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시론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 도종환

자크라캉 2006. 5. 9. 18:40
5.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내게로 왔습디다.
내 문간에 낙엽 한 잎 떨어뜨립디다.

가을입디다.

그리고 일진 광풍처럼 몰아칩디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
오늘 내 문간에 기어이 휘몰아칩디다.
                 --- 최승자 「가을」

사람은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한다. 단 한 순간도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면 견딜 수 없어 한다. 이내 절망하게 되고 사랑이 없는 상태를 죽음과 같다고 느끼게 된다. 그것이 이성에게서 느끼는 사랑이든 자식이나 연인 또는 종교적인 대상에게서 느끼는 사랑이든 누군가로부터 어떤 사랑도 받고 있지 못하면 그는 살고 싶은 의욕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요 살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동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시로 그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한다. 끊임없이 사랑을 찾아 나서고, 느끼려 하고, 순간 순간마다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 보려 한다.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최승자 시인은 아주 무심한 척 달관한 척 이런 어조로 말했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숨기려 하고 무관심하게 내팽개쳐 두고 있는 듯한 태도의 이면에는 누군가 이런 모습으로 있는 나를 발견해 주고 다가와 주고 그래서 나의 외로움을 매만져 주길 바라는 마음의 딴청부리기일 것이다.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심리학 용어로는 ‘반동형성’ - 리액션 포메이션이라고 한다.
2연에서 ‘세월이 내게로 ’왔다고 했다. 세월. 그러니까 무심하게 나를 버려 둔 채 흘러가던 시간이 시간 속에 외롭게 버려져 있는 나를 발견하고 다가와 주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낙엽 한 장의 모습으로. 어느 가을에. 실은 그런 가을 그런 시간에 사랑이 내게 오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가, 고대하고 있었는가를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낙엽 한 장만 떨어져도‘일진광풍이 몰아치’는 것이다. 낙엽과 함께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이 함께 휘몰아치고 사랑의 폭풍에 감기고 마는 것이다. 1연의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하는 말의 속마음이 그게 아니었다는 것은 3연의 ‘오래’라는 말로서도 확인된다. 실은 오래도록 기다리고 사모하면서 세월 속에 묻혀 있었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며 마지막 행의 ‘기어이’라는 말로도 얼마나 그대를 생각하며 참아왔던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연애라 하는 것은 한 시간 전까지 전혀 모르던 남남이 일생을 통해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종류의 뜻밖의 일이 연애의 조건일 것이다.”(朱門)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지만 ‘전혀 모르던 남남’이라기 보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인 쪽이 더 많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은 물론 한 시간 전과 후가 크게 차이가 나겠지만 그 순간의 휘몰아치는 일진광풍, 사랑은 늘 그런 모습으로 오곤 한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 우리가 그 사랑이 언제 올 것인가 하고 늘 찾고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그런데 다음 시들을 읽으며 우리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사랑은 무엇인가? 왜 사람은 그렇게 끊임없이 사랑하고 사랑의 존재를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하는가?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매 꽃같이 숨었느냐.
                 ---유치환 「그리움」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귀절을 쓰면 한 귀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김남조 「편지」
유치환의 ‘그리움’을 보면 ‘없는 얼굴’을 찾고 있다. 그는 일찍이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이다.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거리를 헤매며 울고 있다.‘꽃같이 숨은’너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는 시이다.
김남조의 ‘편지’는 사랑스러운 그대 때문에 생기는 외로움과 그 외로움으로 인한 아픔을 노래한 시이다. 그러나 그대로 인한 슬픔을 통해 내가 더 정직해지고 나를 성찰하게 하는 거울로 작용하며 그대의 끝에서 내가 시작되는 그런 관계임을 알게 한다. 그래서 헤어져 있는 그대에게 편지 한 구절을 쓰면 그 한 구절을 와서 읽는다고 느낀다.
하나는 그리움을 또 하나는 외로움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지만 헤어져 있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되고자 하는 아픈 갈망을 갖고 있는 점에서는 같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정신작용 중에 가장 예민하고 예리한 과정인 사랑에 대한 사회과학적인 분석을 하면서 사랑은 근원적으로 소외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라고 이야기한다.

