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속 詩

춘수 / 정끝별

자크라캉 2006. 5. 16. 22:07



                         사진<운항등>님의 블로그에서

수(春瘦) / 정끝별





마음에 종일 공테이프 돌아가는 소리


질끈 감은 두 눈썹에 남은


봄이 마른다


허리띠가 남아돈다


몸이 마르는 슬픔이다


사랑이다


길이 더 멀리 보인다


 

-시집삼천갑자 복사빛(민음사, 2005)




■ 해설 / 권두련



이 시를 읽으려면 우선 낮선 한자를 통과해야 한다. 보통 근심 수(愁)자를 써 ‘봄날에 일어나는 뒤숭숭한 근심’을 말하는 경우는 있어도, 몸이 마르다는 뜻의 마를 수(瘦)자를 쓴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니 이 시는 ‘뒤숭숭한 근심’을 넘어 그 근심 때문에 ‘몸이 마르는’ 지경까지 되었다는 걸 전제로 하고 있다.


보통 春愁라고 하면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그러니까 보릿고개가 엄존하던 시절, 무엇을 먹으며 봄을 넘길까하는 고민이 연상된다. 비롯 1차적인 욕구지만 그만큼 간절한 고민은 다시없었다. 그런데 이 시에선 春瘦라고 한다. 무엇 때문에 몸이 마를까? “몸이 마르는 슬픔이다/사랑이다”라는 시행에서 단호하게 말하고 있듯 ‘사랑’ 때문이다.


한 사람이 있어 늦가을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춥고 외로운 겨울을 견뎠다. 그리고 봄! 모든 생명이 싹을 틔우듯 새로운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마음에 종일 공테이프 돌아가는 소리”, 지나간 사랑이 깊었던 만큼 새로운 사랑은 쉽지 않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지나간 사랑을 안으로 안으로 삭혀도 “두 눈썹에 남은”건 지난 사랑의 기억이다. 그러니 지난 사랑을 툭툭 털고 새로운 사랑 찾기가 힘들다. 하여 몸이 “마른다/허리띠가 남아돈다”

픽션을 가미하면 대충 이런 스토리일 것이다. 하긴 지난 사랑에 연연하여 고민하는 연륜 있는 사랑 뿐 아니라 처음 사랑이 다가 오지 않아 애태우고 조바심치는 나 어린 청춘의 사랑을 대입해도 몸이 마르는 건 마찬가지다. 사랑 대신 ‘정신’이나 ‘영혼’, ‘성취’ 등을 대입해도 그 또한 간절하기는 마찬가지다.

너무 논리적으로 말해서 “마음에 종일 공테이프 돌아가는 소리”의 그 청각적이고 시각적인 이미지와, “질끈 감은 두 눈썹에 남은” 그리움의 표정을 딱딱하게 만들긴 했지만 요는 바램(또는 욕망)이 그만큼 간절하다는 것이고, 그 간절함에 비해 그걸 이루기는 어렵다는 걸 나타내고 있다.


배고픔의 형이하학적 욕구 충족과 몸 마르는 형이상학적 사랑 충족, 이 둘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게 “길이 더 멀리 보인다”는 구절이다.

여기서 “길”은 한계(또는 테두리)와 같은 말이고, “더 멀리”는 ‘거기까지’와 ‘그 너머’를 동시에 말하고 있다. 배고픈 자는 ‘거기까지’를 원할 것이고 사랑에 목마른 자는 ‘그 너머’를 원할 것이다. 배고픔의 욕구와 사랑의 욕망 차이다. 그러나 고통을 견딘 자는 구도자처럼 ‘그 너머’를 건너다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높고, 사랑을 지나치게 탐닉하다보면 ‘거기까지’ 밖에 이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배고픈 자는 다음 봄도 배고플 것이고 사랑에 고민하는 자는 그 마음의 고통을 통해 혜안이 열릴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 시를 읽는 재미 중 하나는 이렇게 “길”과 “더 멀리”이란 시어를 가지고 배고픔과 사랑, 욕구와 욕망, 혜안과 머묾, 형이하와 형이상, 다시 형이상과 형이하가 서로서로 교차하는 ‘크로스(X)역크로스(X)의 구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결국 같은 말이지만 그만큼 다양한 재미가 있다는 말이다.

본문에서 몸 마름의 원인이 사랑이라고 단호하게 말했음에도 배고픔을 끼어 넣어 시평이 오히려 시를 복잡하게 만든 것은 한 행을 한 연으로 처리하고 그 사이 한 행을 띄운 것 때문이다. 이 한 칸 띄운 공간은 물론 아련한 그리움과 간절한 갈망의 공간이지만, 헛헛한 배고픔의 공간으로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해설을 읽는 독자들이 ‘크로스(X)니 역크로스(X)’니 새로운 말로 꼬시기만 했지 “시평은 엑스(X)야 엑스(X)”라고 하겠지만, 시평 할 때 학자들의 근사한 말만 인용하지 않고 이렇게 신조어를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어서 한 번 써 보았다.


-『즐거운 시 읽기』(책나무출판사, 근간) 중에서




 

 

          정끝별 시인

1964년 전남 나주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88년 『문학사상』에 시와

1994년 『동아일보』에 평론으로 등단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 세계사 1996

『흰 책』 민음사 2000

『삼천갑자 복사빛』 민음사 2005

시론.평론집

『패러디 시학』 문학세계사 1997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하늘연못 1999

『오룩의 노래』 하늘연못 2001

시선평론집

『시가 말을 걸어요』 토토북 2004

현재 명지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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