅河)’ 즉 ‘물의날개’를 의미한다. “수증기, 안개 등에서 물방울들이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는 물의 날개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이 씨는 “시 역시 조금 모자란 듯, 비어있는 듯, 담담하게 아스러지는 물처럼 쓰고 싶다”며 소망을 밝혔다. 시상식은 지용제 행사의 일환으로 오는 13일 오전 11시 옥천군청회의실에서 열리며 500만원의 고료가 주어진다. <2006.5.8 동양일보/ 조아라 기자> |
'수상작품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빈집의 약속 / 문태준 (0) | 2006.05.31 |
---|---|
사과 / 송찬호 (0) | 2006.05.17 |
입이 없는 돌 / 유안진 <`06년 제20회 소월문학상작품집 문학사상> (0) | 2006.03.30 |
미안하구나 / 송재학 <`05년 미당문학상 수상작> (0) | 2006.03.29 |
빗방울 화석 / 황동규 (0) | 2006.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