“인간에게 가장 뿌리깊은 욕구는 그의 소외감을 극복하고 고독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시대, 어떤 문화에서나 한결같이 똑같은 질문을 받아 왔다. 어떻게 하면 소외감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결합이 가능할까, 어떻게 하면 개인 생활을 초월하여 일체감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사랑이란 인간 내부에 있는 활동력의 하나이며, 인간을 그의 동료들로부터 소외시키는 장벽을 허물어뜨리고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고립감과 소외감을 극복시켜 주면서 동시에 나를 나이게 하는 개성을 유지시켜 준다.”
“스스로의 고립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는 인간의 비밀을 알고 싶어하는 또 하나의 인간 특유의 욕망과 깊은 관계가 있다....인간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려고 하면 할수록 신기루처럼 멀리 달아나 버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의 신비 속에 ‘그’라고 불리는 존재의 가장 깊숙한 핵 속에 파고 들어가 보고 싶은 욕망을 누르지 못한다.”
“인간의 신비를 알아보는 다른 길은 사랑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능동적으로 침투하는 행위이다. 사랑 속에서는 신비를 알고자 하는 욕망이 남과 결합함으로써 해소된다. 결합을 통해 나는 상대를 알게 될 뿐 아니라 나 자신과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결국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중에서

소외감과 고립감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상대방에 대해 알고 싶어하며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 드는 마음의 상태가 곧 사랑이라고 프롬은 말한다. 그러나 결국 아무 것도 알 수 없게 된다는 점과 인간이 근원적으로 고독한 존재라는 데서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비극이 있다.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냐’는 탄식과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절제는 그런 사랑의 비극성에 대한 깨달음 또는 사랑 때문에 울음 우는 내 심정을 헤아려 주고 이제는 네가 내게로 와주기 바라는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다음 시들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 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 쳐갔습니다
                     ---조병화 「초상」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 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이성복 「숨길 수 없는 노래 2」

조병화의 「초상」은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과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아픔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1연 그대와의 첫 만남 2연 사랑의 시작 3연 사랑의 고독 4연 잊어야 하는 슬픔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기 승 전 결의 방식으로 서술해 가고 있다.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때 느꼈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모에서 오는 아름다움만은 아니라는 의미를 우리는 읽을 수 있다. 내가 꿈꾸던 이상적인 사람의 모습 아마 그런 걸 발견했을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만의 생각이고 그대와의 사랑은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고독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독은 아름다운 그 사람을 남몰래 사랑한다는 것만으로 호사스럽게 생각되는 고독이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그대를 만나고는 잊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닷가를 미친 듯이 달려가야 했던 슬픔과 괴로움이 함께 하는 그런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과 아픔은 있지만 그대 쪽의 생각과 반응은 전혀 그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이성복의 ‘숨길 수 없는 노래 2’를 보자. 이 시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사랑하던 그대의 부재와 그로 인한 서러움이다. 그대와의 사랑으로 보낸 어둡고 답답했던 세월, 너무 빠르거나 늦은 속도로 비껴 가기만 하던 운명, 그래서 근원적으로 서러움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랑에 아파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사랑을 한다. 그런 줄 알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그대의 부재로 괴로워한다.
  그래서 칼릴 지브란은 일찍이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그대들을 부르면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를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를 싸안을 땐, 전신을 허락하라.
비록 사랑의 날개 속에 숨은 칼이 그대들을 상처받게 할지라도.
사랑이 그대들에게 말할 땐 그 말을 믿으라,
비록 북풍이 저 뜰을 폐허로 만들듯 사랑의 목소리가 그대들의 꿈을 흐트러 놓을지라도.
왜? 사랑이란 그대들에게 영광의 관을 씌우는 만큼 또 그대들을 괴롭히는 것이기에. 사랑이란 그대들을 성숙시키는 만큼 또 그대들을 베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기에.
  ..........
스스로 사랑을 깨달음으로써 그대들 상처받게 되기를.
그리하여 기꺼이, 즐겁게 피 흘리게 되기를.
                ---칼릴 지브란 ‘예언자’중에서

우리가 저문 여름 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네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어
네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열에 열 손가락 핏물 자국이 박혀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
그리움도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도종환 「봉숭아」

이 시는 손가락 끝에 봉숭아물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쓴 시다. 시적 자아와 사랑하던 사람과의 관계를 봉숭아꽃잎과 물이 든 손가락과의 관계로 대비시켜 가며 쓴 이 시는 내용적으로 사랑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핏자국과 아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앞의 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몸을 섞었던 사랑. 정신적이면서 육체적이기도 한 사랑의 구체적이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아픔과 고통을 동반하는 사랑의 길, 그것을 손톱에 물이 들어 지워지지 않고 있는 봉숭아물의 모습에 구체적으로 비유하여 형상화하고 있다.‘사랑이란 언제나 이별의 시간이 오기까지는, 자기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칼릴 지브란이 말했던 것처럼 이별 이후에 느끼는 사랑의 아픔과 남아 있는 상처까지를 시는 담고 있다.
곽재구는 사랑의 고통을 도리어 희망으로 승화시키며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섬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 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 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 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곽재구 「새벽편지」

