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자. 이 그림은 19세기 중엽에 활동한 북산 김수철의 매화도이다. 이미
고려시대 이래로 상류사회 선비들 사이에서 이런 사군자 그림의 솜씨를 몸에 익히는 기풍이 일어났으며, 조선 시대 오백 년 동안에도 매화의 명수들이
수없이 배출되어 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책『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에서는 이 그림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최순우 선생의 말을
들어 보자. “매화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옛사람들은 매화를 친다고 했다. 흐드러지게 잘 생긴 젊은 가지나 해묵은
고목등걸에 마치 매화 꽃망울이 짓뿌려지듯이 가락과 멋을 차려서 환을 친다는 말인 듯 싶다. 옛날부터 문인 묵객들은 멋진 매화 한 폭, 난초 한
포기를 제대로 칠 줄 아는 것을 필수 교양으로 삼았고, 이러한 선비들의 매화나 난초 그림은 그들 자신의 염치를 가릴 줄 아는 처세와 청렴한
마음의 자세를 밝힌 하나의 좌표로 되어 왔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선인의 그림을 본따거나 그 체를 이어 그리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독창적인 그림은 매우 적었다. 마치 그들이 중국 명필의 글씨를 본받아 몸에 익혀 왔듯이 매화 그림에서도 그러한 굴레를 과감하게
벗어버리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다. 김수철의 이 〈매화도〉는 그런 전통적인 매화 그림의 격식에 얽매임이 없이 늣늣하고 가락진 멋을 마음껏
부려본 작품으로 매화가지의 율동과 바위 등걸이 지닌 침묵의 아름다움이 한 폭 속에서 흥겨운 해화를 이루었다.”
해화를 이루었다는
말은 서로 잘 어울린다는 뜻이다. ‘매화 가지의 율동과 바위 등걸이 지닌 침묵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해화(諧和)’ 그림을 읽어내는 예술적인
눈과 그 표현이 경지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받는다. 계속해서 최순우선생의 도움을 받아가며 그림을 감상해 보자.
 이 그림은 겸재 정선의 〈금강산 만폭동도〉이다. “겸재 정선의 한국 풍경화는 한국 산천의
아름다움이 지닌 뼈대와 그 정기를 집약해서 가장 신선하게 표현한 점에서 주목을 받기에 족하다. 변화무쌍하고 심산 유원한 만폭동 계곡 풍경의
골수를 가장 실감나게 표현한 걸작이라 할 것이다. 촉촉히 돋친 아득한 만이천봉 위에 훤하게 솟아난 비로봉, 청송이 우거진 계곡에는 자욱한 안개
속에 녹수청산을 구가하는 폭포와 여울물 소리의 억척스러운 화음이 있으니 필시 겸재는 비 갠 후의 금강산이 보여 주는 청정한 모습을 그린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화폭의 중앙 너럭바위 위에 동자를 거느리고 손을 들어 가리키는 한 선비의 모습, 그것은 아마도 이 아름다운 만폭동을 현실
속에서 그리고 그의 시정 속에서 수없이 소요했던 겸재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다음 그림도 정선의 그림이다. 〈조옹도〉이다.
 "한국에 처음 나들이 온 청나라의 한 지식인이 한국의 산천을 보고 나서 비로소 겸재의 산수화가
신필임을 알았노라 했다는 이야기가 『금석집』에도 전해지고 있지만, 조국의 산하를 그려서야 비로소 그의 붓끝에 신명이 솟구쳤던 것이다. 어느
시골 계곡에나 있을 법한 줄기차고 청청한 시냇물가에 누구의 눈에나 익숙한 우람스러운 한국의 암벽과 암반, 그리고 그 밑을 감도는 맑은 소에
낚시를 드리운 조옹의 처연한 모습에서 겸재는 아마도 자신의 영상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렇게도 신선한 필치, 그렇게도 시원스러운 포치(배치),
그리고 묵향 내음, 엷고 짙은 먹빛의 청정함이 오히려 여름물의 시원함을 딛고 넘어섰다는 느낌이다. 어립을 숙여 쓰고 정좌하여 시름없이
수면을 바라보는 조옹의 뇌리에 지금 무슨 생각이, 무슨 사색이 오가는지, 마음의 신선함은 족히 여름살이의 괴로움을 이렇게 차원 높은 즐거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을 겸재는 자신의 그림에서 멋지게 예시해 주었다."

