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 작품집
<틈> 외 4편
봉하연
어릴 적 내 방엔 다락이 있었다
문은 얇은 합판으로 오래되고 낡아서 아무리 힘껏 닫아놓아도
조금씩 사이가 벌어졌다
나는 잠들기 전이면 그 틈 속으로 나를 혼자 두고 밭으로 가는 엄마의 오토바이 소리 안방에서
탕탕 발을 구르던 할머니의 주정 내 팬티 속에 손 집어넣던 막내 외삼촌의 숨소리 가끔씩 37사단에서 날아오던 훈련기의 굉음
같은 것들을 밀어넣다가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곰팡이처럼 핀 맹독 같은 어둠속에서 서걱서걱 벽에 댄
스티로폼을 갉아대는 쥐, 쥐새끼 처럼 소굴을 만드는 나의 기억들 그후로 틈은 잘 기른 기억들을 떼지어 내보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중에 한마리, 게워낸 막걸리처럼 쉰내 나는 트림 속으로 자장, 자장, 자장, 자장,
그리고 오래된
기억들이 다락방 먼지처럼 일어서서 내 첫 남자의 무게만큼이나 나를 숨막히게 하는 밤 오늘도 나의 한쪽 벽에 나타나는
낡은 다락문 꼭 닫히지가 않는다
<그리운 식탁>
실컷 앓고 난 후에 잘 차려진 저녁 식탁을 두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바라보다가 나오려는
눈물이 우스워져서 또 웃었지
흉터를 그리는 동안 허방에 만든 방처럼 아니, 빵처럼 달이 차오르고
오늘밤이 너는 부럽고,
너, 여자야, 그 달이 그리웠니? 여자야, 너의 식탁이 너무 넓어 손 닿지 않아 먹고
싶니? 수면제는 네 마음속에 식도처럼 이어진 길을 지우며 간다 빈방으로
배고픈 여자야, 너는 혼자
돌아가는 초침처럼 날카로워져 재촉하며 빈방을 채우려고 빈방을 짓고 그 빈방 속에 또 빈방을 짓고 가장 깊은 곳에 제
입을 벌려놓고
여자야, 빈 입을 뭣하러, 뭣하려고? 거짓말을 넣게요 키스를 뱉게요 사람들을 넣게요 오해를 뱉게요
지금껏 뱉었던 모든 용서를 주워넣게요
식탁위로 흐르는 더운 김처럼 가면 쓰고 흩어진 너의 진심과
어디에 토해놓았는지 찾을 수 없는 어떤 후회도 텅 빈 입에 죽은 싹 혓바늘처럼 돋아나
여자, 허기지다
바라만 보다
<집으로 가는 길>
어제
자취방서 밤새 까먹은 감귤냄새가 손에 배는 추운 날입니다 바람은 상처 많은 사람들을 벽으로 밀며 따뜻한 상가 속으로
모아놓는데 아무도 일으켜세워주는 사람 없이 평생을 드러누워 겨울을 맞는 우리동네 골목은 누가 옹실한 상처를 풀어내놓은
귤껍질처럼 비워놓았습니다 엄마 좋아하는 감귤 3천원어치를 맨손으로 들고 일부러 바람부는 길 한시간을 걸어왔습니다
갈라진 입술에 침을 바를 때마다 박하사탕 같은 바람이 상처를 화하게 했습니다 상처가 생기자마자 흉터로 만들어지는
법이 있던가요 선명한 피멍울을 오래 문지르지 않고도 멍 안 드는 법이 있던가요 이르게 얼어버린 골목 끝엔 오래전에
불 싸지른 자리처럼 이 섬 저 섬 그림자 젖고 하지만 우리가 모이는 아랫목이 뜨거워질수록 까놓은 귤껍질이 말라가는 동안은
얼마 걸리지 않아요 대문 열려 나온 엄마의 따뜻한 파카 속으로, 할머니 감기 걸렸는지 기침하는 소리 가로등 노란
불빛 아래 빈 골목이 일어서서 서성이는 소리 금방 까놓은 감귤처럼 까발려진 살 속에서 곪아나오는 환한 향기들이 터져나오는
소리 안깁니다
<후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미처 반납 못한 백과 사전 하나 발견했지 귀퉁이에 꽝 찍힌 날인을 바라보며 문득 주소처럼, 소인처럼, 그래 그렇게 이름
가진 것들 제자리로 보내야겠구나 하는 생각 스쳤지 그제야 그리워진 소풍처럼 모교를 걸었지
은행나무
전나무 사철나무 들 어긋어긋 서있는 이삼백 미터 진입로 나무 그림자들 한 방향으로 평행선인 게 언젯적부터였지
그동안의 후회만큼 비탈진 등교길 열정도 관성을 따르는 걸까 풍경은 마음의 등을 떠밀고 올라가네
잠긴 도서관
앞에서 반납 못하고 영원히 연체한 백과사전 들고 어쩔 수 없이 소곤소곤 문틈을 훔쳐보았지 그 틈 속에 그만 우리를
반납하고 싶었네 술래처럼 숨은 기억의 당번에게 제발 우리의 자리에 꽂아주세요 하고 싶었네 제자리에서 다시는 대출되지
않게 해주세요 하고도 싶었네
세로로 정렬된 낯익은 추억의 방향 끝엔 누구의 이름을 꽂아놓아야 하나 입학식날
새로 맞춘 명찰처럼 반짝반짝, 불러주던 우리 이름들 마음의 빈자리에 출석을 하네
너, 몇년을 유급하는 거니?
<아프지 말라고>
내 친구가 그랬다
1
잠을 자는 건지 그냥 자는 건지 무엇을 자는 건지 모르겠다 하연이는 잔다
2
내일은 오늘보다 낫겠지 속아도 좋아
3
잠을 자면 혹시 내일은 보고 싶은 사람이, 가보고 싶은 거리가 해보고 싶은 사랑이 깜빡했던 오래된 약속들이 다
생각날 것만 같았어
4
아니, 사실은, 사실은 말야 밤은 날마다 내 꿈의 시력을 건포도처럼 쪼글쪼글 말려 반짝이는 무엇도 기대하지 않게 해
내 꿈은 전원이 나가버렸어 대신 나를 켜지마
5
우리는 사랑을 하는 건지 그냥 사는 건지 무엇을 사는 건지 모르겠다
6
그렇다고 어제 일기가 거저 넘겨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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