사랑의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 속에서 아름다움과 자유로움과 따스함을 찾아내며 사랑의 섬 하나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게 하는 시적 화자의 사랑에 대한 자세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냥 얻어진 게 아니라 ‘다시 고통 하는 법을 익히면서’만들어 가는 것임을 알게 한다. 너를 사랑한다는 일은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함’이며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 향기를 맡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이란 새벽에 만나는 깨어 있는 정신이요 깊숙한 뜨거움임을 눈시울 붉어지며 깨닫고 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무수한 눈길의 번득임 사이에서
더욱 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문병란 「호수」

사랑이 외로움이다 그리움이다 아픔이다 많은 시인들이 그렇게 이야기 할 때 문병란 시인은 기다림이라고 말한다. 어떤 기다림?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난 그 끝에 만나는,‘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에 대한 기다림이다 .그리고는 다시 묻는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이렇게.
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긴 여정.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기다림의 끝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목마름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은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고 무수한 사람들의 어깨와 무수한 눈길 다 지나고 시간의 변두리로 물러나 혼자 있게 되었을 때, 더욱 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서 있는 그런 순간에 비로소 만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현종도 사랑은 생 뒤에 온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생 뒤에 온다.

그대는 살아 보았는가. 그대의 사랑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일 뿐이다. 만일 타인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 뒤에 온다면 그리고 타인의 슬픔이 자기의 슬픔 뒤에 온다면 사랑은 항상 생 뒤에 온다.

그렇다면 ?

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정현종 「사랑의 꿈」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사랑은 그 당시에는 모르다가 지나고 난 뒤에 늦게서야 그것이 사랑이란 걸 깨닫게 된다는 뜻일까? ‘사랑은 생 뒤에 온다’는 말은 또 무얼까? 살면서, 살고 난 뒤에 비로소 삶 속에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뜻일까?
삶으로서 삶 속에서 느끼고 깨닫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이 사랑이라는 관념을 향한 사랑 또는 막연한 그리움이었다면 그것은 ‘생 뒤에 오는’것이리라.
그래서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고 말하게 되었으리라. 삶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달아 알고 난 뒤에, 그 사랑의 뒤에 오는 것이라면 사랑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삶과 사랑의 관계. 삶 속에서 삶으로 부딪히며 깨달아 가는 사랑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살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실재를 알기 위해서, 아니 내가 가지고 있는 환상이나 불합리하게 이지러진 선입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상대나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고 에리히 프롬은 말했다.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이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 속의 아픔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 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참 된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 하나가 다 이뻐 보이고
소중하게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
당신으로 이어지던 날들과
당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얹은 어느 날
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
우리 둘인 참 좋았습니다
이 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
그러나 다 내 조국 산천의 아픈
한 봄입니다.
행복하시길 빕니다
안녕.
                  ---김용택 「사랑」

헤어진 뒤의 괴로움과 아픔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이 시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필치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상대방의 입장으로 돌아가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 잊을 건 잊어야 ’함을 생각하며 자기의 마음이 치유되기를 기다리는 이 시의 시적 화자가 가장 크게 깨달은 부분은 1연의 마지막 행일 것이다.
이제 생각해 보면 / 당신도 이 세상 하고 많은 사람들 중의 /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을 단순히 감상적이거나 심정적인 차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삶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특히 사람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눈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헤어짐의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보이고 / 사람들의 몸짓 하나 하나가 다 이뻐 보이고’‘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랑의 아픔을 통해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솔직하고 진솔하게 고백하며 리얼리즘 시의 알짜배기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 서로 사랑하다 미워하며 돌아서야 하고 함께 있으면서도 사랑하는 괴로움 때문에 가슴 아파할 때 우리는 ‘칼릴 지브란’의 다음과 같은  시 구절을 조용한 목소리로 읽고 또 읽게 된다.

  서로 사랑하라, 허나 사랑에 속박되지는 말라.
  차라리 그대들 영혼의 기슭 사이엔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두라
  서로의 잔을 채우되 어느 한 편의 잔만을 마시지는 말라.
  ......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게 하라,
  비록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외로운 기타아 줄들처럼.

  서로 가슴을 주라, 허나 간직하지는 말라.
  오직 삶의 손길만이 그대들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허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칼릴 지브란 ‘예언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