네 번째 그림은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이다. “혜원이 풍속화에서 보여준 작가적인 역량 즉
인물 풍속의 배경처리라든가 화면 포치의 원숙함이라든가 만만치 않은 필력 등은 이미 그러한 산수화의 기량에서 보여 준 격조의 높이를 반영했음이
분명하다. 이 밀회의 화면에서도 보다시피 새벽 달빛 아래 은은한 정경이 사뭇 짜릿하게 느껴질 만큼 실감이 서려 있다고 할 수 있고 또
화제에도 쓰여 있듯이 ‘달빛은 침침하고 밤은 깊어 가는데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네.’라고 읊은 정경이 너무나 은근해서 사랑의 담장이
높기만 하던 이조사회의 연애감정을 절절히 가락 잡아 주고 있다는 느낌이 깊다. 고개를 숙이고 다소곳이 장옷을 잡은 연연한 여인의 자세와
거드럭거린 너그러운 두루마기 주름 속에 감추어진 젊은 사내의 설레는 가슴이 묘한 화음을 일으키고 있어서 혜원은 조선사회의 사랑을 사실(寫實)한
유일한 작가였음을 엿보여 주고 있다.”
여기까지 최순우 선생의 도움을 받아 그림을 꼼꼼하고 깊이 있게 감상해 보았다. 그런데 위의
네 그림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김수철의 〈매화도〉는 꽃과 그 꽃이 몸을 내리고 있는 바위의 자연 서경만을 그리고 있다. 정선의
〈만폭동도〉에는 사군자도에서는 나오지 않던 사람이 자연 풍경의 한 작은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변화무쌍하고 심원유수한 만폭동 계곡의 경치가
화폭 전체를 압도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세 사람의 인물의 크기는 전체 구성 상 아주 미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그 세 사람의 모습을 한 번
손가락으로 가리고 그림을 다시 한 번 보자. 아마 무언가 다른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화면 구성이 금방 산만해지고 그림 자체가 밋밋하다는
느낌이 들게 된다. 어쩌면 이 작은 사람의 모습이 이 그림 전체에서 화룡점정의 구실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될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정선의 그림〈조옹도〉에 오면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모습이 좀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만폭동도〉에서처럼 단순하게 자연의 일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자연과 대등한 존재로서의 사람, 자연 속에서 자기 일과 삶을 찾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거기 있는 것을 발견한다. 신윤복의 풍속도
〈월하정인〉에 오면 사람 사이의 일과 느낌 이런 것의 비중이 더 커지고 자연은 배경으로서의 역할로 바뀌게 된다. 사람의 위치를 중심으로
비교한다면 〈매화도〉에서는 서정적 자아가 완전히 배제 되어 있는 풍경화 그 자체이고, 〈만폭동도〉에 오면 자연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고 싶은
서정적 자아가 투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조옹도〉에 이르면 서정적 자아가 자연과 대등한 위치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고, 〈월하정인〉에
서는 사람살이의 모습이 중심이 되며 자연을 그 배경쯤으로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 물론 김홍도의 풍속화에 오면 자연이 완전히 배제 된 채 사람들의
삶 그 자체만으로 화면 전체를 구성하는 변화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나라 그림의 이런 모습은 자연을 소재로 한 서경시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대등한 대비를 이루고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을 일단 해 보게 된다. 다음 시들을 보자.
산은
구강산(九江山) 보랏빛 석산(石山)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박목월 「산도화
1」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치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박용래
「그 봄비」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 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느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박용래「겨울밤」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박목월
「윤사월」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뎄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 놓고 먼 산 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둥이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짐승들의
굴속에서도 흙 한 줌 돌 한 개 들성거리지 않는다.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랠까봐 지구처럼 부동의 자세로 떠간다. 그럴
때면 새나 짐승들은 기분 좋게 엎데서 사람처럼 날아가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 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오리로 올라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울적하면 솟아서 높은 봉우리가 되고 물소리가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계곡이 된다
산은 한 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고산도 되고 명산도 된다.
산은 기슭에 언제나
봄이 먼저 오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김광섭 「산」
마음 무거워
무거운 마음 버리려고 산사까지 걸어갔었는데요 이끼 낀 탑 아래 물봉숭아 몇 포기 피어 있는걸 보았어요 여름내 비바람에 시달려 허리는
휘어지고 아름다운 제 꽃잎이 비 젖어 무거워 흙바닥에 닿을 듯 힘겨운 모습이었어요 비안개 올리는 뒷산 숲처럼 촉촉한 비구니 스님 한
분 신발 끄는 소리도 없이 절을 돌아가시는데 가지고 온 번뇌는 버릴 곳이 없었어요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만 사랑하고 살아가며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제가 지고 선 세속의 제 무게가 있는가 봐요 내리는 비 한 천년쯤 그냥 맞아
주며 힘에 겨운 제 무게 때문에 도리어 쓰러지지 않는 석탑도 있는걸 생각하며 가지고 왔던 것 그대로 품어 안고
돌아왔어요 절 지붕 위에 초가을 비 소리 없이 내리던
날.
---도종환「초가을 비」
박목월의 「산도화 1」은 속세를 벗어난 이상향의 세계를 간결한 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한 폭의 깨끗한
산수화를 보는 듯한 이 시속에는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배제 되어 있다. 이 시의 구강산은 실재하는 산이 아니며 시적으로
이상화된 선경이다. 현실의 고통에서 멀리 떠나 평화와 아름다움을 구하고자 하는 시인의 생각 속에 그려진 신선도 같은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박용래의 「그 봄비」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사람의 냄새가 느껴진다. 봄비가 내리는 곳이 꽃이나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산등성이나 물 또는 사슴의 머리 위가 아니라, 김치독 자리, 시래기줄, 모스러진 돌절구바닥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눈이
풍경을 묘사하더라도 어디로 향하는가의 차이에 따라 그 느낌은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
라는 이 섬세하고 서정적인 풍경 위에 인간의 삶과 함께 하는 자연의 모습을 배치한 시인의 따뜻한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게 한다. 「겨울밤」은
고향집의 눈 내리는 밤 풍경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도 시인의 시선은 고향집 마늘밭, 추녀 밑에 쌓이는 달빛, 마당귀에 머문 바람을 향하고 있는데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는 게 앞의 시들과 차이를 보이는 점이다. 물론 기, 승, 전, 결의 전에 해당되는 부분에
적절하게 배치하여 정적인 장면에 동적인 변화를 주는 솜씨도 좋고 짧은 시속에 담아 내는 사람살이와 자연의 조화가 겸재의 어떤 그림과 비견될
듯하다. 자연과 사람의 조화와 균형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윤사월」은 시에서 차지하는 자연의 크기와 사람의 크기가 거의
대등하다. 1연은 깊은 산 속 외딴 봉우리 노랗게 날리는 송화가루를 그린다. 1연이 배경이라면 2연은 장면의 시작이다. 진종일 노란
꾀꼬리가 운다. 3연에 사람이 등장한다. 산지기 외딴집의 눈먼 처녀, 혼자 있는 외로운 처녀와 한 마리의 꾀꼬리. 4연에서는 눈먼 처녀가
문설주에 귀를 대고 꾀꼬리 울음을 엿듣고 있다. 외로움과 한 이런 것들이 초여름의 산 속을 배경으로 빼어나게 그려지고 있다. 다만 아직도
토속적인 서정의 세계 속에서 능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광섭의 「산」은 전통적인 산수화의 세계로
그려낸 산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산을 통해 인간의 삶의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그런 산이다. 산의 모습에서 발견하는 인간의 삶의 자세,
우리가 산아래서 산과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발견하는 그런 산으로 시인에게 다가와 있다. 「초가을 비」속의 자연은
어떠한 모습의 자연인가. 이 시의 공간은 속세와 떨어진 산사이다. 거기서 시적 화자는 비를 맞고 서 있는 석탑과 비바람에 시달려 허리가 휘어진
물봉숭아 몇 포기, 비안개가 올라가는 뒷산의 숲, 그리고 절 지붕 위로 소리 없이 내리는 초가을 비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것들의 묘사에 대한
비중보다 풀지 못한 번뇌에 대한 생각이 더 주를 이루고 있다.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만 사랑하고 살아가며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제가 지고 선 세속의 제 무게가 있’다는 깨달음에 주제가 가 있고 산사의 풍경은 배경의 구실을 하며 시속에 녹아
있다.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 줄기 지나갔나 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 놓은 젊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신경림
「여름날」
이른 새벽 여관을 나오면서 보니 밤새 거리에 벚꽃이 활짝 피었다 잠시 꽃향기에 취해 길바닥에
주저앉았는데 콩나물 사들고 가던 중년 아낙 어디 아프냐며 근심스레 들여다본다 해장국집으로 아낙네 따라 들어가 창 너머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본다 창틀 아래 웅크린 아낙의 어깨를 본다
하늘과 세상을 떠받친 게 산뿐이 아닌 것을
본다
---신경림 「산그림자」
두 편 다 길지 않은 짧은 시다.「여름날」은 소나기가 내린 어느 여름날 마을 앞 물가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화자가 버스에 앉아서 바라본 잠깐 동안의 풍경이다. 이 시의 배경이 된 마을은 지리산 아래에 있는 마천이라는 마을이다. 잠깐 조는 사이에
소나기가 내렸는데 물이 불어 버스는 물을 건너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다.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로 물이 이렇게 불어나는 마을이면 산골짜기 계곡
가까운데 있는 마을임을 알 수 있다. 이 시의 원경을 아마 높은 지리산 자락이 둘러싸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물을 젊은 아낙이 건너고 있다.
허연 허벅지가 드러나도록 옷을 걷어올리고 물을 건넌다. 젊은 아낙의 자신감은 이 물을 많이 건너다녔기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이 고장에 오래
살아서 물이 불어난 풍경에 익숙해졌거나 물이 줄어들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시의 풍경을
바라보는 모든 눈이 이 젊은 아낙에게 집중되고 있다. 버스도 머뭇거리고 있는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인의 싱싱한 몸짓, 물살과 함께
출렁거리는 걸음걸이, 살아 꿈틀대는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화자는 소나기에 젖은 물가의 버드나무에서 비릿한 살냄새를 맡았다고 했지만 아마 이
유추는 물을 건너는 여인에게서 출발했을 것이다. 짙푸르게 우거진 지리산 골짜기와 그 아래로 보이는 산골마을, 넘실거리는 개울물과 산뜻한
버드나무, 이런 여름 풍경 속에 물을 건너는 젊은 아낙이 배치되어 있지만 그림 전체에서 시선이 집중되는 곳은 젊은 아낙이다. 젊은 아낙이
차지하는 비중이 제일 크다. 「산그림자」도 비슷하다. 벚꽃이 활짝 핀 봄날이다. 어젯밤엔 몰랐는데 아침에 보니 벚꽃이 만개하였다. 이
시의 화면을 가득 채우는 벚꽃이다. 화자는 꽃향기에 취해 길바닥에 주저앉을 정도다. 그러나 이런 화사한 풍경은 해장국집 아낙을 따라 동선이
움직이면서 변화한다. 해장국집 창 너머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보다가 음식을 준비하느라 창틀 아래 웅크린 아낙의 어깨를 본다. 그러다 하늘과
세상을 떠 받친 게 산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낙의 웅크린 어깨 역시 하늘과 세상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이다. 창을 중심으로 보이는 창
너머 산의 능선과 창 안쪽 어깨의 선을 견주어보면서 해장국을 팔며 살아가는 여인의 어깨가 주는 삶의 선이 얼마나 육중하고 든든한 것인가를
말하려고 하는 화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창이라는 액자 안에 들어와 있는 우뚝한 봄 산, 아름답기로 이름난 영암(이 시의 부제에
‘영암에서’ 라는 말이 나온다)의 봄 산과 세상을 가득 덮은 벚꽃, 그리고 중년 아낙의 웅크린 어깨 이것이 우리가 보는 한 장의 풍경화이다.
그러나 중년 아낙에게서 느끼는 삶의 냄새가 풍경을 넘어서는 걸 느낀다. 두 편의 시 모두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풍경 속에
인간의 움직임이 녹아 있지만 삶의 냄새와 건강한 생명력이 넘치는 걸 느낄 수
있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태어나 자연과 함께 산다. 자연의 아주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정신작용에도 밀접한 영향을 받는다. 눈이나 비가 내리거나 날씨가 조금만 흐려도 기분이 달라지고 거리를 걷다가 바람이 머리칼을 날려도
많은 생각이 떠오르게 된다. 도시의 콘크리트 숲에 갇혀 있을 때하고 노을지는 바닷가에 서 있을 때 갖는 생각과 느낌은 다르다. 자연 속에서
사람은 심성을 아름답게 탁마하며 아름다움에 대해 눈뜨게 된다. 정신 생활이 발전하면서 심미능력이 높아지고 그것을 아름답게 느끼는 만큼 표현하고
싶어한다. 다만 그것이 맹목적인 자연예찬이거나 자연으로의 도피이어서는 곤란하다. 그렇게 되면 자칫 연하장 그림처럼 상투적인 작품에 머물거나
단조로워 질 수 있다. 자연과 함께 하되 인간의 삶이 거기 녹아 있는 자연으로 어떻게 그려낼 것이냐 하는 것을 더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